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정의의 찬가---롤하이저 신부님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04 조회수442 추천수4 반대(0) 신고
예수님의 조상이었던 위대한 유다 예언자들은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했다.
“여러분의 믿음의 깊이는 그 당시의 정의에 따라 판단되고, 그 당시의 정의는 과부나 고아나 이방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살고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말에 동의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지막 심판 날을 설명하실 때 교리를 지켰는가, 성경을 잘 알고 있었는가, 교회에는 빠짐 없이 나갔는가, 신앙심이 깊었는가, 성(性) 도덕을 지켰는가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했는가를 보고 심판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의 추천서 없이 하늘 나라에 가지 못한다. 예수님과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예언자들은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과거 150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회 회칙에도 분명히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최근의 교황 바오로 2세의 사회 회칙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이는 교회의 예언자들의 말씀에도 나와 있으며 전(前) 세대에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던 마더 데레사, 도로시 데이(Dorothy Day),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윌리엄 스트링펠로우(William Stringfellow)와 캐서린 도허티(Catherine Doherty) 같은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 또 지금 세대에 들어와서 우리는 투투 주교(Bishop Tutu), 넬슨 만데라(Nelson Mendela), 진 바니에르(Jean Vanier), 헨리 뉴웬(Henri Nouwen), 대니얼 베리건(Daniel Berrigan), 브라이언 헤히르(Bryan Hehir)와 짐 왈리스(Jim Wallis) 등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러한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다른 종교의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고 도덕에도 반(反)하지 않았을 뿐더러 불변의 진리로 여겨져 왔다. 우리의 신앙의 깊이는 소외된 과부나 고아나 이방인과 같은 가난한 사람에 무엇을 해주었느냐에 따라 판단되게 된다. 정의에 대한 찬가는 다음과 같이 많이 있다.
 
우리의 희망이 아직도 여물지 않았기에 우리는 다시 불 위에 희망을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오순절을 기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사유재산의 하나로 만들지 말고 소중한 영혼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메리 조 레디(Mary Jo Leddy))
 
나는 나의 영혼 안으로 자비가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난 후, 나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한 후 나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어느 주일 나는 십자가 위에 계시는 주님의 그림을 보면서 문득 주님의 신성한 한 손에서 흐르고 있는 피가 생각났습니다. 아무도 이 피를 서둘러 받지 않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발에 영혼으로 남아 있는 신성한 이슬을 맞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슬을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우시면서 하는 말씀이 내 마음에 계속 들려왔습니다. 목마르다!” 이 말씀이 내 안에 알 수 없지만 살아있는 불을 지폈습니다. 나는 주님께 마실 것을 드리고 나서야 영혼에 목말라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녀 리지외의 데레사(Therese of Lisieux))
 
“품삯은 현금입니다.
현금의 품삯은 현금의 결핍을 더욱더 느끼게 합니다.
현금의 결핍은 부도덕한 경쟁을 부추깁니다.
우리는 지금 그 부도덕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로렌스(D.H. Lawrence))
 
일곱 가지의 사회악(社會惡)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칙 없는 정치, 일하지 않고 얻는 부(富), 부도덕한 상거래, 무책임하게 즐기는 쾌락, 인성교육을 하지 않는 교육, 인간성을 무시한 과학,
희생 없는 신앙입니다.”(간디)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는 힘은 폭력입니다.
정의가 없는 동정은 감상(感傷)입니다.
마르크시즘에는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의 없는 사랑은 거짓말입니다!(신 추기경(Cardinal Sin))
 
“벼룩들은 개를 사는 꿈을 꾸지만 사람은 아무도 가난에서 도망치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신비한 날에 갑자기 비가 오는 행운이 오게 되면 그들은 물통에 비를 담습니다. 그러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니 영원히 행운은 비를 내려주지 않습니다.
행운은 이슬비로도 내리지 않고, 아무리 간절히 바래도 오지 않고,
그들의 왼 손이 간지러워도 오지 않고, 그들의 오른 발로 새로운 날을 시작해도 오지 않고, 새로운 각오로 새해를 시작해도 오지 않습니다.
아무도 어린이를 소유할 수 없을뿐더러 아무것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아무도 토끼처럼 달려가도, 평생 죽어 있어도, 아무리 뒤틀더라도
아무것도 아무도 소유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을 말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믿지 않고 미신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을 하지 않고 뜨개질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를 만들지 않고 전통만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인적 자원(資源)입니다.
우리는 얼굴을 갖고 있지 않고 팔만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고 숫자만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 실리지 않고 지방 신문의 사회면에만 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죽이는 총탄보다 가치가 없습니다.”(우루과이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갈레아노(Eduardo Hughes Galeano(1940- )의 시 <아무도(The Nobodies)>)
 
이 세상에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가장 약자(弱者)가 살아남는 법칙만 존재합니다.”
(알폰스 코이터(Alphonse Keuter))
 
“죄 없는 사람들이 전혀 고통을 받지 않는 세상은 만들 수 없지만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덜 받는 세상은 만들 수 있습니다.”
(브라이언 헤히르(Bryan Hehir))
 
“우리는 당신의 돈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필요할 때 당신에게서 훔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고 일자리를 얻는 것입니다(교회의 깡패 두목과 사장). 그리고 잃는 것은 일자리뿐입니다.”(크리스티나 크로포드(Christina Crawford))
 
인생의 내리막 길을 걸어가면서 하느님의 옷자락을 잡으려고 하거나 우리의 생명을 인도할 영혼을 찾으려고 한다면 아래를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찾으시려고 하는 것은 오늘도 더 작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더욱더 땅 가까이 있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땅 아래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느님을 찾으려면 기꺼이 작은 것을 찾고 기꺼이 더 낮아져야 합니다. 아래를 보아야 합니다. 아래를 보아야 합니다. 아래를 보아야 합니다.”(멕시코 원주민 아즈텍(Aztec)의 시)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