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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의 수의 (壽衣)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23 조회수556 추천수8 반대(0) 신고
 
 

 

 

 

요한복음이 전해주는 빈무덤 사화에서는

공관복음에서처럼 천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빈 무덤입니다.

 

무덤의 주인도 없고 천사도 없는 대신

요한의 빈 무덤엔 수의(壽衣)만 흩어져 있습니다.

몸을 감쌌던 아마포는 풀어져 있었고,

머리를 덮었던 수건은 따로 한곳에 곱게 개켜져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복음사가는 수의의 상태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머리 수건을 잘 개켜 정돈해놓은 예수님의 부활은,

누군가 수의를 풀어주어야 했던 라자로의 소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수의가 그것만을 말하고 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수의 전체가 모두 곱게 개켜져 정돈되어 있다면 더욱 좋지 않을까요?

 

 

흐트러져 있으면서도 개켜져 있는 예수님의 수의에서는

동(動)적인 움직임과 정(靜)적인 고요가 함께 공존합니다.

능동적인 의지와 수동적인 의탁, 정적인 기도와 동적인 활동이

늘 조화롭게 이루어졌던 그분의 일생을 수의 한 벌은 대변해줍니다.

 

그분의 수의는 또한 그분의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풀어헤쳐진 아마포는 누군가가 수의를 풀어드렸음을 뜻합니다.

즉 그분의 부활은 수동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개켜놓은 수건은 그분 스스로 일어나 수건을 걷어 정돈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분의 부활이 능동적이었음을 동시에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능동적인 의지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며

동시에 아버지의 손에 ‘일으켜진’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성경 구절은

수동과 능동을 가리키는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집니다.

 

한 벌의 수의는 그것만을 말하고 있을까요?

풀어 흐트러진 옷자락은 이제부터 제자들이 입어야 할 옷이며,

정연하게 개켜진 머리 수건은 당신의 몫으로써 남겨두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그래서 수의는 바로 그분을 머리로 하고

제자들을 몸으로 하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진 교회.

그분이 머리 되시고 제자들이 지체가 되는 교회.

그분의 수의를 입고 종말을 미리 앞당겨 살아야 하는 교회.

그래서 그분에 의해 다시 일으켜지는 존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수의를 입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요한의 빈 무덤 이야기에서는

두 제자들의 동작 안에도 이중적인 움직임이 공존합니다.

즉 앞 다투어 달려가다가도 뒤로 물러서며,

멈추어 섰다가도 서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언제 어디서나 전해야 하는 사람들인 우리들도

그렇게 앞서 달려가다가도, 멈춰 서서 기다려주고,

서로 경쟁하면서도 양보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들을 빈 무덤 사화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수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빈 무덤은 정말 비어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무덤은 그분의 부활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2006. 4월에 올렸던 글을 다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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