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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31) 이런 상담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2-16 조회수475 추천수4 반대(0) 신고
 

2004년1월7일 주님 공현 후 수요일(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 사제기념) ㅡ요한1서4,11-18;마르코6,45-52ㅡ

 

         (31) 이런 상담

                    이순의



 ㅡ선택ㅡ

국가 경제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국가 경제가 어렵기 전에도 어려운 사람들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것은 사회적인 구조의 형성과 조화를 위해서도 불가불의 관계이다. 몇 퍼센트도 되지 않는 인류 초부유층에게 하소연을 해 보아도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의 평등은 불가능하므로 그들이 살아가야 할 방법은 끼리끼리 위로하고 버팀목이 되어주며 이해하는 길 뿐이다.

 

많은 것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 그렇다고 아주 없지도 않은 어중동이 생활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시련이 오면 참으로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마음은 기본 유지가 되어왔으므로 기본적인 생활은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기본유지가 되지 못하므로 그 모습을 주변에 드러낸다는 것은 죽기보다 더 싫은 상황이 된다.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종교 활동에서도 종종 그런 상황으로 갈등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국가의 현실이 곧 종교의 현실이므로 종교 안에서라고 다르지는 않다. 사회속의 구성원이 곧 종교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에게 딱히 도와줄 방법은 없다. 세상에는 그들보다 더 못 살고 더 힘들며 더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그들의 어려움을 어려움이라고 인정한다는 그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본 수준을 동등하게 유지해 온 자존심을 쉽게 주변에 드러낸다는 것은 도움을 받는 것 보다 더 힘겨운 난관이다. 때에 따라서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마음을 겸손이 부족하다고 단정 짓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겸손의 부족이나 교만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달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속하고 구성되어 활동했으며 벗으로 삼아온 사람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당신보다 나빠졌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정말로 잔인한 형벌인 것이다. 잘 살지는 못해도 평균생활을 유지해 온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자신이 사회의 평균에서 제외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드러내라는 것은 정말로 아픈 선고인 것이다. 그만큼 사회적 동물이라는 영장류의 우월성이 인간 스스로에게는 때때로 상당한 부담이 되는 사회 구성원이 되기도 한다.

 

사람의 세계는 끝이 없는 욕망 덩어리이다. 지구 최상의 갑부에게 당신은 이제 돈을 그만 벌겠는가? 라고 묻는 그 자체가 어리석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돈 벌수 있는 길이 상실되고 있다는 걸 만방에 알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은 자기 내면의 세계를 차단함으로서 자기는 평균에서 도태되지 않았다는 위안과 함께 그 삶을 되찾기 위해 실로 뼈를 깎는 노력과 결단을 실행하게 된다. 그렇다고 모두의 노력이 다 성공하는 희극을 볼 수는 없다는 것이 인간의 생태학적 질서가 아니겠는가!

 

건강의 악화로 전화까지 차단을 해 버리고 철저히 쉬고 있었는데 슈퍼에 물품을 사러 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다. 누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외면을 하려다 예감이 좋지를 않아서 전화를 했다. 오랜만의 전화음성은 지쳐 있었다. 자신의 현실을 들어주고도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나 뿐이었다는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다. 해결사는 본인들이다. 마음을 비우고 사심 없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들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게 힘들어서 병이 나기도 했지만!(^-^)

 

남편의 실직, 낮아질 수 없는 실직자 남편의 권위, 해 왔던 취미생활과 끈을 수 없는 인간관계, 훌쩍훌쩍 크는 아이들, 날마다 소비되는 씀씀이, 학원, 그리고 산재되어가는 갈등과 생략 할 수 없는 가족관계와 의무, 등등. 가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고행이었다. 더구나 여인에게 있어서는 어느 것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아니면 가정을 깨느냐 유지하느냐의 극단의 처방만 있을 뿐, 참으로 여인은 기구한 운명체이다.

 

여자들에게 가정주부라는 세월은 모든 사회적인 적응을 도외시하게 된다. 여섯 시간짜리 일터가 나은가 열 시간짜리 일터가 나은가로 시작된 상담은 일이 힘든 것과 편안한 것, 보수가 얼마짜리가 나은가까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상담이라고 하기보다는 하소연에 가까운 주문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언어의 방향은 항상 정해져 있다. 가정이 무너지는 것 보다는 돈을 택하라. 육신이 편한 것 보다는 시간이 짧은걸 택하라. 회식이 잦은 고급일 보다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은 일을 택하라.

 

극도의 상실감은 가정을 지켜 낸다는 것이 몹시 힘이 들다. 그러므로 상실의 우울증을 앓는 것 보다 한 푼이라도 버는 게 유리하다는 걸 나의 경험으로 습득한 사실이다. 보수가 같다면 시간이 짧고 노동의 대가가 비싼 쪽으로 택하는 것이 가족에게 유리하다. 지쳐서 잠을 자더라도 엄마가 집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이들의 심성에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으로서 종사 해 온 전문직이 아니라면 업무가 근무시간 이외의 회식자리까지 요구하는 일을 삼가 하도록 권한다. 전업주부로 살아 온 엄마를 둔 아이들은 갑작스런 엄마의 늦은 귀가를 감당해야 하는 혼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참고 사항을 곁들여 주었을 뿐 그분은 자기의 답답한 심정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묘약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그분 스스로가 누구에겐가 자신을 드러냈다는 그 사실이 한 가닥의 세상을 수용하고 있으며,  아직 자기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분 스스로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아직 지니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의 하소연을 왜 들어주느냐고 하문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를 구성하는 영장류의 자부심을 위해서라도 끼리끼리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여인의 방황을 안고 한 마디 한마디 고민을 털어 놓으신 그분께 당신의 희생이 생명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라고 전하고 싶다. 이 시대가 그 어려운 고비를 넘기지 못 해서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경우의 생명의 부재를 가슴 아파해야 한다. 나도 내가 선택한 사람의 생명을 지켰고, 내가 낳은 자식의 생명을 지켰으니, 당신도 그렇게 해 보시라고 요청하고 싶다. 험난한 산맥을 넘어야 할 여인의 운명은 희생이라는 문장조차도 오만이라는 걸 그 산맥을 넘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용기를 잃지 마세요.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길이 당신께 달려있습니다.

ㅡ아멘ㅡ

 

ㅡ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4,11-12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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