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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23일 야곱의 우물- 요한 20, 1-9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23 조회수542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요한 20,1-­9)
 
 
 
 
계절은 봄이고
하루 중 아침
아침 일곱 시
진주 같은 이슬 언덕 따라 맺히고
종달새는 창공을 난다.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하느님은 하늘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평화롭다.
-로버트 브라우닝, <아침의 노래>

 
장영희 선생님 글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는 이런 평화는 어떤 때 찾아올까 상상했는데, 부활 복음을 읽다 보니 이 구절이 떠올라 옮겨 적습니다. <피파가 지나간다>라는 극시에 등장하는 이 노래는, 베니스의 어느 실크 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소녀가 일 년에 한 번 있는 휴가 날 아침에 부른 노래랍니다. 줄거리를 모르더라도 한껏 희망과 기대에 부푼 봄날 아침의 전경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가난한 소녀가 맞이한 들뜬 휴가 날 아침의 설렘이 한편 서글프기도 합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1절)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내드리고 맞이한 막달레나의 아침 또한 특별합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날 아침의 고요, 겪을 거 다 겪고 포기할 거 다 포기하고 난 뒤의 평화로움, 긴 설움과 울부짖음 다음의 후련함 같은 것이 막달레나의 아침에서도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빈 무덤으로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신비투성이입니다. 오늘 말씀 어디에도 예수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과 달리 막달레나가 왜 무덤에 갔는지는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별다른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겠지요. 한 번이라도 더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 곁에 있고 싶었을 겁니다.
 
마태오복음에 따르면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는데(마태 28,4 참조),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용감했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만 보고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 시신을 도둑맞았다고 전합니다(1­-2절).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주님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구구절절 묻어납니다.
 
서둘러 달려온 베드로와 사랑받는 제자가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베드로와 애제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오는 모습은 요한복음 특유의 전승에 속합니다. 학자들은 초대 교회에서 그들의 갈등 상황을 미루어 짐작합니다.
 
베드로의 권위를 존중하되 은연중에 애제자의 비중을 강조한 표가 납니다(8절 ‘보고 믿었다.’).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6­-7절) 예수님은 죽음의 흔적인 아마포와 수건을 벗고 무덤을 나오셨습니다. 시신을 도둑을 맞았다면 함께 통째로 없어졌을 것입니다. 한쪽에 얌전히 개켜져 있기까지 합니다. 이런 정황이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기에 충분하건만 제자들은 시신이 없어진 것에만 골몰합니다. 그들이 찾고자 한 것은 돌아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9절).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사라진 시신에만 연연해할 수밖에요. 돌아가신 사실만으로도 참담한데 시신마저 잃어버렸으니 예수님 앞에 얼마나 면목이 없었을까요.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은 터덕터덕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절). 그들의 신앙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깨우칠 것이 더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혀 계시지 않습니다. 무덤에 붙잡아 둘 수 없는 분이십니다. 돌을 치우고는 자유로워지셨습니다. 빈 무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텅 빈 충만! 썩은 육체가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의 체취로 충만한 무덤입니다. 무덤이 다시 살아나는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이젠 무덤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돌을 치우고 무덤에서 나오신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을 찾아 나서실 것입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에겐 적극적입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막달레나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장면에 여러 번 등장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먼저 달려간 막달레나는 예수님 부활의 첫 순간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킨 것이 여인들이었으니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는 은총 역시 그들에게 돌아갑니다. 본디 여인에게는 증언할 자격이 없었지만 엄연히 부활의 첫 목격 증인은 그녀의 몫입니다. 그러나 아직 빈 무덤 앞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막달레나의 주간 첫날 아침은 무덤을 비우신 예수님의 부활 향기로 어지럽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아직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파라는 소녀는 그 마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네 사람의 창 밑을 지나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 일로 자신의 귀한 하루를 소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저마다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오히려 피파의 노래에 위로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답니다.
 
날이 저물어 피파는 자신이 네 사람의 영혼을 구한 줄도 모른 채 고달픈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이 글은 끝납니다. 피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네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걸로 일 년에 단 하루뿐인 휴가를 멋지게 보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부른 첫 노래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하느님은 하늘에….’ 가난한 그 소녀처럼 평온한 부활 아침을 맞습니다. 우리의 부활 노래가 누군가의 영혼을 구할 수 있기를 빕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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