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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7 조회수442 추천수1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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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예수님 

청주에 있을 때 어느 은행 지점장을 만나 일을 보고 나오는데 그

 은행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만 볼 수 있게끔 은행 천장에 뭐가 하나 매달려있었어요.

‘백 배 이익은 1이 0이다.’

문을 열고 나오려다가 분심이 들어가지고 한 30분 동안 끙끙대다가 그 의미를 알아냈어요.

다시 지점장실로 들어갔지요.

“아니 신부님, 가신 줄 알았더니 어떻게 또 오셨습니까?”

“저게 무슨 암호입니까?”

“‘우리 은행 직원들만 알고 있는 암호입니다.”

“나도 뭔가 눈치를 챘다...내 말이 틀릴지 잘 모르겠지만  ‘백 배 이익은 1이 0이다.’

그 뜻은 손님 100사람한테 잘해도 한사람한테 불친절하면 그냥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이제껏 공로가 다 땅에 떨어진다...’ 뭐 혹시 그 뜻이 아닙니까?”

이 지점장이 입을 못 다물어.

“세상에~~ 신부님, 어떻게 알아냈습니까?”


사순절은 우리들이 열심히 공로를 쌓다가도 마귀의 장난에 한순간에 공로가 허물어지는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축복의 시기면서 동시에 사탄의 장난의 시기이지요.

다른 어느 때보다 이 사순절동안에는 마귀의 장난이 극심합니다.


오늘 2독서에 ‘여러분들은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사순절이 이제 깊어만 가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얼마나 하느님과 화해했고, 여러분 자신과 화해하고 사십니까?

또 주변 사람들과 화해하고 사십니까?


오늘 우리들이 들은 이 긴 복음은 돌아온 아들의 비유입니다.

다른 말로 탕자의 비유, 또 다른 말로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이야기라고 나옵니다.


유대인들의 법에 의하면 장자는 아버지가 죽으면 재산의 3분의 2를 가질 수 있고,

차자(次子)는 재산의 3분의 1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라고 하더라도 병이 들었거나 해서

실제적으로 재산을 관리하기 어려우면 살아있으면서도 재산을 떼어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재산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또 당장 죽게 된 것도 아니었는데

‘어차피 아버지 죽고 나면 그 재산 3분의 1은 내 꺼가 될 것이 아니요? 아버지 죽고 난 다음에

주는 것이나 살아있을 때 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내가 필요할 때 내 재산가지고 가겠소. ’

이렇게 협박 공갈을 해서 아버지의 재산 3분의 1을 뜯어내어 아버지의 집을 떠납니다.

이런 작은 아들의 태도에는 굉장한 몰인정함이 나타납니다.

우리들이 묵상해야할 것은

둘째 아들은 마치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아버지 대하듯 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은 이론적으로만 살아있고,

하느님은 이론적으로만 거룩하고, 하느님은 이론적으로만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신자생활하면서 여러분은 정말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의 인생가운데서 몇 번이나 체험하고 사십니까?


유명한 과학자요, 신앙인이었던 파스칼은 살아있는 하느님을 체험했던 바로

그 순간을 잊어버릴 수가 없어서 한평생 그의 옷 안쪽에다 양피지에 글을 써서 매달고 다녔습니다.

옷을 벗고 입을 때마다 떼어서 바꿔달았고, 죽을 때 수의 안쪽에다가 달라고 유언을 했던 그 내용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그리고 나 파스칼의 하느님,

그 하느님을 나는 몇 년 몇 월 몇 시에 만났다.’

파스칼은 신앙이 약해지고 흔들릴 때마다 하느님을 만났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자기 옷 안쪽에 있는 그 글씨를 보면서 신앙심을 북돋웠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느님을 처음 만났던 곳은 어디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이 세례를 받았던 성당일 겁니다.

진천성당에서 세례 받으신 분들은 바로 이 진천성당이 하느님을 첫 번째로 영접했던 장소입니다.


저는 사제서품을 5월 14일에 받았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5월 14일이 되면 저 혼자 내덕동 주교좌성당에 가서

오전 내내 몇 시간씩 묵상을 하고 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사제가 됐던 그날을 생각하면, 그때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눈물 콧물이 되어서 기운이 다 빠졌다가도 다시 기운이 솟아납니다.


야곱은 하느님을 만났던 장소가 바로 베델이었습니다.

신앙이 흔들릴 때마다 야곱은 베델을 찾아가서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살아있는 하느님 밑에서 신앙생활을 해야만

그 신앙생활이 기쁘고 행복합니다.

미사시간에 앉아있으면서도 십자가를 쳐다보더라도

성체가 내 혀 위에 올라오더라도 덤덤하고, 아무 감각이 없고, 감동이 없다면....

복음에 나오는 이 둘째 아들처럼 살아계신 하느님을

죽은 아버지 대하듯이 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컴퓨터가 아니요, 목석도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신 인격적인 하느님이요, 살아 숨 쉬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내 곁에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여러 가지 징표를 통해서 내가 죽은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시고 계십니다.

첫째, 하느님은 성서를 통해서 당신께서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거듭거듭 얘기해주고 계십니다.


예레니모 성인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면서 성서를 읽어보지 않는 사람은 새빨간 거짓말쟁이이다.’

아무리 전교 한다 뭐 한다 떠들어도 성서를 읽지 않고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단언을 했습니다.


우리들이 나중에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가면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어보실 제일 첫 번째 것이 뭐냐?

‘너 살아있으면서 네 눈으로, 네 힘으로 창세기부터 신약성서 맨 마지막 요한묵시록까지 한번이라도

읽어봤느냐?’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했을 때는 분명히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너 어찌 성서 책도 읽어보지 않으면서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한평생을 떠들고 살았느냐?’

호된 질책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에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하느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이 어떤 뾰족한 비수보다도

더 강하게 우리의 심령을 쪼개놓고 생각과 속셈을 드러내게 하고 모든 위선을 다 끌어내버립니다.

그러나 성서를 펼치고 무조건 페이지만 넘긴다고 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게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은 아닐 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정말 우리 심령에 파고들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조건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사제의 강론을 듣기 전에 화살기도를 쏘셔야합니다.

‘성령님이시여! 사제 입을 통해서 나오는 저 말이 분심거리로 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리게 해주십시오!’

성경책을 펼치고 읽을 때마다 먼저 눈보다도 마음이 성령을 빌려야 됩니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오늘 내가 읽으려고 하는 이 성서의 말씀이 내 인생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말씀으로 내 눈에 보이도록 내 마음에 들려지도록 오늘 이 시간을 축복해주십시오.’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이 살아있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타 본당 교우들이 우리 성당에 오면 적지 않게 충격을 받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서 책을 가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곳에 부임해서 1년 동안

“성서 책을 꼭 가지고 다녀라. 군인이 전쟁터에 나갈 때 총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필수이듯이

주일미사에 오면서도 성서 책을 안가지고 빈 몸만 달랑달랑 오는 자는 그 미사시간에 축복을 받더라도

찌꺼기 축복밖에 못 받을 것이다.” 하고 일 년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를 했습니다.


1독서, 2독서, 복음을 미리 읽고 미사가 시작되면서 다시 한 번 듣고, 복음때 사제와 같이 읽고,

강론을 들을 때는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쫙쫙 하느님의 말씀을 빨아들이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저절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측에서 최소한의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 준비 중에 첫 단추가 성서를 들고 성당에 와야 됩니다.

신부님, 미사 때는 성서책을 안 들고 와도 집에서 열심히 봅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아무리 열심히 보아도 전례 때 성서를 가지고 오지 않는 자는

제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영접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성령의 눈으로 성서를 읽기 시작하면

항상 내 옆에 성서책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지찌직~~  할때까지 TV보는 것, 헛되고 헛됩니다,

‘성서를 읽으니 이렇게 행복하고 좋은걸 내가 왜 텔레비전에만 빠져서 살았던가!’

사람끼리 모여서  수다 떨면서 보내는 시간도 헛되고 헛된 겁니다.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하는 할머니가 성서 책을 읽으면서 한글을 깨우칩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할머니가 성서를 읽고 성서구절을 외우면서 대학교

교수를 끌고 성당으로 인도하여 예비자 교리반에 입교를 시킵니다.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이 세상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성서구절을 많이 외우고 있기 때문에 아무집이나 초인종 누르고 들어가는 겁니다.

여호와증인들은 성서를 달달 외고 있기 때문에 천주교신자를 여호와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다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말씀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기들 생각대로 꿰어 맞추는 성서라 잘못된 부분이 많지만

자기들 나름대로 말씀에 충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살아있다고 하는 첫 번째 출구는 말씀입니다.

성서를 읽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아직까지도 성서책을 들고 다니지 않는 분들, 집에서 성서를 보지 않는 분들은

오늘부터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이 오신다는 것을 굳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열 번 듣는 것보다는 한 번 읽는 것이 더 은혜롭습니다.

열 번 읽는 것 보다는 한 번 쓰는 것이 훨씬 더 은혜가 충만합니다.


두 번째, 살아계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는 길은 성사를 통해서입니다.

일곱 가지 성사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당신이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세례받기 전에 지었던 수많은 죄가 다 사함을 받습니다.

세례 받는 날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또 견진성사를 통해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를 받고 굳세어집니다.

죄 지을 때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세상 어떤 종교에도 없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신품성사, 혼배성사 병자성사,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인간이 지상에서 만납니다.


우리는 천국을 가지 않아도 일곱 가지 성사만 온전히 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을 이 땅에서 만날 수 있고 천국을 바로 이 자리까지 끌어내릴 수가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고백성사를 보는 사람은 항상 천사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성체를 영할 때마다 정말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다고 믿고 마지막 성체를 영하는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는 자는 눈물 콧물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습니다.

일곱 가지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은 당신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아주 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보여주십니다.


세 번째로 살아 있는 하느님은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우리들에게 들어오십니다.

성공한 체험보다는 실패한 경험을 통해서 당신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살아가면서 모든 일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은 물론 하느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약하고 교만한 인간들은 모든 일이 잘 될 때는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내가 달라고 해서.. 한마디로 내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성공한 줄 알고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는 겁니다.

몸이 건강할 때도 지가 지 몸 잘 관리해서 건강한 줄 알고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련과 실패라고 하는 고통을 당할 때마다 우리들은 우리의 존재를 깨닫습니다.

얼마나 약하고 그리고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모습을 통감합니다.


예상치 못한 고통을 통해서 성화가 됩니다.

영성 중에서 제일 높은 영성은 성공의 영성이 아니라 실패의 영성이요, 고통의 영성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수많은 선지자들,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만난 장소는 꽃밭속이 아니었습니다.

평지가 아니었습니다.

늪지대에서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 하느님이 내미는 손을 잡고 빠져나오면서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한 발 앞도 절벽이요, 뒤에도 절벽인, 사면초가에서 하느님이 날개를 달아주셔서

그 날개로 날아가면서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성서에 다윗 왕이 등장합니다.

유대에 나오는 여러 왕 가운데 거룩한 성자를 붙인 왕은 다윗밖에 없습니다.

솔로몬도 일을 많이 했지만 그냥 솔로몬이라고 그러지 聖솔로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례명 가운데 다윗이 있지요?

솔로몬이라고 하는 본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성인에게는 하느님 앞에 가슴을 치고 통곡해야 하는 쓰라린 상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궁궐의 베란다에 나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어느 여인이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모습이 다윗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 음란 마귀가 다윗에게 들어옵니다.

‘저 여자를 내가 가져야만 되겠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여자를 내 침대로 끌고 오너라!”

비서를 시켜서 여자를 데려다가 간음을 하고 보석 몇 개 주어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여자가 가고 난 뒤에 다윗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혹시 임신이라도 되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남편이 누구냐?’ 하고 알아보았더니 지금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 군인

‘우리야’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우리야를 빨리 불러들여서 특별외박을 시켜라!”

우리야는 우직한 군인이기 때문에 자기 아내와 동침을 하지 않고 군복을 입은 채로 자고

다시 전쟁터로 나갑니다.

작전이 실패하자 다윗은 우리야에게 편지 한 통을 들려 보냅니다.

“너의 상관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어라.”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놈은 죽여야 되니까 전쟁터 제일 앞에 이놈을 세우도록 하라!”

우리야는 죽었습니다.

우리야가 죽었기 때문에 다윗은 작전이 완벽히 성공한 걸로 착각합니다.

우리야가 분명히 집에 다녀간 것을 알기에 그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우리야의 아이라는 것이 이론적으로 들어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단 예언자는 다윗의 이런 비리를 알고 있었기에 다윗 앞에 와서 예화를 들어 이야기 하였습니다.

“임금님, 세상에 이렇게 나쁜 놈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어느 주인이 자기는 가축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 하인은 자식처럼 기르는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이 주인이 손님들이 왔다고 해서 지가 기른 가축에서 고기를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하인의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을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 세상에 그렇게 나쁜 놈이 어디 있냐?”

“그 얘기가 바로 임금님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땅을 치고 통곡을 했습니다.

남의 아내를 탐했던 이 뼈아픈 과거를 통해서 다윗은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덮어씌우기 위해서 살인죄까지 서슴없이 저질렀던 악한 인간이었었으나

회개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함으로써 거룩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은 역설의 종교라고 합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고 우는 사람이 웃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가톨릭은 거리의 여자였던 막달라 마리아가 성녀가 된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라고는 눈꼽만큼도 없기 때문에 당당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만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의 고독을 통해서

가시덤불 속에서 야훼의 목소리를 들었듯이

베드로가 세 번의 배반이라고 하는 치욕적인 사건을 통해서

으뜸사도가 되었듯이 가톨릭에서 성인 성녀는 고통가운데서 피어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성서 말씀을 통해서

성사 생활을 통해서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을 죽은 하느님 대하듯 하지 않았는가~~ 반성해야 됩니다.


오늘도 살아계신 하느님은 이 김신부의 입을 통해서 여러분의 심령속으로 씨를 뿌리러

들어가셨을 것이요, 잠시 후에 거행되는 성찬례를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여러분의 몸과 하나가 됩니다.

성체가 여러분의 혓바닥에 녹아내리는 순간

여러분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서 말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처럼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서 봉사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처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어서 희생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천주교신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고 하는 것을 믿으면서

얼마 남지 않은 부활절 거룩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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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티 성지 - photo by 느티나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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