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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48) 아버지의 본명축일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26 조회수556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4년1월24일 토요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

 

    (48) 아버지의 본명축일

                         이순의

               


 ㅡ기적ㅡ

오늘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이프란치스코의 본명축일이자 큰언니 살레지아의 축일이다. 전통 유교의 엄격한 가부장적인 집안에 천주교 제1호 효시가 된 사람은 큰언니였다. 큰언니가 시골 여중에서 도시로 고등학교를 가게 된 것은 그 시절의 농촌 마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가톨릭 학교인 살레지오 여고를 가게 된 것이다. 그것이 곧 바로 신앙으로 연결 된 것은 아니다.

 

외국을 가게 된 큰 언니가 이국의 삶을 신앙에 뿌리를 두면서 시작 되었다. 살레지아라는 세례명으로 주님의 선택을 받아 친정 가문에 이례적인 종파를 형성시킨 것이다. 큰언니는 그 때나 지금이나 집안에 천주교를 알린 신앙의 선조답게 진실한 믿음 안에서 열심히 신자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수녀님을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친척 오라버니들도 계셨고, 아무튼 천주교에 대해서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되었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친정 대소가의 상당히 많은 수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또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는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셨다. 80년 5월에 광주의 대학병원에 입원중이셨는데 무장군인들에 의해서 걸을 수 있는 모든 환자는 강제퇴원을 당하고, 그해 음력 9월에 가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주님의 백성이 되어 천국생활을 시작하셨다. 그 때도 의견이 분분 했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성당에 다닌다는 핑계로 액막이 굿 한번 못 하고 죽게 생겼다고 꾸지람이 대단하셨다.

 

지역의 유지였던 아버지와 친분이 깊으신 장로님은 오셔서 아버지를 당신이 세우신 마을 교회로 인도하고 싶어서 매일매일 기도로 일관하였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아버지의 대답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우리 큰 딸이 성당에 다니는디 어느 종교든지 다 좋지만 가정이 하나여야 된께 나는 우리 큰딸하고 합할랍니다."

 

집안 어른들의 노여움과 반발이 심하여서 어머니는 당사자인 아버지 몰래 큰 굿쟁이에게 거금을 주고 굿할 날을 받아 놓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처럼 굿하기 전 날 아버지의 상태는 더 나빠지셔서 서울로 이송되고 말았다. 그래서 굿은 계약금만 포기하고 못 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천주교 신자 되기는 그렇게 힘이 들었었다. 그 때 문중 전체에 신자는 큰언니와 큰형부 뿐이었다. 그 나마 형부는 미국에 유학중이었으니 신자는 큰언니와 자박자박 걸음마를 하는 어린조카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굿 장단에 휩쓸려 아버지는 세례를 못 하시고 떠나시지 않았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결국 서울대학병원에서 아름 아름으로 해서 연희동 본당의 레지오 팀이 왔었고, 다음에 신부님께서 오셔서 세례와 안수를 주신 걸로 알고 있다. 아버지는 아프시기 전에 성서를 읽어 보신적도 없고, 성당에를 가보신적도 없고, 기도문을 봉독하신적도 없다.

 

외국에서 4년여를 수고하고 돌아온 큰딸에 대한 각별한 배려만이 아버지가 하신 유일한 신앙의 행위셨다. 주일이면 곧 시집갈 딸을 어린아이 깨우듯이 깨워서 믿는데 소홀함이 따르면 안 된다고 꼭 주일을 지키게 하셨고, 주일 헌금을 꼭꼭 챙겨서 따로 주시는 한결같은 정성에는, 그 때의 그 모습을 보고 자란 내가 지금 내 아들에게 그대로 따라하며 증거 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아버지의 첫 고해이자 마지막 성사는 더욱 신비스럽다. 신부님만 모셔오라고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야단이 났다. 왜 신부님이 이렇게 안 오시는지 잠도 안주무시고 신부님만 찾고 계셨다. 그런데 시골 본당 신부님께서 피정 중이신(광주 민주항쟁 문제로 며칠간 교구대책모임에 참석 중이셨다고 함)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첫 고해이자 마지막 성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가 긴장되고 있었다. 그 무렵 사촌 오라버니께서 세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열심히 본당생활을 하고 계셨으므로 어찌어찌하여 본당신부님과 연락이 되었다.

 

정말로 어렵게 아버지의 첫 고백이자 마지막 고해가 이루어 진 것이다. 가족 모두가 물러나고, 오신 신부님과 아버지만의 독대가 조용히 안방에 누우신 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한참 후에 모두 들라는 명이 내리셨다. 모두 빙 둘러 앉았는데 큰아들더러 신부님께 십일조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큰 오빠는 십일조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 죽고 나서 너희들이 신부님께 약속을 안 지킬지 모르니 종이로 쓰라고 하셨다. 오빠는 다급하게 시키는 대로 써서 신부님께 드리려 했으나 아버지는 신부님께 드리기 전에 읽어 보라 하셨다. 오빠는 읽으셨고 지천을 들었다. 그건 바르게 쓴 것이 아니니 드리지 말고 아버지의 말을 받아쓰라는 것이었다.

 

뼈에 가죽만 남은 아버지의 마지막 사투치고는 너무나 강하고 단호하셨다. 앉지도 못하고 누우셔서 아주 가는 소리로 행하시는 모든 상황이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큰오빠는 아버지께서 불러 주시는 대로 받아써서 신부님께 드리려다가 또 지천을 들었다. 아버지께서는 소리를 내서 크게 읽어 보라는 것이었다. 오빠는 그대로 읽어 드렸고 아버지는 그제야 신부님께 그 종이 한 장을 드리게 하고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신부님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기적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성사이며 종부성사인 고해의 보속으로 십일조를 헌금하며 영혼을 사제에게 부탁하시는 아버지셨다. 신부님께서는 열 대의 미사와 기도를 약속하시고 죽음을 앞둔 영혼의 십일조와 함께 떠나셨다. 그 날 이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의 마지막 몸부림을 하실 때까지 이틀 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돌아 가셨다.

 

이끄시던 사업이 있어서 살아갈 사람으로서의 걱정이 많았던 어머니는 자꾸 부탁을 하셨다. 큰아들이 오면 이런 말을 해 주시라고. 그리고 아버지는 알았다고, 자네한테 미안한 세월을 살았다고 사과를 하며 허락을 하신다. 그러나 큰오빠가 퇴근을 하고 돌아와 앉으면 아버지는 그러셨다.

"이미 신부님한테 고백 다 했는디 무슨 할 말이 있당가."

그렇게 어머니께서 시키신 말은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섭섭해 하셨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진심이셨다. 성당에 가 보신적도 없고, 고해라는 교리를 들어 보신적도 없고, 성서를 읽어 보신적도 없는, 아버지의 고해성사가 모든 가족들을 놀라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대지 1950평의 친정집 뜰에서 장례미사가 이루어졌다. 너무나 많은 조문객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오셨고, 읍내 성당에서 면단위 마을에 출장을 오신 미사는 외인들 앞에서 당당하고 장렬하게 이루어졌었다. 친척들의 반발을 막으려고 상은 상대로 차려 놓고 그 앞에 제단을 만들어서 대미사를 보여준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 천주교 미사를 처음 보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친척들 또한 그렇게 장엄하고 성스러운 미사를 처음 보고 감동을 받는 눈치였다.

"저렇게 제사도 허락해 주는 교회라면 누구나 다닐 수 있것네." 라는 소곤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렸었다.

 

큰딸의 종교를 지켜주려고 병중에도 집안의 반대를 이겨내시더니 돌아가실 때는 진정한 신자의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부름을 받으신 아버지! 우리가족이 친척들에게 선교를 하려고 애쓰거나 노력을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80년 성탄에 우리가족 모두는 세례를 받았고, 그 후 친척들은 알게 모르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자가 되어 있었다. 그 은덕으로 나도 오늘 여기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묵상 글을 쓰고 있다. 나도 죽을 때 아버지처럼 멋진 고해를 선택받는 죽음이고 싶다. 너무도 짧았지만 아버지처럼 진정한 신앙의 모습으로 천국에 드는 날을 맞이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럽기 그지없는 아버지시다.

 

아버지는 문중 산에 묻히신 걸 거부하시고 작년에야 교회묘지 납골당으로 가셨다.

"나는 땅에 묻지 말고 양놈들처럼 아파트에 넣어주라."

생전에 TV를 보시면서 하시던 바람이 20여년도 훨씬 더 지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우리의 장묘문화가 납골당이 없었으므로 문중 산에 모셨는데, 작년에 큰 오라버니의 희생과 결단이 내려져서 광주교구 담양묘지의 납골당에 모셨다. 이제야 모두가 편안한 마음이다. 제대로 된 아버지의 자리에 모신 것 같다.

 

"아버님, 아파트가 매우 호화롭고 깨끗해서 좋으네요. 친구도 많이 사귀시고 즐겁게 지내세요. 산에 계실 때보다 저희들도 더 자주 찾아뵐게요."

큰 올케언니는 맏며느리로서 안도의 인사를 드렸다. 딸자식인 우리는 큰올케 언니께 찬사를 보낸다. 참으로 큰 일 해 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라고!

 

오늘은 내 친정아버지와 큰언니의 축일이다.

<아버지 축일 축하합니다. 큰언니 축일 축하해! 그리고 나에게 주님을 따라 살게 해 준거 너무 고마워! 우리 큰언니!>

 

ㅡ사울과 요나단은 살았을 때 그렇게도 정이 두텁더니, 죽을 때도 갈라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날쌔고, 사자보다도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주홍색 옷을 입혀 주고 그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사무엘하1,23-24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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