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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9일 야곱의 우물- 요한 11, 1-45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09 조회수449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묵상

그때에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요한 11,1-­45)
 
 
 
 
이 나이 먹도록 가장 가까이에서 죽음을 지켜본 것은 3년 전 아버지의 영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지인들의 부음을 듣거나 빈소를 찾아서는 그 순간 잠깐 가슴이 먹먹하고 삶이 부질없음을 느끼는 정도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말로만 듣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갑작스럽게 떠나신 게 아니어서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삶과 죽음의 경계가 크게 확대되어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으면 다 끝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 죽음도 삶의 연장이고 우리가 모르는 다른 형태의 삶으로 이어질 거라는 기대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만큼 ‘죽음’이란 단어가 그토록 절실하게 제 마음을 꽉 채운 적도 없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른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느낌이었으니까요.
 
누구한테나 공평하게 돌아가는 죽음 앞에 어느 장사가 당해 내겠습니까? 죽음이 무서운 것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어느 작가가 그러더군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 죽어 ‘셔올’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친히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되어주십니다.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일곱 번째 표징입니다. 이 표징은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드러나듯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키는 가장 완전한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의 가족을 사랑하셨다면서 정작 라자로의 소식을 들으시고는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다가(6절)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에야(39절) 그 가족에게로 가십니다. 그것도 얼마 전 돌에 맞으실 뻔한 일로 유다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8절), 말리는 제자들을 뒤로한 채 앞장서 가십니다.
늑장을 부리신 것도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신 것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4절)
 
라자로가 죽었는데, 죽을 병이 아니라니요? 여러 차례 예수님의 마음은 산란해지고 북받치십니다. 라자로의 죽음이 애통해서라기보다는 이토록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죽음의 세력에 화가 치미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당도하셨을 무렵 그의 육신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는 확실히 죽은 사람입니다. 생명을 잃은 몸은 썩기 마련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도 부패하여 본모습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아직 라자로를 살리기도 전인데 미리부터 예수님은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올리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41절) 예수님은 무조건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면 항상 들어주신다는 온전한 신뢰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참 신앙이란 이런 것이라고 본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 죽음을 건너뛰지 못하셨으면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십자가상 죽음이 단순한 생명의 소멸이 아님을 미리 내비치신 듯합니다. 점점 죽음으로 가까이 가심을 예감하시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비장한 각오도 단단히 하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절) 무덤에 묻힌 라자로를 깨우러 가십니다. 편견·무관심·악습·상처·두려움의 무덤에 갇힌 우리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믿음은 무덤에서 사람을 일으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많은 유다인들이 이들 자매를 찾아와 위로하였습니다(18­19절). 그들은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이 일로 많은 유다인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45절) 제자들의 믿음 또한 풍요로워졌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고(27절) 부활이요 생명이심을(25절)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이 그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 일로 신앙과 불신앙이 판가름납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여전히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결심을 합니다. 라자로의 죽음과 소생은 곧 맞이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앞당겨 내다보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에는 아버지를 모신 성당 근처로 이사 와 아버지와 한 본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곧장 아버지께 달려갑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막연하기만 하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이 조금씩 피부에 와 닿습니다. 육신을 뛰어넘는 생명, 죽더라도 살고 살았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그 무엇, 봉안당을 사이에 두고 저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교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 어느 날 문득 돌이켜 보니 아버지께 하소연했던 일들이 많이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고비를 탈 없이 잘 넘긴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하느님 가까이에서 백을 쓰시나 봅니다.
 
아직은 풀어야 할 일들이 좀 남았습니다. 아버지께 또 도움을 청합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42절) 사순절 막바지에 접어들어 새 생명을 얻을 준비를 합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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