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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07 조회수496 추천수4 반대(0) 신고

 

 나는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요한7,25-30)

 -유광수 신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그래서 희랍 사람들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하얀 대리석 벽에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금언을 아로새기고 생활의 좌우명으로 여기고 행동의 지표로 삼았다.

자아의 발견, 자아의 확립처럼 중요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다. "전 세계를 알면서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프랑스의 문필가 라 퐁떼느는 말하였다. 역사도 알고 법률도 조예가 깊고 문자에도 일가견이 있고 시사에도 밝으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내 자신의 처지를 알고 형편을 알고 실력을 알고 사명을 알고 분수를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노자는 "남을 아는 것은 智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明이다"라고 말했다. 명은 지보다 높고 어려운 경지다.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기가 어려운가? 이기심으로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자애심으로 자기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남의 일에 총명하면 재판관이 되기는 쉽지만 자기 자신의 일에 슬기로운 판단자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세 가지의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세 개의 자아상을 그릴 수 있다.

 

첫째는 내가 보는 나의 이미지요, 둘째는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요, 세째는 나 본연의 나의 이미지이다. 이 세 개의 자아상 중에서 가장 옳은 것은 세 째번 뿐이다.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어떤 분석과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빗나가는 수가 많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여 교만과 허영심의 노예가 되기 쉽고 어떤 이는 자기자신을 너무 과소 평가하여 비굴해지기 쉽다. 과대평가도 잘못이지만 과소평가도 틀린 것이다. 우리는 정당한 자기 평가를 해야 한다.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는 첫째 것보다는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도 왕왕 오판하는 수가 허다하다.

우리는 가끔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 사람의 이미지와 그 사람의 현실의 행동이 어긋날 때에 참으로 뜻밖이다 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나 본래의 나의 이미지, 나의 본연적 자아상, 이것만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자아를 옳게 확립해야 한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는 나다. 나 아닌 너를 우리는 타아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냐? 나는 정신작용의 통일체다. 우리는 의식하고 감정하고 의욕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정신작용을 통일하는 최고의 주체를 우리는 자아라고 일컫는다.


생각하는 나, 느끼는 나, 욕구하는 나, 행동하는 나, 여러 개의 나가 있다. 그 여러 개의 나를 통일하는 주재자가 곧 자아다. 만일 이러한 주재자나 주체가 없을 대 정신병 환자의 경우처럼 자아의 분열이 생긴다. 분열된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정신 작용의 통일이다. 이 통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적 통일이요, 또 하나는 횡적 통일이다. 종적 통일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작년의 나와 금년의 나 사이에 의식의 통일이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약속을 할 수가 없고,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어제 내가 한 일을 전혀 모른다고 하고, 작년의 나의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은 건전한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자기동일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아의 종적 통일이다.

 

자아는 동시에 횡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감정하는 것과 의욕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일관된 횡적 통일, 내용적 통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智, 情, 意 상호간에 내용적 통일이 없으면 자아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는 나와 행동하는 내가 완전히 다를 때 나는 이중 인격, 이중 자아로 전락한다. 이중인격 이중자아는 는 분열된 병적 자아다.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 사이에 자기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심리학이나 철학에서는 자아관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자아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 자아관이요, 또 하나는 긍정적 자아관이다. 부정적 자아관은 자기가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나를 마이너스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나는 지방 출신이다. 나는 일류학교를 못 나왔다. 나는 머리도 신통치 못하고 재주도 빈약하다. 집안도 볼 것이 없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요 무능력자다. 나같은 거야 사회의 버림받은 존재다. 나는 무슨 일을 하여도 성공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부정적 자아관은 자기를 과소 평가하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어두운 심정이 된다.

 

인생에서 자신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는 생의 의욕을 잃고 전진의 기력을 상실한다. 그는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될 일도 안 된다고 믿는다.

 

 "해가 비치면 먼지도 빛난다."고 괴에테는 말했다. 먼지는 더러운 것이지만 밝은 햇빛을 받으면 빛을 발한다. 희망을 가질 때 우리의 얼굴은 밝아지고 눈에는 광채가 생기고 걸음걸이는 활기를 띠고 태도는 씩씩해진다. "내일 세계에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어떤 사상가는 말했다.

희망을 갖는 자는 설사 내일 이 지상에 파멸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사과나무를 심는다. 그러나 절망하는 자는 슬퍼하고 저주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

 

희망과 절망은 그만큼 다른 것이다. 부정적 자아관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불쌍한 것이 없다. 우리의 가슴 속에 희망의 등불이 있고 우리의 정신에 자신이 있고 우리의 몸에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어려운 역경도 돌파하고 커다란 고난도 극복하고 무서운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우리에게 속삭인다. 힘있게 전진하라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 어디에서 왔고 무슨 사명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뚜렷한 자아관이 성립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살아가셨고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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