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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 예수 후원회 4월 부산 강의/ 정규한 신부님 * * (스코롤 압박주의)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5-15 조회수440 추천수2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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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롤 압박 주의)


제대로 최선을 다해 놓고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래야 합니다.

잘못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자기 식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 하는 것을 해 주면서 상대방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잘못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그냥 해 줍니다.

그건 제대로 된 최선이 아니라 잘못된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일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일치와 잘못된 일치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잘못 일치를 한다는 것은 내식대로 하느님을 이끌고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으니 내 기도를 들어주

시오." 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된 일치는 "나는 이것을

원하지만 당신 뜻대로 하소서." 라는 것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합니다. 합격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그러나

합격이 되건 불합격이 되건 그건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제대로 일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일치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의자에 앉아서 강의를 듣는 것이 편하고 좋지요?

바닥에 앉는 것보다. 그런데 저는 기도를 할려면 의자에 앉는 것보다

바닥에 앉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고 싹 치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해야 일치를 하는 겁니까?

 

여러분과 저 사이에 일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양보를 해요? 누가 누구를 양보를 해요? 양보하는 것이 일치일까요?

속으로 씩씩거리면서 하는 것이 일치일까요?

일치라는 것은 여러분들 안에서 씩씩대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해 내는

것이 일치입니다. 저는 치우자, 여러분들은 놔두자.

여러분들과 저 사이에는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없대는 건 뭐냐하면 여러분들이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일치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치를 할 수 있는 것은 뭐냐하면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둘 다가 욕심을

내려 놓으면 일치를 할 수 있지만 욕심을 부리려고 하면 일치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서로 욕심을 부리게 되면 누가 이길까요?

힘이 있는 사람이 이기고 돈이 있는 사람이 이기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 버티고 있으면 약한 사람이 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일치일까요? 일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요?

둘 다가 승복을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욕심 때문에 일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하느님과 일치를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과 저 사이에도 일치가 안 되는데 하물며 하느님과의 일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일치를 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욕심을 내려 놓아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제가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내가 내려 놓고 싶은데 저 사람이 진짜 좋은 것을 줄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입니다. 진짜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믿으면 여러분, 어때요?

 

의자를 치우시죠? 그런데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생각하나요? 앉는 게

편한데 치우라고 그러니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치를 할 때 전제로 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

라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은 의자를

치우자고 그러면 여러분은 치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을 주실까요? 안 주실까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끝까지 그렇게 좋은 것을 받으세요?

받으시는데 어떨 때는 주실 때도 있고, 안 주실 때도 있고 그렇지요?

그게 왜 그런가요? 바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을 주세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하면 우리가 우산을 만들어 버려요.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살고 있으면서 안 준다고 얘기를 합니다.

 

우산만 걷어내면 되는데 그런데 그것을 걷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걷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내 생각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내 안으로 그대로 들어오는 게 좋은데 그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강의를 하지만 여러분들이 제 강의를 그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생각대로 들으시는 겁니다. 조금만 복잡해지면 여러분

들은 여러분들 식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제가 그렇게 얘기 안했는데.

 

여러분들 100을 1/2로 나눠서 3을 더하면 얼마입니까?

아직도 53이라고 대답을 하시면 어떻게 해요? 그럼 강의를 다시 해야 되죠.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100을 1/2로 나눠서 3을 더하라고 그랬잖아요.

2로 나누라고 그러지 않았잖아요. 저는 1/2로 나누라고 그랬지.

2로 나누면 53이 맞죠. 1/2로 나누면 얼마입니까?

 

이렇게 생각대로 여러분들이 듣고 계시다는 겁니다.

생각대로 대답하시는 거예요. 이런 생각들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복잡해지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식대로 생각해 버립니다.

제가 그렇게 얘기 안했는데.

 

또 하나는 과거의 경험들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솥뚜껑을 보고 있는데 솥뚜껑으로 봐야 되는데 과거에 자라보고 놀란

경험에 의해 솥뚜껑을 자라로 인식합니다. 솥뚜껑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 때문입니다. 이 과거의 경험을 정화시키는 경험을

하지 않는 한 나는 내 식대로 생각하게 되고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도 내 생각대로 보며 안 주셨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 주셨는데. 우리가 이런 생각들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들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산만 없애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애기가 쉽지 않아서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내려 놓는 훈련을 해야 되고 과거의 경험을 정화시키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 이 훈련 없이는 이것들로부터 해방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하며 해야 되는 훈련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 생각을 내려 좋는 잠심이 무엇인가의 개념 정리를 먼저 해야 합니다.

 

잠심의 개념은 "나는 알되 그 앎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기도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잠심입니다.

 

생각도 마찬가지 입니다. 생각이 들어 오는 것을 알되 그 생각이 나한테

영향을 미치지 않토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기도할 때에 분심이

계속들어오지요? 그것들이 들어올 때 그것을 알되 그것들이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예로 착한 사마리아사람을 이야기 해 드립니다.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이 있는데 사제나 레위 사람이 그냥 지나가지

요? 무엇이 지나가도록 만들었습니까? 생각입니다. 그러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그것을 보자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요?

 

이 사람이 바쁜 사람입니까, 아니면 안 바쁜 사람입니까? 바쁜 사람이죠?

바쁘다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알죠! 그게 영향을 줘요, 안 줘요?

안 줍니다.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데 바쁜 건 알지만 그 바쁨이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가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레위나 사제는 바쁘다는 생각에 매이니까 바쁜 생각대로 하는 겁니다.

생각대로. 그런데 이 사람은 바쁜 생각대로 하지 않고 그 생각을 내려 놓는

겁니다. 내려 놓으니까 쓰러져 있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측은한 생각이 들고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무엇인가 해

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면 뭔가 해 줄 수 밖에 

없어서 해 주는데 어떻게 합니까?

 

소독해 주고, 치료해 주고, 싸매 준다고 되어있습니다.

소독을 해 주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옛날에는 술이 필요했습니다.

술로 소독을 해 주는데 술이 비싸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습니까?

못해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술로 소독을 해 주는 순간 술이 비싸다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알지만 그것이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게 잠심입니다.

 

나는 알되 그 앎이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바쁨을 알되 바쁨이 영향을 주지 않고, 비쌈을 알되 비쌈이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 속에서의 잠심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들을 알아내고, 자라보고 놀란 내용을 찾아내고 그것을

정화시킬 때 그것이 정화가 되면 내가 해방되고 솥뚜껑이 솥뚜껑 그대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파란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보면 파랗게 보입니다.

세상이 파랗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내 필터에 의해 가지고 세상을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제거시키는 작업을 해야지 제대로 볼 수 있는데

제거시키기 위한 훈련을 하면, 하느님께서 진짜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우리 안에 생기게 되는 겁니다. 실질적으로.

일치는 이런 믿음이 전제로 합니다.

 

그 다음에 이제 저와 여러분 사이에는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죠?

저는 의자를 치우자하고 여러분은 그냥 놔두자고 하고 분명한 의견이 있습

니다. 어떻게 의견을 알 수 있습니까?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듣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느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상대방의 뜻을 알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일치를 할 때도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되는데 알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치가 되지 못합니다. 뜻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치를 하겠습니까?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럼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하나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알아내고 정화시키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내 생각 내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을 해 가지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착각을 하던지

잘못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알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방법을 해야 합니다.  그럼 알았으면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실행을 해야 합니다. 이 세가지를 전제로 합니다.

알았으면서도 실행을 하지 않으면 일치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를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진짜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 곧 내 욕심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욕심이

없으시죠?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준비가 다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심을 내려 놓으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뜻을 실행하면 일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됐으면 그럼 과연 기도란 무엇인가요?

기도의 목표가 일치라면 기도란 우리가 많은 경우 하느님과의 대화, 만남,

관계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거 이전에 여러분과 제가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방이 있다는 것을 알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 체험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체험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대화를 한다고 해 놓고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독백이 되는 것입니다.

나 먼저 얘기 다 해 놓고 하느님께서 얘기 하려고 하시는데 일어나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대화가 아니라

독백입니다. 독백과 대화는 분명히 구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독백을 하는 것입니다.

 

독백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하느님의 현존 체험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있다는 것이 체험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 얘기를 들으려고 할까요, 나만 얘기하려고 할까요?

 

대화가 된다는 것은 내가 얘기를 하고 상대방의 얘기를 듣고 또 대화하고,

그것이 대화입니다. 그런데 보통 독백을 해 놓고 대화한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뭔가 할 때 제대로 하는 것과 잘못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도를 제대로 알고 하는 것과 잘못 알고 하는 기도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나는 기도가 이런 것이라고 쭉 알고 살아

왔는데 이게 기도가 아니었네! 그러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러니 기도가 뭔지 알고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알고서 해야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잘못된 기도를 하게 되고, 잘못된 사랑을 하게 되고, 잘못된 용서를 하게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을 할 때 어떤 사랑을 하고, 용서를 할 때 어떤 용서를 하겠

다는 것입니까? 용서를 할 때도 제대로 된 용서와 잘못된 용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란 무엇인가요?

여러분들이 용서란 무엇인가라고 생각을 해서 용서를 하신 거잖아요.

용서가 안아주고 이해해주고 그렇게 이해하셨다면

그래서 그렇게 해 주었는데 그 다음 날 그 사람을 딱 봤는데 그 생각이

불뚝 올라와서 "치!" 해버리면 그게 용서가 된 것입니까?

 

용서라는 개념이 그건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었듯이 용서도

그럴 수 있기에 그래서 기본적인 개념 정리를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일치라고 하면서 일치를 하고 있었나요?

결국 일치를, 내가 열심히 하니 당신 들어주십시오. 그것이 일치가 된

것으로 착각을 해서 계속 그거를 관철시키려고 그럽니다. 그건 잘못된

것이고, 그건 일치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부리려는 것이고 내 생각과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입니다.

 

용서란, 그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 가지고 그 사건을 잊어버리거나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그 사람을 대하는데 있어 가지고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그것이 용서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내가 알아요. 알되 그것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그것이

용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됩니까? 난 그렇게 하고 싶죠?

나는 알되 그 사건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만나보면 그게 불쑥불쑥 생각이 나가지고 화가 나거든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용서는 하는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아봐야 될 것이

역활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역활 혼동이라는 건 뭐냐하면 하느님의

역활과 나의 역활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16장 33절에 보면, "주사위는 사람이, 결정은 하느님께서"(공동

번역 참조)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사위를 던지는 건 뭐냐하면,

뭔가를 내가 하는 거고, 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사위를 던지려고 하면서 "이번에는 이게 꼭 나와야 됩니다, 합격이

되야 합니다, 성공을 해야 됩니다!" 라는 결정도 합니다.

 

그리고 그게 안나오면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또는 아니, 내가 뭘 잘못했냐"

하는 식으로 아까처럼 하느님을 부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 역활이란 뭡니까? 주사위를 최선을 다해서 던지면 돼요!

나는 최선을 다해 가지고 기도를 하면 되고, 합격을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봉헌해 드리는 것. 그것이 내 역활입니다.

 

1일 나오건, 2가 나오건, 합격이 나오건, 불합격이 나오건 하느님께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지향을 가지고 계속 대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용서를 해 줄 의향을 가지고, 지향을 가지고 계속 그러다보면 그 사람을

보면 그 사건을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능력이 있다면 "용서 됐어!" 그러면 용서가

되야지요. 그런데 다음날 보면 올라 오는데 용서가 된 겁니까?

우리는 용서해 줄 지향을 가지고 의향을 가지고 계속 기도를 하는

것이 내 역활입니다. 역활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역활 혼동을 함으로써 신앙생활의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역활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부리려고 하는 것이 아담과 하와가 지은 교만 죄입니다.

교만이란,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역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의 반대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역활은 하느님이, 내 역활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하고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것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할 때도 내 역활만 하면 됩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을 용서하려는 의향이나 지향을 가지고

기도하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들을 잘 인식을 하셔야 합니다.

 

기도란 무엇인가?

대화라고 하고 만남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은 있으라고 그러고 나 혼자

계속 얘기를 하면 그게 진정한 의미의 만남이고 대화라고 할 수 있나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정한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 들어가면서 이야기하고 그것이 제대로

된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상대방이 있다

는 것이 체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있다는 것이 체험이

되면 많은 얘기를 하고 그걸 듣고 또 얘기하고 서로 주고 받을 때

진정한 대화, 만남,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현존 체험이 되면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죠?

어떤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겠죠?

누가 하느님 현조 체험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없죠?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하고 싶죠?

그런데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하느님의 현존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방송을 듣기 위해서는

체널을 바꾸죠? 어떤 방송을 듣기 위해서는 주파수를 바꿔 버리죠?

그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뇌파를 바꿔야

된다는 것입니다. 10- 14hz의 요 상태의 뇌파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병원에 가셔서 기계를 꼽고 뇌파를 측정해 보면, 14-21hz 안에

다 들어 옵니다. 거기서 이 사람이 화를 내면 30-50hz 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가만히 놔두죠?

그 사람이 정상적(14-21hz)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죠?

그럼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려면 10-14hz로,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아까 바쁘다고 지나가는 거예요. 바쁘다는 생각을 하니까 지나가는 겁니다.

생각대로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생각대로 보게 되고, 생각대로 문제를

풀게 되고, 이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아까 어떤 방송을 듣거나 보기 위해서는 체널을 바꾸고 주파수를 바꿔야

된다고 그랬죠?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뇌파를

바꿔야 합니다. 10-14hz 되는 요 상태입니다.

요 상태를 뭐라고 그러냐하면 아까 생각을 내려 놓는다는 잠심 상태입니다.

침묵 상태입니다.

 

잠심이나 침묵이라고 말하는 상태가 바로 요 상태(10-14hz)입니다.

여러분들이 피정집 가시면 "잠심하십시오. 침묵하십시오." 얘기를 하지요?

이 상태는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알되 앎이 영향을 주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알되 앎이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소리를 알되 소리가 영향을 주지 않고, 비쌈을 알지만 비쌈이 여향을 주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열왕기를 보면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려고 했죠? 강한 바람 가운데,

지진 가운데, 불 속에서도 어디에서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으셨죠?

그것들이 다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1열왕 19,9 이하 참조)

 

우리는 여린 소리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심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으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저는 한 단어로 얘기합니다. 확신이라는 방법으로.

그분께서 이렇게 예비하셨다는 확신이 우리 안에 꽉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 체험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가 부활 체험을 한다는 것은 확신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내 곁에 계셨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부활 체험은 어떤 것인가 ? 부활체험은 확신으로부터 옵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의 성인식 이야기입니다.

성인식을 치루는데 아버지가 밤에 아들을 데리고 밀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한 복판에 아들을 남겨 두고 아버지는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이는

처음으로 집 밖을 나와서 밤을 새는데 얼마나 무섭고 두렵겠습니까?

무섭고 두렵지만 그 밤을 이겨 내야만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서운 소리도 들리고 춥고 또 시간도 안갑니다. 그렇게 견뎌내고 있는데

어느덧 먼동이 터오자 아들은 무엇인가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체험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지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하고 있어요?

활을 든채  꼼짝하지 않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왜 깜짝 놀랬을까요?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있는 겁니다.

그래서 깜짝 놀랜거예요.

 

깜짝 놀라면서 이 아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여지껏 없다고 생각했는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있었구나.

내가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사실은 있었던 거구나.

그 있었던 그것이 내 안에 새겨지는 겁니다.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 그 자식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생각 속에 아버지가 없다고 그러면 아버지가 없는 거예요?

그 아들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없다고 생각

했다고 진짜로 없었어요? 있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 이제 신이 있다고 믿으세요? 여러분들은 신이 있다고 믿으시는

사람들이죠? 그럼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일까요,

안 믿는 사람들일까요? 여러분들은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

들도 믿는 사람이예요. 뭘 믿어요? 신이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예요.

 

그 사람들은 없다고 믿으며 살아 가시고, 여러분들은 신이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시는 거예요. 다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신이 있는 것을 선택할 것이냐,

신이 없다는 것을 선택할 것이냐? 의 문제를 가지고 그럼 죽었다 치고

생각해 보고 다시 돌아와 그거를 어떻게 생각해서 살꺼냐?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이 있다고 생각해서 살았어요. 그런데 죽어가지고 딱 보니까,

신이 없어요. 손해 났죠? 그런데 신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신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최선을 다해 살았기 때문에 대박 났죠?

반대로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신이 없으면 본전인데, 신이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쪽박나죠? ^*^ 

 

그러니 조금 이익 보다가 쪽박 찰꺼냐? 조금 손해 보고 대박 터뜨릴꺼냐?

파스칼이 이걸 얘기 했던게 그거죠. 여러분들도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갈

이냐? 똑같이 신이 있다고 믿을 것이냐, 신이 없다고 믿을 것이냐?

 

아까 그 아들도 아버지가 없다고 믿었는데 착각이었죠? 자기가 인식을

못했을 뿐이지 아버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아버지는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게 아주 중요한 거예요.

"내가 혼자 있었던 게 아니라 아버지가 함께 있었구나!"

그러니까 이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더라도 그 아이는 어렵고

힘든 일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담대하게 넘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아버지가 함께 있었다는 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걸 해 준거예요. 아버지가 그 성인식에서 아들에게 무얼

해 줬느냐면,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체험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들도 그 새벽에 깜짝 놀라면서 "아, 내가 혼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었구나!" 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그걸 대비해서

활을 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지요.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활을 쏠 준비를 하고 꼼짝 않고 지켜보셨던 아버지와 아들,

누가 더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만 혼자 힘들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아버지가 활을 쏠 준비를 한 상태로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지켜주었다는

것을 체험시켜 주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어디서 많이 듣지 않으셨습니까?

 

예, 마태오복음 마지막 구절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ㄴ)

이제 그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까지

이제 그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게 제자들의 가슴에 새겨지고

나니까 그 다음에 승천하신 겁니다. 그런데 왜 그 기간이 40일일까요?

여러분들이 성경의 숫자들을 아셔야 합니다. 문화권마다 숫자에 대한

상징들이 다 다릅니다.

 

성경의 숫자들입니다. 1은 한 분이신 하느님, 2는 둘로 갈라짐, 구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합쳐질 것임을 의미,

3은 삼위일체 하느님, 천상의 세계를 의미, 4는 사방팔방, 온 세상을

의미하고 지상의 세계의미, 그래서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합쳐지

니까 숫자 7이 나오지요? 그래서 7은 완전한 숫자이고, 그래서 완전한

숫자보다 1이 작은 6은 불완전한 숫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숫자들은 상징적으로만 알아 들어야지 휴거가 온다거나 뭐가 온다거나

그러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할 때 여러분들이 내가 듣고 싶으니까

그리로 가는 겁니다. 믿고 싶은대로 가는 거예요. 내가 어려우니까

그걸 믿고 싶어요. 그러니 믿지 않아야 될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되나요? 잘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현혹되거나 빠지지 않으려면 잠심을 해야 합니다.

잠심을 하지 않으면 내가 어려우니까 그냥 그들의 생각을 믿게 되고

거기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잠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나이가 30세 입니다. 왜 25세는 안 되고

29세는 안되나요? 당시에는 30이 되어야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선생님, 랍비라는 칭호를 30살이 되어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30살이 되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8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고,

40은 시련을 의미하는데 어떤 시련입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나서 광야 안에서 40년을 보내지요? 광야에서 40년.

예수님도 광야에 들어가셔서 40일을 보내십니다.

 

40이라는 것은 시련을 의미하고 광야의 상징은 정화를 의미합니다.

광야를 들어간다는 것은 정화를 위한 것이고, 40이라는 것은 정화를

위해서는 40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메다가 정화가 되서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고,

 

예수님도 광야에 들어가셔서 40일을 지내시고 나오셔서 복음선포 하시러

다시 나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화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신대

똑같이 그것을 따라서 하신 분이세요.

 

그리고 8부 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탄과 부활 때 있습니다.

8은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무슨 새로운

출발을 의미할까요? 성탄 때 새로운 출발과 부활 때 새로운 출발이.

 

필리피서 2장 5절에서 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이셨지만 인간의 본질을

택하셔서 오시지요?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여러분들 개를 좋아하십니까? 그런데 개를 좋아해서 내가 개를 사랑해서

개가 되시고 싶으신 분 있으세요? 여러분이 개를 사랑해서 개가 되는

것과, 창조주가 창조물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힘들까요?

우리가 개가 되는 것은 창조물이 또 다른 창조물이 되는 것 뿐이지요?

그것도 힘든대, 창조주가 창조물이 되는 것은 그보다 더 힘드신 건대

왜 인간이 돼서 오셨을까요?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너무나 사랑하면 어때요?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모양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이 되고 싶어하셨어요.

모든 것 다 버리고 인간이 되셨어요. 본질도 버리고 인간이 되셨어요.

인간이 되고 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생명인데 생명까지도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일치 되기 위해서 귀중한 것을

다 내려 놓고 오셨는데 그분께 더 요구할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하여 일치가 되기 위하여 귀중한 것을

다 내려 놓으셨듯이 우리는 귀중한 것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중한 것을 하느님께 내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귀중한 것은 뭘까요?

 

하나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 시간을 내어 놓아야 하는데

시간은 금이라고 하면서 안 내놓아요. 내 놓아도 어떤 시간을 내어

놓느냐 하면, 짜투리 시간을 내어 드려요. 짜투리 시간을 내어 드리면

짜투리 만남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귀중한 만남은 귀중한 시간을 내어

드려야 귀중한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뭘까요? 생각을 내려 놓는 잠심입니다.

이제부터 8부 축제는 이 귀중한 두 가지를 내려 놓는 연습을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과 일치를 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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