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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음과도 악수를 한 박중령 / 이현철이냐시오 소장님
작성자신희상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05 조회수531 추천수5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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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도 악수를 한 박중령
이현철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장

십자가를 안테나로!
지난 3일 네팔 산악지역에서 추락한 유엔소속 헬기에 탑승한 한국군 박형진(육사38기.50) 중령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현지 한국군 관계자와 한국 대사관측이 밝혀 그의 가족들과 온 국민이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박중령의 부인 신난수(48)씨는 “이달 18일에 그분이 귀국하려고 비행기표까지 끊어놨었는데, 최근 네팔 정국이 불안해 다시 귀국이 미뤄졌다.”면서 “며칠 전 헬기를 타고 정찰을 가기 전에 전화통화를 한 게 마지막이었다.”고 눈시울을 붉혔고 황급히 군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 은성(25·상병)씨는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말이 국가에 대한 책임감”이라면서 “아버지는 그곳에서 평화의 밀알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지난 2005년부터 1년5개월간 그루지야 정전 감시단 감시요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데 이어 지난해 3월 유엔 네팔임무단에 자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이 분쟁지역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죽음과도 악수’를 하며 산화한 박형진중령이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빌고 지금 위험한 분쟁지역에서 죽음을 감수하고 수고하시는 UN소속 장병들의 안전을 빌면서 지난 2005년에 쓴 저의 글 ‘악마와의 악수’와 영화 ‘호텔 르완다’를 소개합니다. 가브리엘통신

<악마와의 악수>

지난 9월 초, 하루에도 여러 편 방영된 교육방송의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 작품 중에서 ‘악마와의 악수’라는 작품은 제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본 아주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것은 아프리카 르완다 내전 당시 UN군 사령관으로 그곳에 근무했던 ‘로미오 달레어’라는 한 카나다출신 장군이 10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간 이른바 ‘르완다 대학살’이후 10년 만에 그곳을 아내와 함께 다시 방문하며 당시 끔찍했던 대학살과 자신의 근무지를 돌아보며 회고하는 형식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르완다의 대학살을 충분히 사전에 막을 수 있었지만 국제사회의 인종차별주의와 무관심, 이기주의 등으로 그 비극을 막지 못한 책임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 그는 당시 UN군 사령관으로서 ‘종족간의 분쟁에 말려들어가지 말라’는 상부명령 때문에 대학살을 막지 못한 죄책감과 또 ‘그곳에서 철수하라’는 상부의 명령에 불복하고 끝까지 남아 불쌍한 르완다인들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겪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갈등 등으로 정신병까지 얻어 지금은 ‘요양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희생자들에게 속죄하는 마음과 서구 열강들의 잘못을 고발하는 마음에서 회고록 ‘악마와의 악수’를 최근에 출간하게 되었고 또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한 기자가 “당신의 회고록 제목이 아주 독특한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내가 그곳 사령관으로서 살인을 일삼는 과격주의자 지도자와 어느 날 그곳 평화를 위해 한번은 악수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차가운 손이 마치 ‘악마의 손’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그 악마의 손과도 악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 내가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그런 용기와 힘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후에 그 악마의 손이 우리 진영에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종차별, 이기심과 무관심이라는 악마일 것이다. 만약 르완다인들이 아프리카 흑인이 아니고 나와 같은 백인이었다면 그렇게 백만 명 이상의 르완다 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고백합니다. (2005년 10월에 쓴 글임)

주: 르완다 내전이란? : 1963년부터 강제추방된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공격하자 르완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르완다 내부의 투치족 수천 명을 죽이고 1만 명을 우간다와 부룬디로 추방하였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1973년 후투족 출신의 국방장관 주베날 하뱌리마나의 쿠데타로 국가개발혁명운동(MRND)이 결성되고 장기집권해온 카이반다가 실각(失脚)하였다. 같은 해에 하뱌리마나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78년 12월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된 이후부터는 민간인과 군 장교로 구성된 국가개발혁명운동이 단일정당이 되어 1당독재로 최고권력을 보유하였다.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집행권을 가지고, 18명의 각료를 지명하여 내각을 구성하는데, 입법권은 MRND가 추천한 후보자 가운데 보통선거를 거쳐 선출한 7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국가개발의회가 가지고, MRND 창립자이며 대통령인 하뱌리마나는 1988년 3선에 이른다. 1991년에는 복수정당제를 도입하였다. 1990년 10월부터 우간다에서 무장한 르완다인(투치족) 난민이 본국으로 들어오면서 내전이 격화되었으나 1993년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아루샤(Arusha) 평화협정체결로 종식되고 과도거국내각을 수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4년 4월 하뱌리마나의 비행기를 대통령친위대가 격추시킨 것이 발단이 되어 내전이 거듭되는 대학살의 참사를 맞았다. 안팎의 개혁압력에 많은 것을 양보한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가진 보수파의 정치적 목적에 인종갈등이 더하여 참사를 초래하였는데, 50∼100만 명에 이르는 투치족과 후투족 융화파 시민이 학살되었다. 내전 이후 1994년 7월에 투치족 반군조직인 르완다애국전선(RPF)이 정권을 획득하였다. 내전 동안에 투치족이 우세해지자 후투족 시민들은 보복이 두려워 필사적으로 탈출하였는데, 이후 난민 130만 명이 1996년부터 귀환하였고 모든 분야에서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2000년 3월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 비지문구가 사임하고 4월에 투치족 출신인 폴 카가메(Paul Kagame)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양 종족간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영화 ‘호텔 르완다’>

수십 년 간에 걸친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갈등은 1990년대 중반 폭력과 인종말살로 이어졌고, 세계는 무관심하게 이를 지켜봤다. 키갈리의 4성 호텔 지배인인 휴투족 ‘폴 루세사바지나’는 품위있고 분별력있게 자신의 일을 수행해가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르완다가 두 인종간의 대치로 분열되자 그는 자신의 사회적 관계를 활용해 1,268명의 투치족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호텔을 안전한 피난처로 제공한다. 이 영화는 전세계가 르완다 사태에 대해 무관심하게 지켜볼 때 모든 것을 걸고 난민들을 구조하는데 적극적으로 행동한 한 착한 사마리아인인 ‘폴 루세사바지나’에 관한 실화를 보여준다.

<말씀에 접지하기>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 25, 40)

(마르코니 문화영성 연구소 :
http://hompy.dreamwiz.com/hl1ye )
 
 

 

라틴어로 ‘분노의 날’이라는 뜻은
레퀴엠(죽은 자를 위한 진혼 미사곡) 가운데
세퀘티아()를 이르는 말입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holyvatican/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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