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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월 16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16 조회수788 추천수11 반대(0) 신고
 

  3월 16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태오 26,14─27,66<또는 27,11-54>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고통은 더 큰 고통을 통해서>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직접 목격한 일입니다. 번잡하지 않은 낮 시간대에는 각종 생필품을 직접 들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되지요. 지병이라도 있는지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한 중년신사가 생필품 세트를 팔기 위해 제 바로 앞에서 멈췄습니다. 제품의 우수성과 저렴한 가격에 대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였는데, 자신감 없어 보이는 얼굴표정을 통해 그날 처음 나온 분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지, 제품을 들고 한 바퀴 돌았지만 아무도 물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급하게 내리던 한 승객에 의해 제품이 가득 담긴 여행용 가방이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물건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가방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그분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흩어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다시 주워 담으셨는데, 유심히 살펴보니 한쪽 팔에 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보기가 딱했기에 제가 다가갔습니다. 함께 물건을 주워 담으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래도 힘내세요!"하고 물건 하나를 샀습니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다음 칸으로 향해 가는 그분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제 마음이 몹시 슬퍼졌습니다.


   때론 이웃들이 견뎌내고 있는 극심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찾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우리가 아직 먹고 살 만하면서 굶어 죽어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위로의 말은 별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면서 말기암환자를 위해 드리는 기도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결국 고통은 더 큰 고통을 통해서, 슬픔은 더 큰 슬픔을 통해서, 좌절은 더 큰 좌절을 통해서만이 극복되고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연의 고통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신비와 의미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갖은 고통의 치유를 위해 더 큰 고통을 몸소 겪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오늘 수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슬픔을 덜어주려고 더 큰 슬픔을 선택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죄와 고통, 십자가와 죽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을 예수님이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먼저 밑바닥 인간의 연약함과 질병과 고통을 직접 짊어지셨고, 고난과 저주의 쓴잔을 기꺼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임종자로서 단말마의 고통, 이국땅에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서러움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받고 죽어가는 자와 나란히 누워, 그의 동료로서 위로와 구원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무게가 너무 무거워 죽을 지경인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조금만 참아. 힘내!"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우리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선택하셔서 직접 지고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오늘 고통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인 죽음의 고통을 잘 참아냄을 통해 영광스럽게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한 예수님의 최후를 묵상하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고통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극복해야 할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나름대로 가치가 있음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성서는 우리가 그토록 부담스러워하고 힘겨워하는 고통 앞에 딱 부러진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한 비법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직접 겪으셨던 그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없애지 않으셨지만 고통을 겪는 우리 옆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십니다. 우리와 나란히 서서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우리 눈에서 눈물을 없애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치워버리려 오신 것이 아니고 고통을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 현존으로 고통을 채우러 오신 것입니다"(클로텔).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10번 / 주를 찬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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