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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펌 - (41) 나도 사막에 가고 싶다.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3-15 조회수437 추천수6 반대(0) 신고
 

2004년1월17일토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ㅡ사무엘상9,1-1.17-19;10,1ㄱ마르코2,13-17ㅡ

 

    (41) 나도 사막에 가고 싶다.

                          이순의

                       

ㅡ내 탓이오ㅡ

때로는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신 은수자들이 너무 너무 부러울 때가 있다. 벗도 인연도 부귀영화도 희로애락도 모두 주님의 대전에 봉헌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부러움을 안고 사는 때가 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기에는 우리네 인생은 걱정 되는 게 너무 많다.

 

그 걱정들이 누구를 위한 걱정이며 왜 떨쳐버릴 수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날도 있다. 과연 주님의 뜻이 나에게 은수자의 길을 요구하신다면 그럴 용기가 있는 것인지 성찰 해 보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며, 그럴 수 없다면 무엇에 내가 얽매여 있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 보기도 한다.

 

지금 마흔다섯 살이 되도록 자식새끼를 찾으러는 가서 보았어도 내가 앉아서 키보드의 사각 알맹이들을 두드려야 되는 pc방에서 메케한 연기에 기침을 해가며 묵상글을 쓰게 될지 상상 해 본적이 없었다. 이런 날 나는 인생이 고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갈 수 있는 사람과 아니면 은수자가 된다는 것이 한 없이 부러운 날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목포행 버스 속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 버스가 동네의 pc방이다. 모두가 내 탓이다. 뒤로 봐도 내 탓이요, 앞으로 봐도 내 탓이다. 모두가 내 큰 탓이다. 은수자도 아닌 주제에 세상살이 조용히 살고 싶어서 많은 것을 차단해 버린 사람이 나다. 그런 나의 주변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은 짝꿍과 자식이다. 짝꿍은 짝이기 때문에 참고 이해하며 산다. 그러나 자식은 피해자라고 하소연 한다. 나는 죄인인 것이다.

 

새로 산 컴퓨터에 여러 가지로 오류를 남기다 보니 아이의 뜻대로 컴퓨터가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컴퓨터를 전공하고 업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형이 있는데 엄마의 의견이나 허락도 없이 초대를 해 버렸다. 내가 내 집에 손님을 받아들인 지가 꾀 오래 되었기 때문에 조카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 된다.

 

메일을 보내서 아직은 사는 형편도 그렇고 내가 몸도 안 좋으니 좀 더 여러 면에서 여유로워지면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방문을 취소 해 버렸다. 그래서 아들과 대판 싸움이 생겼다. 형이 오면 전문가시니까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게 좀 많았을 아이는 자기가 성장하면서 엄마가 해온 잘못들에 대한 원망들로 언어를 도배하고 있었다. 컴퓨터의 괴력 앞에서 말문이 막혀 변명을 하다가 다 못하고 어미가 가출(?)을 했다.

 

거리는 어둠이 깔리고, 세상은 그 속으로 숨었는데 어미의 잘못과 부끄러움들은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오렌지색 가로등에도, 빌딩의 창으로 흘러나오는 네온 불빛에도, 달리는 차량들이 비추고 지나가는 수 없이 많은 라이트에서도 모두모두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갈 데는 없는데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살아 있다는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백화점으로 갔다. 백화점에 가면 춥지도 않고, 직원들이 잠깐의 휴식을 취하며 자판기에서 차를 뽑아 마실 수 있는 후미진 장소를 알고 있다. 그곳에서 마시지 말라는 쓴 커피 한잔을 뽑아서 마셨다. 거리 보다는 따뜻했다. 그리고 나를 받아주는 의자도 있었다. 그 의자가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아들의 마음을 알면서도 난 왜 그런 결론을 실행 해 버렸는지 자아로 돌아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곧 명절이 다가 온다. 나 보다 스무 배도 더 비싼 집에 살고 있는 조카들에게 나는 18년 동안이나 구질구질한 살림과 그것들로 꽉꽉 채워진 좁은 집을 보여 주며 살아간다. 그것이 싫은 게 이유다. 다 큰 조카에게 변변한 용돈 한번 줘 본적이 없는 것도 부담스럽고,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친정어머니조차 발걸음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다른 가족들을 허용한다는 죄책감은 나에게 더 큰 자괴감을 가져오는 것이 사실이다.

 

시어머니는 시댁의 짐을 지고 살아 온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차단을 해 버렸고, 친정어머니는 불우이웃인 시어머니를 차단하면서 불우이웃이 아닌 친정어머니도 받아들이지 말자는 내 양심의 형평성이 용납을 해서 차단을 했고, 더 크게는 막내딸의 척박함으로 마음 고생하실 어머니께 차라리 내 구차함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음이 단절의 원의였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일구고 살아가는 성전으로 나의 가정을 있게 한 원초적 본거지인 두 어머니를 차단한 양심이, 명절이 코앞인 시점에서 조카가 온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내면의 갈등이었던 것이다. 결국 내 내면의 갈등을 자식에게 요구한 것이 되어 버렸다. 나의 짐이 그 아이의 인생은 아닌데 이렇게 복잡한 심성을 안고 사는 어미를 둔 자식의 고통이 가슴을 저며 왔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옵니다.

 

조카에게 휴대전회기로 전화를 했다. 다시 오는 걸로 일정을 허락해 주시라고. 그런데 이미 장성한 조카는 못난 나를 위로 하느라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세월이 나에게는 가슴을 졸이며 흘렀고 조카에게는 가슴을 넓히며 흘러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나의 하늘은 좁혀 놓았고, 조카의 하늘은 넓혀 놓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백화점에서 빠져나와 섬에 있는 나의 집에 가서 한 달만 쉬고 싶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모든 인생사를 놓고 섬에 가서 조용히 한 달만 쉬고 싶었다. 목포행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갔다. 그리고 아들에게 나도 쉬고 싶어서 섬 집에 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목포행 버스 속에 있지 못 하고 나의 작은 둥지 옆 골목의 pc방에 앉아 있다.

 

나도 성 안토니오 아빠스처럼 은수자로 살고 싶다. 무엇을 버리지 못 해서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가? 버린다는 것, 놓아버리는 것은 생각의 여지가 필요 없다. 그냥 나서면 되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의 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면 아무런 생각이나 미련도 없이 사막에 갈 수 있다. 그러나 버리지 않기 때문에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 아들의 밥은 어떻게 하지? 학원은 어떻게 가지? 내일 아침에 혼자 못 일어나서 주일미사 시간을 놓치면 어떻게 하지? 급하게 나오느라고 비상금도 못 놓고 왔는데.......

 

내가 지은 죄보다 훨씬 더 능가하는 힘은 인간적인 계산보다 신성에 가까운 어미로서의 책임이다. 안토니오 아빠스의 소명은 은수자의 길이요. 나의 소명이자 자식을 둔 어미들의 소명은 세상에 남아 죄를 짓고, 죄에 괴로워하며, 더더욱 간절한 통회의 대가로 아버지의 크신 용서와 사랑을 은혜하며 사는 것이다. 자정이 되기 전에 죄 있는 엄마지만 자식에게로 돌아가야겠다. 그곳이 나의 사막인 것이다. 그 사막에서 완덕의 길을 닦아야 하는 은수자는 바로 나다.


묵상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그 쓸 수 있는 시간을 보낼 pc방이 있어서 이렇게 늦은 밤의 모든 것을 감사할 뿐이다.  

 

ㅡ"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2,17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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