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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순종 [마더 데레사]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7-12-25 조회수400 추천수2 반대(0) 신고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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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작은 이''는 결코 복잡하지 않다.

하느님 앞에 겸손, 끊임없는 자기 희생, 순수한 사랑이다.

단순함 그 자체이다.

 

보통사람들은 그 단순함의 길에서 오히려 헤매인다.

''작은 사람'' ''작은 길''의 단순함이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이다.

이중성으로 분리되어 하나의 연결점을 찾으려 함으로써 헤매이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작은 이''는 우리 자신이 작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 내어 주셨기(성체)에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예수님을 모셨다면 모든 것을 가졌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제 안에서 자꾸 커진다면 어찌 주님께서 제 안에 살 수 있겠는가.

자신이 커진다는 말은 곧 머리에 ''하느님이 아닌 것''을 받아 들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닌 것''이란 온갖 피조물(눈에 보이는 것, 혹은 안 보이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성 안에서 모든 피조물과 하나가 되셨다.

그러할진데 어떻게 모든 것들이 ''하느님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들을 '하느님'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성부께서는 피조물들을 부분적으로만 아름답게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전체로 아름다움과 품위로 입혀 주셨다.

하느님 당신의 사랑으로 만드셨기에 완전한 면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영혼은 하느님을 통해서 피조물을 인식하는 것이지

피조물을 통해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즉 어찌 피조물이 나를 얽매여서 내 영혼을 자유롭지 못하게 할 것인가.

피조물이 과연 내게 그럴 힘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기에 따라서 속박되기도 하고 자유롭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닌 것''이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열망하면 그것들은 하느님의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열망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하느님이 아닌 것''들이다.

 

사람의 열망이 이렇듯 하느님의 열망도 하느님 당신을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열망이 있으시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소유가 되어 하느님과 합일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이중성으로 커진다면 ''하느님 아닌 것''에 얽매여 있슴이다.

그럴때,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실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 내어 주시고서도 그분께서는 밖으로 가신다.

 

그리스도께서 내 밖으로 나가시면 우리는 비참한 인간의 활동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안에 머무시며 나와 당신 사이를 거니시며 우리 안에서 사신다면 하느님의 활동이 된다.

그것은 나와 대중과의 관계가 아니다. 나와 대중과의 관계로 본다면 선동가일 뿐이다.

자신 안의 영웅심리로 인해 ''하느님 아닌 것''에 갇혀 있게 된다.

 

단순한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비롯하여 나와 너, 그리고 너,  ,,,, 이렇게 넓혀 지는 것이다.

주님의 하늘나라 (''하느님의 것'')은 이렇듯 작은 겨자씨가 알게 모르게 자라남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예수의 ''작은 이''가 되어야 한다.

 

많은 대중을 바라보는 사람일수록 그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없다.

다수를 명분으로 삼아 한 사람을 버리고 또 한 사람을 버리는 일들이 오히려 많다.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기 때문에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그런 이유가 많은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능력을 잘 아신다.

그래서 작은 일에 소홀히 하지 않도록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는 그 성심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사람 안(능력 한계)에서'' 생명을 주시는 움직이는 진실한 가르침이시다.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위해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다.

주님의 은총을 입은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천대받은 죄인들과 오래된 병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과도 같았다.

착한 목자의 성심은 결코 대중 위의 영웅이 되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대 한 사람이 조금 형편이 낫다면 단지 ''잃어버린 한 사람''만을 보아라.

이는 나도 그렇고,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이다.

99 마리의 양이 어찌 1 마리의 양을 모른채 하면서 오늘도 주님, 주님, 하며 찾을 것인가.

 

1 마리 양이 길을 잃었고 평화와 생명의 위험에 처하였다면

그 1 마리 양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걸고 찾아 가신다.

"가장 보잘것 없는 잃어버린 양 하나" 에게 예수님이 계신다.

'십자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숨 걸고 그 양을 지키며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당신이 나타날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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