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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 16일 야곱의 우물- 마태 11, 2-11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12-16 조회수467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놓으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 11,2­-11)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11,7-­9) 만약 바오로 사도가 아시아 쪽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면, 달마가 동쪽으로 가지 않고,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건너가지 않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세례자 요한을 보러 광야로 나갔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보러 왔는데, 그들이 예수께로 온 이유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이 우리 개인의 역사를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시려고 오실 분’(마태 3,12)을 예고하면서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요한 5,35)이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밝게 드러나지만 활활 타는 불길도 산소의 공급을 받지 않으면 꺼져버리고 맙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헤로데한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바른말을 한 이유로 지금 어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고독한 광야에서 단련된 그였지만 그래도 육신이 자유로운 광야가 감옥보다 나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묶인 육신을 통해 영혼의 더 높은 비상을 도전받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들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냅니다. 자신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몸, 그분이 왜 아직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지 않는지 조급하기도 하고, 진짜 이분이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도 듭니다. 하여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1,3)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맞다’, ‘아니다’로 답하시지 않고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11,4ㄴ)고 하십니다. 오실 분이 맞기는 하지만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지 않기 위해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는 일은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요한은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통해 다른 분을 기다릴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을지 판단해야 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자신들의 판단은 유보한 채 보고 들은 그대로를 전해야 할 의무를 집니다. 가나안을 정찰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사실 그대로 보도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크고 강하기 때문에 메뚜기 같은 자신들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자신들의 판단을 곁들였기에 백성이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민수 13장 참조).
 
반면 요한복음 9장의 태생소경은 바리사이들로부터 예수님을 죄인으로 인정하라는 종용을 받습니다만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요한 9,25)라고, 비록 회당에서 쫓겨날지라도 겪은 대로 당당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며 남의 말이 아니라 그들이 보고 들은 예수님을 말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빌라도는 재판정에서 예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요한 18,34) 하고 되물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듣고 본 것을 토대로 예수님이 무죄라고 판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자 “와서 보아라.” 하셨습니다(요한 1,38-­39 참조). 그 다음날 안드레아는 형 베드로에게,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일차적이고, 사실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이차적인 일이며, 판단은 이를 토대로 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잘 듣고 예수님께 ‘의심을 품지 않는 이’의 행복을 누려야 할 입지에 있습니다. 자신의 기대를 내려놓고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제대로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게’ 하시는 메시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갈대가 상했다 하여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꺼버리지 않는,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어 한 해만 더 기다려 보자고 하는 약한 예수님을. 하룻밤 사이에 대사제-최고의회-빌라도-헤로데-다시 빌라도에게 끌려 다니시며 온갖 조롱과 모욕과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무능한 예수를 그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이 왜 약속대로 니네베를 멸하지 않는지, 처음부터 그러실 줄 알았다며 투덜거렸습니다. 그러나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하신 마음 약한 하느님을 요나가 받아들여야 하듯,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의 다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능한 자가 되어 묵묵히 순교의 관을 받으라고 초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일컬어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 오기로 한 엘리야,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그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극찬하셨습니다만 그를 위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사람은 이미 믿음을 완성한 자들입니다. 그도 믿음을 완성하여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이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후에 세례자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마태 14,13). 신랑 친구의 죽음은 신랑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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