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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난세(亂世)를 살아가는 방법 -희망, 사랑, 믿음- 2013.11.17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17 조회수428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3.11.17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말라키3,19-20ㄴ 2테살3,7-12 루카2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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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亂世)를 살아가는 방법 -희망, 사랑,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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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입니다.

말세입니다.

흔히 오늘의 세상 현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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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 말뜻을 찾아봤습니다.

난세(亂世;정치가 문란하고 질서가 흐트러져 전쟁 따위가 그치지 않는 어지러운 세상)이었고 이 말 풀이대로 라면 난세임이 분명합니다.

말세(末世;정치나 도의 따위가 어지러워지고 쇠퇴하여 가는 세상)이었고

이 말 풀이대로 라면 말세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들여다보면 난세 아닌 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난세요 말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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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89년도 사제서품을 받은 후 24년간 썼던 강론 내용을 봐도

비관적인 현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데 당시는 정말 힘든 난세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말세야, 말세야’를 되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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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33주일에 연중 마지막 전 주일로

계절 역시 으스스한 종말의 분위기인 11월 위령성월입니다.

오늘 말씀 역시 모두 난세의 종말 분위기를 반영하며 종말의 난세분위기에서 태어난

묵시문학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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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키 예언서는 기원전 480-460년경에,

2테살로니카서는 기원후 52년경에,

루카복음은 80-90년경에 모두가 고난이 극심했던 난세에

실의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 용기를 주기위해 쓰여 진 성경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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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진보합니다.

오늘날 정치현실을 보면 분명 반복되는 역사지만

뚜렷한 진보의 흔적은 사형과 고문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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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보십시오.

정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과 고문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지금이 난세라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어 일제시대, 6.25동란 등

지금까지 우리의 근, 현대사도 끊임없는 재난, 재해, 재앙 등

난세와 말세로 점철된 역사였습니다.

태평성대로 여길 수 있는 이상적 현실은 잠시뿐이었고 대부분의 난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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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의 절망의 현실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절망의 난세를 살아내어 오늘과 같은 기적의 현실을 만든

우리 민족의 저력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분명 오늘날의 현실 역시 난세는 난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그 묵상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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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희망입니다.

희망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첫 번째 처방입니다.

난세에 하느님이 주셨던 묵시문학의 주제도 희망이었습니다.

희망이 있어야 극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인간성 황폐로 악마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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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잃으면 모두를 잃습니다.

삶에는 언제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법입니다.

희망의 사람들은 빛과 어둠을 함께 보며 균형을 잡습니다.

빛의 긍정으로만, 또는 어둠의 부정으로만 향하는 양 극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희망의 빛 안에서 빛과 어둠의 현실을 다 아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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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심판의 때임과 동시에 구원의 때입니다.

구원의 희망이 난세의 절망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오늘 말라키 예언서는 이런 어둠과 빛의 대조가 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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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니

다가오는 그날이 그들을 불살라 버리리라.

그날은 그들에게 뿌리도 가지도 남겨두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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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 대한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어둠의 심판이요,

이런 종말의 충격적 표현들이 바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했던 이들에게 종말은 구원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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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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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게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어둠을 뚫고 동터오는 아침 태양처럼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난세의 어둠을 뚫고 떠오르는

희망의 태양, 하느님입니다.

이런 희망의 태양이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난세를 이기는 사람들은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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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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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째 처방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삶에의 충실성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주어진 현실을 사랑하며 자존감 높은 삶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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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정주의 제자리에 항구히 충실합니다.

난세라 하여 종말이 왔다하여 쉽게 휘말리지 않습니다.

그 누구의 감언이설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복음 말씀처럼

누가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해도

현혹되어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습니다.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현자처럼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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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 모범입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의 삶입니다.

무질서보다 해로운 것은 없습니다.

사랑에서 질서와 균형의 충실한 삶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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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바오로 사도의 이웃을 배려하는 사랑이 환히 들어납니다.

바로 이게 지금 여기, 난세를 살아가는 구체적 사랑의 삶입니다.

이런 삶보다 더 좋은 사랑의 본보기도 없습니다.

어느 교육자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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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좋은 삶의 본’이다.

나는 내 자식에게 좋은 삶의 본을 보여주지 못함을 두려워할 뿐,

자식교육에 무심한 것을 자책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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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희망도,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좋은 삶의 본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이런 사랑의 좋은 삶의 본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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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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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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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세 번째 처방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큰 지진과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겨도,

하늘에서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주신 믿음의 위력입니다.

박해 중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언변과 지혜로 주님을 당당히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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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난세에 처한 이들에게 믿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증언합니다.

마지막 주님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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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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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짓는 믿음의 사람들은

난세의 온갖 시련과 고난 중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에 인생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안팎으로 무너지고 망가지겠지만

주님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지은 지혜로운 믿음의 사람들은 요지부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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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주님 말씀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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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로서 생명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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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보다 ‘참고 견딤으로’ 표현함이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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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8.15절에서 역시 '인내로서 열매를 맺어라.' 말하지만

'인내' 역시 ‘참고 견뎌’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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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견디다.’는 영어는 ‘펄써비어런스(perseverance)’입니다.

그냥 소극적 인내가 아니라

끝까지 버텨내는 불굴의 노력을 뜻하는 적극적 인내를 뜻합니다.

백절불굴의 믿음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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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를 연상하면 됩니다.

아무리 짓밟혀도 곧장 다시 일어서는 잡초 같은 믿음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참고 견디는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우리들입니다.

항구히 참고 견디는 믿음의 열매가 구원의 생명입니다.

결코 값싼 생명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백절불굴의 참고 견뎌내는 하느님 주시는 믿음이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 세 번째 처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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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난세입니다.

며칠 전 강남 쪽에서 피정 온 열 분 정도의 면담 식 고해성사를 주면서도

새삼 깨달은 점입니다.

외적으로는 부족할 것 없는 것 같은 데 내적으로는 위태해 보였습니다.

대부분 삶이 두렵고 불안하다 했습니다.

보속의 처방 말씀도 저절로 다음 말씀으로 귀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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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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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수도원 십자로 예수 부활 상 돌 판에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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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연중 제33주일에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두렵고 불안한 난세를 살아갈 수 있는 세 가지 처방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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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사랑과 믿음의 향주삼덕입니다.

하느님 희망에서 샘솟는 사랑이요,

하느님 희망에서 참고 견뎌낼 수 있는 믿음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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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풍성한 희망과 사랑과 믿음을 선사하시어

난세 중에도 아름다운 품격(品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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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

(시편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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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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