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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 2일 야곱의 우물- 마태 24, 37-44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12-02 조회수532 추천수8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24,37-­44)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교회 전례력은 오늘부터 새해를 시작하며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그날은 개인적으로는 내 생의 마지막 날이요, 인류 공동체적으로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사형수들은 자신이 죽을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날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침마다 교도관의 발소리가 어느 방 앞에서 멈추는지 숨죽이는 그 마음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것이 그들만큼 절실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과연 마지막 날을 아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에 대해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ㄱ)고 하시며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모른다는 말씀을 짧은 문장에서 세 번이나 언급하십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24,38-­39ㄱ)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어도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경고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는 여전히 위기 불감증 환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사’는 중요한 일입니다. ‘장애가 있기 전에는 일상의 평범함이 이렇게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어느 장애인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 사람들은 그 이유 때문에 주님의 잔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루카 14,15-­21 참조)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지만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남전선사는 ‘도란 평상심이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일상을 살지만 각기 다른 차원에서 할 수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어제 일을 후회하고 길을 가면서 미래를 걱정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밥을 먹을 땐 밥만 먹고 잠잘 땐 잠만 자는, 현재를 충만히 사는 사람입니다. 현재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다운 특성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24,42ㄱ) 어떻게 해야 깨어 있는 것입니까? 스물네 시간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고, 귀를 가지고 있다고 다 듣는 것도 아닙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요한 9,41ㄴ),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0,6ㄴ) 곧 눈 뜬 장님도 있고 귀를 가지고도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양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고문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상처 속에 신음해야 할 것 같은 그가, 이 세상살이가 소풍이었고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14) 깨어 있지 않는 것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열려 있는 사람은 쉽게 깨닫고, 깨달은 사람은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어둔 밤의 절망과 타는 갈망과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을 산행 길에서 절로 영글어 떨어진 밤 한 톨 줍다/만지작거리다 꽉 깨무는 순간 밤벌레 한 마리/고개를 쏙 내민다/나도 깜짝 놀랐지만/그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다/나는 하마터면 그 녀석의 징그러운 몸뚱이를/깨물 뻔했다는 사실에 놀랐고/그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세상 전체가/갑자기 두 쪽이 나고 생명까지 두 동강 날 뻔한/일생 일대의 엄청난 사태에 놀랐다/아, 누가 있어 어두운 밤 속에 있는 나의 이 집도/흔들어 깨물어 줄 것인가?/그 앞에 나도 이 추한 몸뚱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박살나면서 나타난/시리도록 푸른 하늘/그 하늘을 보면서 밤벌레는 죽었다/나도 그처럼 죽고 싶다/단 한번만 그 하늘을 볼 수 있다면/굳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지 않아도/그냥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이대근, <가을 산행 길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푸르고 시린 하늘을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굳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지 않아도 그냥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그 깨어나고 싶은 절박함이 눈물겹도록 절절히 다가왔습니다. 저자가 밤벌레의 세계를 박살냈듯이, 주님이 바오로 사도의 세계를 박살냈듯이 나의 어둡고 단단한 세계도 깨물어 흔들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한동안 ‘나도 그처럼 죽고 싶다’란 구절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문화와 상업 중심의 대도시 타르수스 출신, 벤야민 지파, 로마 시민권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율사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촉망받던, 누구보다도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며 하느님을 섬겼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기 위한 임무를 띠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지금까지 지녀온 가치관 전체가 두 쪽이 나는 체험을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그는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사흘 동안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박살난 충격과, 새롭게 열린 푸르고 시린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은 이로 인해 대전환을 맞고 새롭게 태어나 깨달은 자로서의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필리 1,20)
 
아, 주님께서 어둔 밤 속에 있는 나의 이 집도 흔들어 깨물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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