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17 조회수427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오 19:20-22)
 
 이 젊은이는 아주 도덕적인 청년이어서 바르게 살면서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즉 그는 모든 계명을 충실히 지켜왔다. 그러나 자기 만족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이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하고 예수님께 여쭙자 예수님께서는 다른 계명은 주시지 않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라든지 어떤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불분명한 말씀만 하신 것이다.
 
법과 규칙은 투명성(透明性)을 말하고 있다. 우리들이 법과 규칙에 따라야 하느냐를 고민할 때 투명성은 자신감을 갖게 하므로 아주 유용하다. 우리 모두 투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혼란스러운 삶을 살며 투명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도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잘 안다. 사도 바오로는 모세의 법에 대하여 “모세의 법을 지킨다고 의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만들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헛되이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했다.(갈라티아 2:16,21)
 
법은 삶의 안내자 역할을 하지만 삶 그 자체는 아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바로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마치 바둑의 기도(碁道)를 따르지 않으면 바둑을 둘 수 없듯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면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은 의롭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려고 드는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아주 알기 어려운 말이지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티아 2:19)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話頭)와 같다.
바오로 사도는 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필리피 3:6) 그랬기 때문에 힘이 있었으며 명성을 누렸으며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지도자가 되었고 광신도(狂信徒)가 되었으며 확고부동한 주체성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법으로부터 해방되게 된 것이다.율법에만 매달려 살다보니 새로운 생명을 얻을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실토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 젊은이와는 달리 ‘부(富)’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불투명한 미래를 걸었다.
만약 바오로 사도가 율법에만 집착했다면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삶의 목적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태오 5:18, 루카 16:17참조)
인간의 타락상을 보시고 절대로 율법을 폐지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셨던 것이다.
 
법은 ‘테두리 밖에서’는 완성되지 않고 ‘삶 안에서’ 완성된다.
한 선사(禪師)가 “깨달은 사람은 인과(因果)의 법칙을 따르게 됩니까 아니면 자유롭습니까?”하는 제자의 질문에 “좋을 대로 생각해라.
그러나 인과법칙은 진리와 하나이며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의 존재 이유를 모르면 진리를 알 수 없게 된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하고 고백했던 것이다.(갈라티아 2:20)
 
기대를 잔뜩 걸고 있던 사람이나 일이 실망으로 끝날 때가 많다.
그래서 기대는 실망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워낙 실망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믿었던 친구가 배반을 하고 그토록 기대했던 자식이 무관심하고 철석 같이 믿었던 형제 자매가 배신을 하고…..
왜 그럴까?
원인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모두들 의롭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의롭게 산다는 것은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외에는 의로운 사람이 없다”고 하신 것은
인간은 의롭게 되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자식이나 가까운 친구나 형제자매에게 기대할 것을 기대해야지 번지 수가 틀렸다. 세상사(世上事)는 갖가지다.
모든 일에 의로울 수는 없지만 어떤 몇 가지 일에만은 의로울 수 있다.
그래서 선조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십계명이나 삼강오륜만은 반드시 지키라고 말한 것이다.자신이 의롭지 못하면서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가장 먼저 삼강을 지키고 그 다음으로 오륜을 지키라는 뜻이다. 이를 나름대로 다시 해석해 본다.
三 綱 (삼강)
父爲子綱(부위자강)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고
君爲臣綱(군위신강)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고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기본이고
夫爲婦綱(부위부강)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五倫(오륜)
君臣有義(군신유의) 임금과 신하는 의리가 있어야 하고
                  (하느님과 사람은 의로워야 하고)
父子有親(부자유친)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이 있어야 하며
夫婦有別(부부유별)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하며
長幼有序(장유유서) 어른과 어린이는 차례가 있어야 하고
朋友有信(붕우유신) 벗과 벗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