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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4주일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13 조회수428 추천수4 반대(0) 신고

    사순 제4주일 루카 15,1-3.11ㄴ-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복음생각.1] :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시작 기도

    주님,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회개하기를 포기하지는 말게 하소서.

    저희 죄가 간악하고 교활하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크시기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 탕자를 생각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나이다.

    주님,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노랫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주 흥얼대던 '탕자처럼'이란 제목의 복음성가 가락이 떠올랐습니다.

    "탕자처럼 방황할 때도 애타게 기다리는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내 맘을 녹이셨네. 오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 주소서 이제는 주님만 위하여 이 몸을 바치리다."

    당신께로 발길을 돌릴 때마다 단 한 번도 내치지 않으셨던 그분은 진정 자비의주님이셨습니다. 당신께 하소연할 때마다 조용히 제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던 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주시던 그분은 진정 연민의 주님이셨습니다. 제가 아무리 못할 짓을 했어도 기다려주셨던 주님, 제가 아무리 거스르는 짓을 했어도 눈감아 주셨던 그분은 진정 인내의 주님이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주님을 두고 너무도 자주 한눈을 팔고, 딴 길을 갔었던 지난날들을 다시 한 번 뉘우칩니다. "오주님, 나 이제 갑니다. 날 받아 주소서" 하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작은아들이 보였던 행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서는 안 될 행동, 어처구니없는 행동, 한마디로 막가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회에서도 '유산'이란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 고려하는 것이 기본 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작은 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몫의 유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나갑니다. 이 말은 이제 '당신은 당신, 나는 나'란 말과도 같습니다. 결국 남남이 되었다는 말, 부자간 인연을 끊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작은 아들이 떠나간 후 남은 아버지가 느꼈던 심정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참담함'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짐'이었겠지요.

    완전히 '맛이 간' 작은 아들이었기에 챙겨 온 거금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수중에 땡 전 한 푼 남지 않게 되었을 때야 작은 아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자각합니다. 타향에서 알거지가 된 작은 아들은 너무도 배가 고픈 나머지 돼지들이나 먹는 '짬 밥'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부끄럼을 무릅쓰고 아버지께로 발길을 돌립니다.

    회개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매우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정말 정도(正道)를 걸어야겠다는 굳은 결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우리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진정 수치스럽고 면목 없는 일이겠지만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겠다고 결심하는 일이야말로 회개의 가장 본질적 요소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돌리는 일이 아니라 태초부터 주의 깊게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그분을 향해 우리 얼굴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로운 눈길에 우리 시선을 맞추는 일입니다. 세상으로 향했던 우리 얼굴, 악에 기울었던 우리 마음을 다시 한 번 아버지 쪽으로 돌리는 일이 바로 회개의 핵심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했던 일차 목표는 다분히 표면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 그대로 있다가는 굶어 죽는 것은 시간문제이겠구나.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좀 많았던가? 빨리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종으로라도 지내면서 우선 이 지긋지긋한 배고픔에서 벗어나자"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이때까지 작은 아들은 회개의 순간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언제 작은 아들의 회개가 시작되었습니까?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제나 저 제나 작은 아들이 돌아올까 목을 쭉 빼고 기다리다가 멀리서 작은 아들이 힘 없이 돌아오는 모습을 확인한 아버지가 맨발로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둘째 아들은 회개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참된 회개는 우리가 정확한 하느님 모습, 자비 충만한 하느님 아버지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됩니다.

    결국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 선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회개를 시작합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에,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 가득한 눈길에 우리 시선을 고정시키는 은혜로운 나날 되길 바랍니다.

    .......................

    † [복음생각.1]

    머리와 이론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체험으로도 하느님을 알 수 있고, 깜깜한 어둠 가운데서 믿음으로도 하느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에 따라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부류에 속한다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남까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짓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들은 지식과 이론에 눈이 가려 현실 속의 생각한 하느님·예수님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들 눈에 비친 예수는 율법도 하느님도 모르는 사람, 따라서 하느님은 도저히 예수란 인물 편이 되면 안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어울리는 죄인의 무리에게 하느님 은 더더욱 그들 편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자기들과 같은 의인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하느님은 누구 편이어야 합니까?

    1860년대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반대하던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노예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던 남부 11개 주가 연합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 초반기 북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북부의 여론도 달라졌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링컨은 하느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마침내 북군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메릴랜드를 방문했을 때 한 참모가 “대통령 각하! 이제부터 아무 염려 마십시오. 하느님은 우리 북군 편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내 염려는 내가 하느님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일세.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서 있기만 하면 하느님은 우리 편이 되어주신 다네. 하느님께서는 성경의 다윗을 통해서 내게 그 사실을 깨우쳐 주셨네.” 링컨보다 성경을 더 잘 알았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편인지를 생각하기보다 하느님이 언제나 자신들의 편이 되고 못 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편에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게도 예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며 그들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회개를 해야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고 나서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예수님 주변으로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루카 15,1) 있었습니다.

    우리한테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씨가 내 마음 밭에 떨어져 싹이 납니다.싹은 실천을 통해 점점 자라 나를 링컨처럼 큰 나무가 되게 합니다. 이제 온갖 새들이 ‘나’라는 나무에 깃들이게 되는 영향력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오늘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반복해 말씀하십니다. 남성을 위해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여성을 위해서는 은전의 비유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부모를 위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어머니이십니다.

    비유에서 양을 잃은 사람이나 은전을 잃은 사람이나 아버지나 모두 ‘찾을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어이 찾고야 맙니다.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태초의 아담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잃은 양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는 저 곰곰이 계산해 봐야 한다고 하셨지만(루카 14,28) 당신이 우리를 찾는 데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될지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계속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포도밭 소작인들에게“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루카 20,13) 하며 사랑하는 아들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는 하느님은 아들의 죽음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그 대가는 하나를 위해서도 치르신다는 것입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이, 아홉 개 은전이, 큰 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들이 섭섭해 할 만큼 잃은 하나에 집착합니다. “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생각납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유다인들 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갈 때 쉰들러는 유다인들 을 살리기 위해 자기 공장에서 일할 유다인들 의 명단을 밤새 작성하고 그 대신 전 재산을 투자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자신도 전범자이기에 떠나려 할 때 그 덕분에 살아남은 유다인 들이 그를 전송하며 금니를 뽑아 만든 반지를 감사의 선물로 줍니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의 말씀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순간 쉰들러는 철로에 주저앉아 통곡합니다. 그동안 낭비한 재산과 끼고 있는 반지를 팔아 단 한 명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하느님께서 타락한 소돔을 멸하시려 할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라도 그 도시를 구하고 싶어 조심조심 하느님께 청을 드렸습니다. 오죽하면 하느님도 소돔을 멸하지 않을 구실만 찾으셨겠습니까?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되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4,10-­11)라고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와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내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속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잃은 한 마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처사가 왠지 섭섭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잃은 한 마리의 양이었음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보다 더한 통회의 눈물을 흘릴 것임을 압니다. 그리고 그날을 기대합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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