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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직 사랑을 실천할 뿐이다(맑무자.....).
작성자임성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6-02-17 조회수796 추천수0 반대(0) 신고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글자 그대로 복된 말씀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 이세상을 구원하러 온 구원자임을 믿는것,

 

베드로 성인의 고백대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것,

 

그리고 복음을 전한다는것은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

 

이것이 전부일까?

 

아닌것 같다.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사실은 이미 전 지구상에 거의 다 퍼져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정도로 알려 졌으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다운 곳으로 바꿔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지구상의 뉴스는 매일 매일 전쟁과 방화와 죽음의 아비규환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해서든 너를 죽여야만 내가 산다는 집단 살생 무의식,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식 속에 사는 것 같으니 군중 살생 무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같다.

 

일전에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온 분이 진정한 의미의 관용은 적의 이미지가 친구의 이미지로 바뀌는 것이라고 하였다.

 

르완다라는 곳은 인구 약 1,000만명 중에서 95%가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곳이었는데, 후투족과 투치족의 싸움으로 약 100만명의 국민이 서로 죽인 인종학살이 일어난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약 10년전에 성모님이 3명의 자매들에게 발현하시어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참상을 미리 보여 주었으며, 미리 이사실을 바라 본 자매들의 경악해 하는 표정과 맨발로 굉장히 빠른 속도로 뒤로 보지 않고 뒷걸음치는 모습, 경악해 하는 3자매의 바로 눈앞에서 라이터 불을 켜도 무엇을 보고 놀랐는지 전혀 눈도 깜짝하지 않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이 MBC를 통해서 방영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머니 성모님께서 어린 자식들이 그렇게 참혹하게 죽는 것을 어찌 볼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타나셔서 그 위험을 막으려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  

 

 

이후 아프리카를 갈 일이 있어서 나라를 선정하는데 굳이 르완다를 넣었다.

 

성모님의 발현 필름을 본 기억 때문이었다.

 

2001년인가로 생각된다. 르완다 현장을 가 보았는데, 여전히 약 40만명의 시신을 아직 땅에 묻지 못해서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수 없이 많이 죽은 사람들 대부분이 아무런 죄가 없는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이 대부분이며 그 순박한 사람들의 옷가지와 유골을 모아 둔 유리 전시관을 보고 경악해 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들은 사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전쟁의 희생자라는 말로 얘기할 수도 있지만,신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바로 서로 형제 자매들인 것이다. 바로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들로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서로를 죽인 비극적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많은 문제의 원인이 있겠지만, 결국 근본 뿌리는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였다.

 

이 다름이, 바로 다르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적이 되어버리고, 그래서 너는 죽어야 된다라고하는 적의로 발전하고 살생하게 되고 확대되어 인종학살을 하게  된 것이다. 같은 종교를 가진 형제 자매들이...

 

이제 다름은 서로 인정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

 

이제 다름은 서로 존중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

 

이제 다름은 서로 협동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

 

 

다름에 대한 상호 인정, 상호 존중, 상호 협동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 나라도 특히 더 그렇다.

 

동서간 지역이 다르니 적이고, 남북간 이데올로기가 다르니 적이고,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니 적이고, 지지하는 지도자가 다르니 적이고, 소속된 정당이 다르니 적이고,

나와 생각이 다르니 적이고, 나와 종교가 다르니 적이고, 나와 피부 색깔이 다르니 적이고, 나와 국적이 다르니 적이고...

 

사실은 적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임에도...

 

나 중심으로보년 다 적이지만, 모두를 존중하는 관점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있을 뿐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다양하게 피조물을 창조하신 것일

 

뿐인 것이다. 모든 창조물의 특성을 잘 살려서 잘 양육하실 뿐 인 것이다.

 

56년전에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은 그 때보다 많이 나아졌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있지 않은가

되묻고 싶다.

 

하느님은 적과 동지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오직 당신의 사랑의 표현으로 우주적 생명체를 창조하신 것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사실, 하느님 창조주를 통하여 볼때 우리 모두는 같은 아버지를 둔 한 가족인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모습이지만 하느님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신비체로서...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적과 동지를 구분하고 오늘도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오늘날의 복음은 적을 동지로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을 벗으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2%의 노력은 다름아닌 적의를 우정으로 바꾸는 관용의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다름을 존중하며, 서로 다름을 수용하는 관용의 실천이

 

오늘같이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복음이 되어

 

야 할 것이다.

 

 

서로 하나가 된다는 것,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는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으로 가능할 것이다.

 

문명 충돌도 관용의 정신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용은 오늘날 2%의 복음이다.

 

우리가 적의로 가득찬 세상을 우정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만드는 단초가 되는

 

2%라 하겠다.

 

 

결국은 원수도 사랑하는 2%의 사랑이 부족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운 사람들도 포용하는 관용의 정신, 바로 하느님의 자비가 밑에 깔려있는

 

관용의 정신, 모든 생명이 한 아버지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공동체 정신,

 

너와 내가 다름이 아닌 하나라는  참된 지혜의 정신이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결국 2% 관용의 정신도 원수 사랑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적의 이미지가 친구의 이미지로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만인이 다 친구라는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은 우리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로 가능하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이다.

 

 

나와 다른 존재와. 나와 다른 적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하는 관용은

 

인간의 힘으로는 부족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로 가능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한 일인 것이다. 어려운 과정이다.

 

과거와 용서도 해야하고, 서로 속에 있는 것을 토해 놓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작년에 DMZ에 왔던 동티모르 구스마오 대통령의 진실 화해 위원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

 

 

그리고 진정으로 부등켜 안고 눈믈을 흘리며 서로 용서하고 우리는 같은 피를

 

가진 한 가족임을 토로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관용의 길은 힘들다.

 

그러나 이길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한 가족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과 인종학살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하느님의 자비가 밑바탕이 된 관용의 정신만이 우리와 이웃을

 

구하지 않겠는가?

 

오늘 하루를 살더라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자비만이 우리를 치유케 해 주시고 이웃도 치유케 해 주신다.

 

원수 사랑은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적의를 우정으로 바꾸는 것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느님의 자비로 가능한 것이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 성심과 티없이 깨끗한 성모 마리아 성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 마음이 무소유로 바뀔 때, 하느님의 자비로 가득찰 때

 

적의를 우정으로 바꾸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배가 서로 부딪혀도 빈 배 일 때에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 마음이 무소유일때, 욕심이 없는 빈 마음일 때 누가 와서 부딪혀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지 않은가? 빈배처럼...

 

무소유의 마음일 때 오리를 가자고 하더라도 십리를 가주지 않는가?

 

아니 백리도 가줄 수 있는 것이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것이다. 아무런 저항이 없다.

 

아무런 반대가 없다. 노가 없는 것이다. 오직 예스일 뿐이다.

 

오직 사랑의 실천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비울 때, 진정 자유롭고 온 우주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 넓어진 마음으로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물처럼 모든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적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비었을 때는, 욕심이 없을 때는 모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무소유, 빈배, 비폭력, 물, 자유, 수용, 용서, 화해, 친구, 관용, 원수 사랑,

 

오리, 십리,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의 사랑, 오늘날 2%의 복음... 

 

이런 말은 서로 관통하는 말이라 하겠다. 서로 통하는 말이라 하겠다.

 

 

다른 사람이 오리를 가길 원하면 십리를 가주는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다.

 

오직 우리 마음이 빈배가 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마음이 무소유로 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무소유는 하느님의 영역이다.

 

우리는 오직 맑은 마음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할 뿐이다.

 

 

우리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 영원한 천상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맑은 마음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오직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주는 마음으로 바뀔 때 맑은 마음의 역사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에수님 복음 전파의 결정체가 바로 성체 성사가 아니겠는가?

 

당신의 생명을 내놓는 그 나눔으로 우리 마음도 맑아지고 평화를 얻지 않는가?

 

 

아짐으로 우리의 마음이 소유가 되고, 유를 얻게되고, 리를 가주고,

 

웃을 존중하고, 이웃이 원하는대로 해주고, 적의 대신 정으로 대하고,

 

다같이 넓어지고, 온 우주를 용하고, 모든 만물을 용하고, 랑을 실천하고.....(맑무자...)

 

 

오직 우리가 할일은 사랑을 실천할 뿐이다.

 

어떤 대상이라 하더라도...

 

어떤 만남이라 하더라도...

 

 

오직 사랑을 실천할 뿐이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행복과 기쁨을 누릴 뿐이다.

 

나와 남 모두에게 기쁨을 주면서...

 

오직 사랑을 실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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