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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02) 마지막 편지 / 전 원 신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11-19 조회수763 추천수9 반대(0) 신고
 
 
 
 
 
                                                                              글 : 전 원 바르톨로메오 신부
 
스쳐 지나간 얼굴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조엔을 기억합니다.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조엔은 아직도 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예쁜 소녀의 이름입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저는 주일이면 토론토 북쪽 베리(Barrie)라는 아름다운 호반 도시로 한국 교포 신자들의 미사를 도우러 가곤 했습니다.
 
그곳에 사는 한국 신자들은 대부분 조용한 시골에서 가게를 열고 수도자처럼 매일매일 같은 삶을 반복하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마을, 어느 한 착한 가정에 조엔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린 딸에게 백혈병이라는 판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작은 도시라 부모들은 물론 학교 친구들과 마을사람들까지 큰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모든 이들이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현대 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는 희귀성 백혈병은 결국 어린 생명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발병한 지 1년이 채 안되어, 더 이상 병고가 없는 세상을 꿈꾸고 싶다는 일기를 남기고 조엔은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자식의 죽음은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는다고 했듯,  참척(慘慽)의 고통을 안고 딸을 땅에 묻어야 하는 마음씨 착한 부모의 아픔을 저는 보았습니다.
 
언젠가 이별할 날을 위해 선물했던 장미꽃향이 풍기는 빨간 묵주를 손에 감은 채 조엔은 평안하게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죽음의 깊은 잠에 빠진 조엔의 평화로운 모습이 이미 하늘 나라에 숨 가쁘게 도착하여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날 저는 장례미사를 강론하며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있다!' 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조엔은 부모의 애절한 사랑 안에,
친구들의 눈물 어린 우정 안에,
사람들의 기도와 정성 안에 이미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루가 천 년과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기에' (2베드 3,8) 이미 그 나라 안에 조엔이 그토록 사랑하는 부모와 친구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조엔은 가장 순결한 나이, 세속의 때가 아직 묻기 전 바로 그 경계선의 나이에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이들의 이별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단순히 죽음만 놓고 보면 조엔은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모릅니다.
 
가장 소중한 시간, 가장 진실한 삶의 순간에 그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가족들의 온전한 사랑,
친구들의 눈물 어린 우정,
그리고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를 안고 하느님 앞에 조엔은 나아갔습니다.
 
가장 순수한 나이에 하느님 앞에 선 조엔에게는 복잡한 인생의 물음도 삶의 심판도 별로 필요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마치 부모의 애틋한 사랑에서 더 큰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냥 옮겨가 버린 것 같았습니다.
짧게 살다간 세상에서 오로지 그가 만난 사람들과 나눈 사랑만이 조엔에게는 하늘 나라에서 누릴 유일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조엔의 아름다운 죽음을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천상병 시인이 생각납니다.
가난하지만 맑고 순수하게 평생을 살다간 천상병 시인은 삶을 '소풍' 이라고 이해했습니다.
한사발의 막걸리가 있고  시(詩)가 있고 친구가 있어 행복하다는 그는, 지구라는 별에 소풍을 왔다가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잡고' 하늘 나라로 돌아가 천상의 시인이 된 분입니다.
 
그분처럼 세상의 삶을 소풍으로 이해하면 참 행복해집니다.
우리는 저 먼 하늘로부터 아름다운 지구별에 소풍을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멋진 여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낙엽 지는 숲과 강,
바람 비 구름 밤하늘의 별,
계절의 변화..........
지구별에서 이루어지는 눈 내리는 풍경도 비 내리는 풍경도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세상에서 겪는 삶의 고통도 슬픔도 시간의 흐름 속에 어느덧 추억의 이름으로 다시 아름답게 내 삶을 수놓을 뿐입니다.
지구별에 소풍 온 시간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습니다.
점점이 찍힌 내 인생의 사건들,
운명처럼 다가왔던 이해할 수 없는 만남들까지 그 무엇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하늘 나라로 가져갈 추억의 소품들입니다.
 
마치 소풍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 즐거운 시간을 추억하듯,
지구별에서 소풍이 끝나고 돌아갈 나라는 내가 세상에서 품고 간 그 아름다움을 사는 시간이 될 것만 같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나눈 사랑의 기억들은 조엔이 건너간 그 하늘 나라에서 그 사랑을 사는 영원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영사기에 돌아가던 필름이 끝이 나듯 독자를 향한 일련의 저의 편지도 끝났습니다.
먼 훗날 누군가 내 삶에서 어떤 만남이 가장 행복했냐고 묻는다면 뜻을 함께하며 시간과 열정을 바쳤던 연구소를 함께 시작했던 가족들과의 만남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무엇이 가장 행복했느냐고 묻는다면 (말씀지기)를 창간하고 이렇게 '편집자 레터'를 쓰던 시간이었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마음속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어 긴 편지를 고마우신 독자들과 나누었습니다.
이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들은 훗날 하늘 나라에 가져갈 저의 가장 소중한 소품들입니다.
(말씀지기)를 계속 아끼고 사랑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말씀지기에 실린 (편집자 레터) 전문
 
원제 : 조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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