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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묵시21:9-27>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2-11-24 조회수427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묵시21:9-27>

9 마지막 일곱 가지 재난이 가득히 담긴 일곱 대접을 손에 든 일곱천사 중 하나가 나에게 와서 '이리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인 그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10 그리고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 가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 두 대문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에는 천사가 하나씩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그 대문은 동쪽에 셋, 북쪽에 셋, 남쪽에 셋, 서쪽에 셋이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 두 주춧돌이 있었는데 그 주춧돌에는 어린 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5 나에게 말하던 그 천사는 그 도성과 대문들과 성벽을 재려고 금으로 만든 측량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6 그 도성은 네모가 반듯했고 그 길이와 넓이가 같았습니다. 그가 측량자로 그 도성을 재어 보았더니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똑같이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17 또 그가 성벽을 재어 보았더니 사람의 자로 백 사십 사 척이었습니다. 이 자는 천사의 자이기도 했습니다.  18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온통 맑은 수정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9 그 성벽의 주춧돌은 갖가지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주춧돌은 벽옥으로, 둘째는 사파이아로, 세째는 옥수로, 네째는 비취옥으로,  20 다섯째는 홍마노로, 여섯째는 홍옥수로, 일곱째는 감람석으로, 여덟째는 녹주석으로, 아홉째는 황옥으로, 열째는 녹옥수로, 열 한째는 청옥으로, 열 두째는 자수정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21 또 열 두 대문은 열 두 진주로 되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이 각각 다른 진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습니다.  22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24 만국 백성들이 그 빛 속에서 걸어 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은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 올 것입니다.  25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대문들을 닫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사람들은 여러 나라의 보화와 영예를 그 도성으로 가지고 들어 올 것입니다.  27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 가지 못하고 흉측한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도 결코 들어 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오늘 요한묵시록이 이야기 하고 있는 이 그림은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천국의 모습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모습은 바로 여러분의 모습인거에요. 천국에서 찬란한 몸을 입고 그 영원한 곳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여러분의 모습, 그것을 이렇게 보석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지, 절대로  천국이 이렇게 보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들의 終局이 어떻게 아름답게 완성이 될 것인지를 확인하고, 그 소망을 붙들고 오늘을 잘 이겨내라고 격려를 하고 계시는 거에요.

 

 커다란 장독에다가 물을 반쯤 채우고 거기다 생쥐를 넣찮아요? 그리고 뚜껑을 닫아버리고 열지 않으면, 그리고 소리를 다 차단시켜 버리면, 생쥐가 정확히 3분만에 죽습니다. 절망에 빠져서 그래요. 

그런데 똑 같은 독에다가 생쥐를 넣구요, 가끔 뚜껑을 열어서 빛을 비춰주면은, 이 생쥐가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서 36시간을 헤엄을 친대요. 그 안에서. 이렇게 희망이라는 것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인거에요.

하물며 희망을 갖고 있다라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희망은 일어 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을 바라는 것이 희망이라고 하는데, 소망이라는 건 반드시 일어날 것을 바라는 것을 우리가 소망이라고 하거든요?   여러분은 소망을 갖고 있다면서요.

 그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소망을 갖고 있는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겠어요?  당연히 여러분의 처지나 상황이나 현실을 이겨내야지요. 오늘을 이겨낼 수 있어야지요. 그렇죠? 

그래서 이렇게 요한묵시록에 수많은 그 소망의 장면을 하느님이 그림으로 그려서 우리에게 부여주시는 거에요. 야, 여기 있잖아. 또 봐, 또 확인해봐. 이렇게 소망의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에요.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소망의 장면을 하느님께서 그림으로 쫘악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요한묵시록 21장을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 새 세상의 첫 장이다. 맞아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장면대로 새 세상은 시작될 것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찬란한 세상이 영원히 시작될 거에요. 그래서 새 세상의 첫장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여러분은 그 소망을 갖고 계신다구요. 확실히 붙들고 계십니까? 그러면 이길 수 있는 거에요. 

 

 (골로1,3-5) 3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서 언제나 기도하고 그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모든 성도에게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5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늘에 마련해두신 축복에 대한 희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희망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받아 들였을 때에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그렇죠. 이 소망이 없으면 믿음도, 사랑도 여러분들 속에서 발휘되어 질 수 없는 거라는 거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이 소망을 매일 매일 확인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소망, 그 하늘에 쌓아둘 소망이 믿음과 사랑을 배태하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그 하늘을 향한 소망을 굳건히 다져야 되는 거에요. 그 소망을 다지지 않으면 여러분은 절대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을뿐더러 믿음을 발휘하는 삶을 살 수도 없어요. 

그러니깐 매일 지는 거고 매일 실패하는 거에요. 매일 나는 가짠가봐. 매일 울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요 오늘 확실히 그 소망을 꼭 붙들고 가십시오

 

먼저 본문 9절과 10절을 보면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하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하게 기술이 되어 있어요볼까요. 

 

이리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인 그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9)”. 

신부, 어린 양의 아내는 누구지요? 우리가 알고 있다 싶이 교회, 하느님의 백성이지요.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 가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10)” 

신부를 보여줄게 그래놓구 무얼 보여주었다구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다구요. 

그러니 신부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여러분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했던 21장 2절에 보면 그 신부는 신랑을 위해서 항상 단장을 하고 있어야 돼요. 볼까요.

 

(묵시21,2)  2 나는 또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처럼 차리고 하느님께서 계시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단장을 하고 내려 왔어요. 여기서 단장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스매오”에서 영어의 Cosmetics가 나온 거에요. 화장하다, 단장하다, 꾸미다. 거기다가 이 단어는 능동형이에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가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땅에서 능동적이며 역동적으로 반드시 단장하는 행위를 하고 있어야 된다라는 말인 거에요.

여러분 주위에서 결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부가 결혼식 날 신랑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결혼식 날까지 자기를 단장하는 것은, 정말 가히 눈물겹기까지 해요. 피부 관리, 체중 관리, 심지어 교양 교육까지 받아요. 정말 신부들은 그렇게 결혼식 날 신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런 준비를 해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게 진짜 확인이 되었다면, 믿음으로 우리는 확인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소망이니깐. 그랬다면 우리는 그 신부 이상의 어떤 단장에, 치장에 노력을 해야 된다니깐요. 그게 우리 신부다운 삶, 거룩한 삶인 거에요. 그게 나오지 않으면, 너희들은 혹시 신부가 아닐지도 몰라, 이런 성경이 누누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묵시21,11)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그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과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과 같았습니다.”. 

 

여기 보면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다, 이렇게 기술되어 있어요. 벽옥이라는 보석은 하느님의 영광, 그리고 하느님의 본질, 본체를 묘사하는데 주로 쓰이는 보석이거든요. 그게 지금 교회에게 쓰이고 있단 말이에요. 한 군데만 볼까요.

 

(묵시 4,3). 3 그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으며 그 옥좌 둘레에는 비취와 같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자, 그 하느님의 빛을 상징하는 그 보석의 빛이 우리 성도에게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요.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이제 성도들이 우리가 여러 차례 배웠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그 발상적 영광을 충만히 받아서, 하느님의 영광을, 영광의 빛을 효과적이며 반사적으로 온전히 비추어 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에요. 

그런데 그것은 먼 훗날 저 하늘에서만 이루어 질 일이 아니라, 지금 하느님의 백성이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고 있는 여러분 속에서 문득 문득 나오고 있어야 된다라는 거에요 그것이.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서, 그 하느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응하며 나타내는, 창조의 목적으로의 회귀가 완성된 곳을 말하는 거에요.  

자, 감히 우리에게서 그 하느님의 속성이며 본질인 그 빛이 발산되고 있다라는 거,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건줄 아세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런 것들이 문득 문득 나타나야 된다라는 거에요.  

이어서 12절에서 14절에서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대문들과 기초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기술이 되어 있어요. 그 부분만 잘 해석을 해도 이 새 예루살렘이 장소적이며 공간적인 곳이 아닌 하느님의 백성들인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아실 수 있어요. 

 

(묵시21,12-14)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 두 대문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에는 천사가 하나씩 있었으며 또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그 대문은 동쪽에 셋, 북쪽에 셋, 남쪽에 셋, 서쪽에 셋이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 두 주춧돌이 있었는데 그 주춧돌에는 어린 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머리 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 보세요. 새 예루살렘에는 열 두 개의 문이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이 써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에요. 동, 서, 남, 북, 이렇게 사 방위의 세 개씩의 문이 있는 거에요.

 십이(12)라는 숫자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에요  삼위 하느님의 숫자에다가 사(4) 방위, 이 땅을 상징하는 사 방위의 사(4)를 곱해서 십이(12)라는 숫자가 된 거에요. 그러니 십이(12)는 네 방위로 상징이 되는 이 땅 위에서 삼위 하느님에 의해서 선택되어지고 새롭게 창조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에요. 그게 십이(12)인 거에요. 

그래서 구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지파가 굳이 열 두 지파인 것이고, 신약의 교회의 기초를 상징하는 사도들이 굳이 열 두 사도여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유다가 빠졌을 때에 마티야 를 굳이 갖다 꿰어 넣는 것입니다. 십이(12)를 맞추는 거에요. 그게 교회의 숫자에요. 여러분의 숫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주의 깊게 보면 교회를 상징하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 위에 십이 사도의 이름이 있구요, 

그러니까 열 두 사도가 기초석이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 기초석 위에 세워진 성곽에 나있는 그 열 두 문에 구약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잘 그려 보세요. 그 말은 구약의 열 두 지파로 구성되었던 그 이스라엘은 열 두 사도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거였다라는 것을 알려 주는 거에요. 잘 그려 보세요.  

 

 구약의 열 두 지파라는 것은 열 두 사도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열 두 지파였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거란 말입니다. 

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환상은요, 구약의 에제키엘서에 이미 등장했던 거에요.  여러분이 즈카리야, 에제키엘, 이사야를 전혀 모르고서 신약의 요한묵시록을 해석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인 거에요.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이 요한묵시록만 보고 해석을 하게 되면 자꾸 역사를 거기다 갖다 끌어넣게 되는 거에요. 세대주의자들의 오류가 그런 거에요. 전 그들의 주장을 읽어 보면, 이 사람들이 정말 구약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본 사람들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간혹 있다니깐요. 절대 아닙니다.  

 

(에제 48, 30-35) 30 도읍지의 출입문은 다음과 같다. 31 이 성읍의 대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다. 사천 오백 척 거리의 북쪽 가에 대문이 세개 있는데 하나는 르우벤 대문, 하나는 유다 대문, 하나는 레위 대문이다.  32 사천 오백 척 거리의 동쪽 가에도 대문이 세 개 있는데 하나는 요셉 대문, 하나는 베냐민 대문, 하나는 단 대문이다.  33 사천 오백 척 거리의 남쪽 가에도 대문이 세개 있는데 하나는 시므온 대문, 하나는 이싸갈 대문, 하나는 즈불룬 대문이다.  34 사천 오백 척 거리의 서쪽 가에도 대문이 세 개 있는데 하나는 가드 대문, 하나는 아셀 대문, 하나는 납달리 대문이다. 35 그래서 사면의 합은 만 팔천 척이다. 이 도읍지의 이름은 이제부터 야훼 삼마이다.'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그 성막이 가운데에 있고, 레위 지파가 그 성막을 두르고 있었고, 동서남북에서 각 지파들이 그 성막을 둘러싸고 있었잖아요? 그게 “교회”를 상징하는 거였잖아요. 그죠? 

그것과 지금 여러분이 읽었던 에제키엘서 48장의 그 마지막 부분과,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읽었던 그 내용과 요렇게 연결을 시켜 보란 말이에요. 

에제키엘서를 잘 읽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에제키엘서 10장 18절에서 “18 야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거룹들 위에 멈추셨다. ” 야훼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버리지요? 그리고 에제키엘서 43장에서 야훼의 영광이 다시 돌아온단 말입니다. 

그리고  40장에서부터 42장까지 어떤 사람이 성전을 측량하는 장면이 나온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거를 모르면 오늘 본문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거에요. 자 그 야훼의 영광이 돌아 온 그 성전에서 어떤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가 어떤 소리인지 볼까요?  

 

(에제 43장 7절) 7 '너 사람아' 하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여기는 나의 옥좌가 있는 자리다. 내 발판이 놓인 자리다. 나는 여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영원히 머물 것이다. 다시는 이스라엘 왕을 비롯하여 온 족속이 음란을 피우거나, 죽은 왕의 기념비를 세워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새로운 야훼의 성전은 다시는 야훼가 떠나시지 않는 영원한 야훼의 처소가 될 것임을 천명하고 있어요. 야훼의 처소 그러면 생각나는 데가 있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거할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하셨을 때 그 처소가 누구라 그랬어요?   교회라고 그랬잖아요. 우리라고 그랬잖아요. 

에제키엘서에서 이야기 하는 그 처소, 그 성전, 야훼의 영광이 다시 돌아 온 그 성전은 바로 우리라는 거에요, 우리. 야훼가 영원히 거하시는 곳, 그것은 히브리 말로 “야훼삼마”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에제키엘서 맨 마지막에 나왔던 동편, 북편, 남편, 서편에 문들이 있고, 그 성전이 야훼 삼마더라 했던 그게 누구라는 거에요?  성도, 우리라는 거란 말입니다.  연결이 되세요?  여러분 이 정도도 이해를 못하면 안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죄로 말미암아 그 거처를 떠나셨던 야훼께서 다시 새로운 창조를 통해서, 이제 그 거처를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는, 그 구속사 전체가 에제키엘서에 묵시적으로 담겨있는 거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야훼삼마, 하느님께서 영원히 그 분의 생명력을 부어주시며 함께 거하시는, 야훼의 처소인 하느님의 백성을 말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구약을 모르면은 이 내용을 보고 펄시콜레같이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거기는 기둥이 황금이고, 홍보석이고, 녹보석이고, 길이 다이아몬드고, 이따위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에요.

에페소서 2장 20절에 가보면, 지금 여러분들이 읽으신 에제키엘서 48장, 43장, 요한묵시록 21장의 이야기가 아주 쉽게 요약이 되어있는데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에페 2:20-22)  20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21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22 여러분도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져서 신령한 하느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런 뜻이에요. “너희는 사도들과 예언자(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단어까지 똑같이 나오지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그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누가 성전이에요? 우리가, 그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처소가 누구에요? 여러분. 연결이 쭉 되지요? 에제키엘서, 요한묵시록, 에페소서,  이렇게 열두 사도의 기초석 위에 세워져 있는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이 영원히 거하실 처소인 우리 교회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거에요,    계속해서 15절부터 17절까지 해서 그 성의 크기에 대해서 나오는대요. 한 번 볼까요?  

 

 (묵시21:15-17) 15 나에게 말하던 그 천사는 그 도성과 대문들과 성벽을 재려고 금으로 만든 측량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6 그 도성은 네모가 반듯했고 그 길이와 넓이가 같았습니다. 그가 측량자로 그 도성을 재어 보았더니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똑같이만 이천 스타디온이었습니다. 17 또 그가 성벽을 재어 보았더니 사람의 자로 백 사십 사 척이었습니다. 이 자는 천사의 자이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내용 같지만, 전혀 어렵지 않아요. 잘 보세요. 먼저 측량을 한다는 것은요, 그 측량의 대상이 완성이 되었을 때 측량을 하는거죠. 척량은 측량을 하는 거에요. 완성도 안 된 것을 측량할 필요가 없잖아요? 혹은 완전히 부수어 버릴 때, 어떤 것을 완전히 부수어 버릴려고 할 때 측량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성전 척량의 환상이 등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영원히 거하는 그 성의 거룩함과, 어린 양의 신부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그 완전한 성취를 시사하는 거에요. 그게 이제 완전히 성취되었다를 시사하는 거에요. 그게 측량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척량(측량)이라는 것은 보존의 의지를 담고 있는 거에요. 이걸 잘 척량한다는 것은 내가 이걸 이제는 잘 보존하겠다라는 의지가 담겨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거룩한 성을 척량한다는 것은, 그 척량의 대상인 누구를 척량하고 있어요  거룩한 성은 누구? 여러분, 하느님의 백성이란 말이에요. 이 하느님의 백성을 척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을 하느님께서 척량의 대상인 하느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고 안전하게 보존하실 것이다라는 의지를 거기다가 피력해 놓으신 거란 말입니다. 그게 척량인 거에요. 

그런데  그 척량 자로 쓰인 게 금 갈대에요. 이게 좀 어렵죠? 전혀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 그 때 당시에는 갈대를 자로 썼거든요. 그래서 갈대가 나오는 거구. 그런데 그게 금 갈대라고 그래요. 금 갈대.

그 말은 그 성의 규모가, 성이 하느님의 계획과 목적에 딱 맞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거에요. 당시 고대 시대에는 금 갈대로 척량을 한다라는 말은요, 척량할 대상이 애초에 원래의 의도와 계획대로 만족스럽게 완성되었을 때 쓰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구절은 요, 고대 문학의 문학 양식이라든지, 아니면 고대 시대의 관습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공부하지 않으면 해석이 불가능한 거에요. 그래서 이런 구절 하나를 해석하려면, 정말 책을 여러권  읽어야 되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는 게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서 봐야 되는 거에요.  막 읽는다고 성령이 나에게 직통계시를 막 주시겠어요? 그걸 '성령을 사사로이 품다'고 하는 거에요. 막 볼 수가 없는 거에요,  공부를 안 하고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런데 그 성의 길이, 넓이, 높이가 일만이천 스타디온으로 똑같다 그래요. 여기 또 십이(12)라는 숫자가 나오지요? 십이는 무슨 숫자라고 그랬어요?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수,  삼(3) 곱하기 사(4)라고 그랬어요. 거기다가 무수히 많은 허다한 무리를 상징하는 천을 곱해서 만이천 이란 숫자가 나온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께 구원을 받은 허다한 무리들의 하느님 백성들을 상징한다는 것이 거기에서 또 한 번 확인이 되는 거죠.

 

 길이, 넓이, 높이가 만이천 스타디온이라고, 일부러 스타디온을 썼단 말이에요. 만이천이라고. 일부러. 근데 그 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같다라는 건,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정육면체란 뜻이죠?

정육면체하면 생각나는 게 또 있죠? 지성소! 지성소가 정육면체였잖아요? 거기는 하느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었죠. 하느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었잖아요. 하느님이 계시는 곳은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고, 보탤 것이 없다 라는 의미에서 정육면체인 거에요.

그러니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지성소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게, 열왕기상 6장 19절을 한 번 보고 설명을 드릴 게요. 

 

(열왕기상 6:19-2019 밀실은 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꾸며 놓았는데( 지성소) 거기에 그는 야훼의 계약궤를 모셨다. 20 그 밀실은 길이 이십 척, 나비 이십 척, 높이 이십 척인데 순금으로 입혔다. 또 송백나무 제단도 만들었다

 

보세요 지성소도 정육면체지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지성소처럼 정육면체로 생겼다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 성도들이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 갈 수 있었던 그 지성소가 되었다는 거에요

우리가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니까, 맞잖아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밖에 못들어 갔었던 그곳, 그것도 정결하지 못한 모양으로 들어가면 바로 즉사 당했던 그 곳, 그 곳을 우리는 눈만 감으면 수시로 들어가죠. 그게 기도잖아요?  

기도는 하느님의 면전에서 내가 나의 아뢸 것을 아뢰고, 하느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찬송하고 찬미하는게 기도니까. 눈만 감으면 우리는 지성소에 들어가죠.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내 안에 아예 하느님이 와 계셔요. 그게 지성소지 뭐에요. 

그것이 저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확연히 드러나게 되는 거에요. 숫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하는 그 영광스러운 삶이 우리에게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시적으로, 그게 우리가 소망이라고 하는 거에요,  

이렇게 새 예루살렘 성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만이천 스타디온, 우리가 사용하는 도량형으로는 1,500마일이에요. 

그러니까 2,400km 정도 되는거죠?

 

어떤 사람이 이걸 한 번 계산해 봤더니, 새 예루살렘이 미국 땅의 사분의 삼(3/4) 정도 되더래요. 그런거 신경쓰지 마세요. 전혀 몰라도 돼요 그건. 상징이기 때문에. 그런 크기 같은 건 계산할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그 새 예루살렘 성의 높이가  만이천 스타디온, 1,500마일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 밑의 줄에 보면, 그 성곽을 척량했는데 144 규빗이다 라는 말이 또 붙어 있어요. 144 규빗이면 65미터거든요. 그 예루살렘 성의 높이가 2,400km의 높이 인데, 성곽, 성벽이 65미터면 어떻게 되는거에요? 이건 왜 세우는 거에요 그러면. 

그래서 성곽이 144 규빗이다라는 요 구절은 높이가 아니라 두께다 라고 학자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이게 높이든, 두께든 아무 상관 없어요. 어차피 상징이기 때문에. 

굳이 높이와 두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두께를 고르겠어요. 왜냐하면 2,400km 높이의 성을 무슨 65m짜리가 그 성을 보호합니까? 두께 그러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죠.

144라는 건 뭐에요? 12곱하기 12(12x12). 하느님의 백성들의 숫자란 말입니다. 그죠? 그러니 그게 144라는 것은 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들은 삼위 하느님에 위해서 선택되고, 새롭게 창조되어진 자들만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거에요. 144란 숫자가 12x12니까.

그리고 그들은 완전하며 안전하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거에요. 왜? 이것이 두께가 144규빗, 65m라는 것은 고대시대의 성곽은 그렇게 두꺼웠다구요. 보통 마차 2대에서 4대, 6대까지 그 성벽 위로 다녔다니까. 얼마나 두꺼웠어요? 그러니까 그 속에 들어 있는 자들이 이제 안전하다, 그리고 그들은 완전한 자라는 걸 보여 주는 게 144규빗이에요. 거기까지 이제 이해가 가셨죠? 

 

그리고 17절 후반부에 “사람의 자로 백 사십 사 척이었습니다. 이 자는 천사의 자이기도 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이 구절도 에제키엘서 40장에서 42장까지를 모르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에요. 억지로 상징하거나 추측해서 풀 수 밖에 없는 구절입니다. 

여러분, 에제키엘서 40장에서 42장까지 보면, 어떤 놋 같이 빛나는 사람이 나타나서 성전을 척량한다구요. 에제키엘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 사람이 바로 천사다라는 거에요. 그 말은 그건 바로 사람이 괜히 성전을 척량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어떤 의미가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에제 40,1-4)  1 우리 수도가 함락된 지 십 사 년, 우리가 포로된 지 이십 오 년에 접어들던 해 정월 십일이었다. 바로 그 날 야훼께서 손수 나를 잡으시어 수도로 데리고 가셨다. 2 이상 가운데 하느님께서 나를 고국 이스라엘로 데리고 가시어 매우 높은 산에 내려 놓으셨다. 그 산 위에는 남쪽으로 한 성만큼한 건물이 서 있었다. 3 내가 그리로 이끌려 들어 가는데, 놋쇠같이 빛나는 사람 하나가 손에 노끈과 막대기를 들고 대문에서 있다가  4 나에게 말하였다. '너 사람아, 잘 보고 잘 들어서 내가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을 모두 명심하여라. 보여 줄 것이 있어 너를 이리로 데리고 온 것이니, 잘 보아 두었다가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그것을 모두 알려야 한다.' 


그러면서 무려 4장에 걸쳐서 척량을 한다구요. 그리고 에제키엘서 43장에서 성전으로 하느님의 영광이 다시 돌아온다 말입니다.  그리고 18절부터 21절 사이에서는 그 성의 건축재료가 나와요. 그러니 그 성의 건축재료라는 거는 무어에요? 성은 누구다? 우리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건축재료는 뭐에요?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거란 거죠, 그게 뭐죠? 보시지요. 18절.

 

(묵시 21:18-21)  18 그 성벽은 벽옥으로 쌓았고 도성은 온통 맑은 수정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9 그 성벽의 주춧돌은 갖가지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주춧돌은 벽옥으로, 둘째는 사파이아로, 세째는 옥수로, 네째는 비취옥으로, 20 다섯째는 홍마노로, 여섯째는 홍옥수로, 일곱째는 감람석으로, 여덟째는 녹주석으로, 아홉째는 황옥으로, 열째는 녹옥수로, 열 한째는 청옥으로, 열 두째는 자수정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21 또 열 두 대문은 열 두 진주로 되어 있었고 그 열 두 대문이 각각 다른 진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습니다. 

 

진주라는 것은 고대시대 때 가장 값비싼 보석이었어요. 근데 문이 한 진주에요, 진주가 얼마나 크면 문이 하나가 되요, 그게. “문이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여기 등장하는 보석들은 진주를 포함해서, 당시 고대사회에서 가장 값비싸고 화려한 보석들인 거에요.

 요한은 그 보석들을 총 동원해서 성도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표현하고 있는 거에요. 묘사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거에요. 우리는 그런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할 것이란 말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변모산에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와 엘리야가 떠오르지 않으세요? 눈이 부셔서 바라 볼 수 없었던 그 찬란한 빛, 그게 우리라는 거에요. 그걸 이 보석으로 요한이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석들은 당시 대제사장들의 흉배에 붙이던 보석이었다구요. 한 번 볼까요? 

 

(출애 28,17-21). 17 거기에 보석을 네 줄로 박아라. 첫줄에는 홍옥수와 황옥과 취옥을 박고 18 둘째 줄에는 홍옥과 청옥과 백수정을 박아라. 19 셋째 줄에는 풍신자석과 마노와 자수정을 박고 20 네째 줄에는 감람석과 얼룩마노와 벽옥을 박되 각각 금테에 박아라. 21 이스라엘의 아들이 열 둘이니 이 보석들도 그 이름 수대로 하고, 보석 하나하나에 열두 지파의 이름을 인장반지를 새기듯이 새겨 넣어라. 

 

그 보석들이 누구라구요? 그 보석에 누구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 열두 지파의 이름. 하느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보석은 누구다? 하느님의 백성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가서 살 곳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이 보석인 거에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보석인 거이요. 여러분들이요.  

여러분들의 신분은 정말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구역의 대제사장에게 주어졌던 그 권한이, 바로 우리에게 다 주어졌다 라는 것을 보여 주는게 오늘 본문인 거에요.

그래서 대재사장들이 차고 있던 그 흉배에 붙어 있던 그 보석들로 우리를 묘사하는 거에요. 여러분은 왕 같은 뭐다? 제사장이니까, 하늘 나라에서도 영원히 그렇게 살거니까. 당시에는 제사장이 이거(으뜸)였잖아요.

 

요한묵시록의 최초의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초대 교회 교인들인 거에요. “너희들은 그렇게 영광스러운 존재야”라는 것을 보여 주는 거에요. 자, 여러분이 바로 그 희망이 있는 자. 우리는 이제 저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찬란한 몸으로 변화될거야.

 그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은 이 땅에 육신이 처한 상황이나, 이 땅에 육신이 갖고 있는 모양, 모습에 별로 개의치 않아요. 찢어진 눈, 작은 키, 짧은 다리, 뚱뚱한 몸, 이런 걸 갖고 낙심하지 않는다니깐요.

이거는 우리가 그 나라에서 새 몸을 입기까지 잠깐 생존하기 위해 입고 있는 껍데기 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절대 이 몸뚱아리에 연연하지 않아요. 사람 몸이라고 하지만, 이 육신이라는 건 이 세상 것들을 상징하는 거에요. 대표하는 거에요.

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진짜 희망하는 자들, 그 새 몸을 진짜 확신하고 있는 자들은, 절대 이 몸뚱아리에 연연하지 않아요. 그들이 처한 상황과 처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아요. 그걸로 주눅들지도 않고, 그걸로 교만 떨지도 않는다니깐요. 

그게 희망이 있는 자들인 거에요. 여러분의 처지나 상황도, 여러분이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 가는데 하느님의 방법과 수단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서 누리고 자족하면 되는 거에요. 그게 희망이 있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새 예루살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시다 그래요. 구약 시대의 성전은 무엇이었어요? 하느님께서 임재하셔서, 하느님이 하느님의 백성과 교제하던 곳이었지요? 그런데 거기는 성전이 없고, 예수와 하느님이 성전이다. 

뭐에요? 이제는 그런 가시적인 성전이 필요 없어졌어, 왜? 우리는 늘 같이 있으니까. 하느님이. 예수님이 늘 같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 분이 성전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에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묵시21,22-23)  22 나는 그 도성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 양이 바로 그 도성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 이 곳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고 있어야 돼요. 우리는 지금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지는 못했지만, 믿음과 희망으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을 조금씩 경험하고 있다구요.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거에요.

우리는 지금 이 땅의 유일한 빛의 발광체인 태양과 달 밑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 태양과 달, 그 빛에 좌지우지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에요, 왜? 해 아래 새 것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은 새 것이기 때문에, 이 태양 아래의 삶의 원리로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양 위의 삶의 원리로 살아야 되는데, 그 삶이 뭐에요? 하느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서 그 영광을 반사해서 드러내며 찬양하며, 그게 ,하느님의 성품을 내 삶에서 드러내는 거죠.

나의 힘을 축적해서 내 스스로 나를 보호하겠다는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부응하는 삶, 그게 바로 하늘 위의 삶, 태양 위의 삶인 거에요. 우리에게 그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성도들은 하느님 나라의 공동 상속자로 부르셨어요. 그 말은 우리를 그 하느님 나라의 왕 취급을 해주시겠다라는 거에요. 여러분의 신분이 그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입고있는 이 껍데기나, 여러분의 껍데기에 사랑하고 있는 상황과 처지나 환경, 이것으로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교만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이 아프세요? 괜찮은 거에요. 그것으로 하느님이 여러분을 지금 만들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가난 하십니까? 이혼을 하셨습니까, 혹시? 괜찮습니다, 여러분. 

그 상황이 여러분을 만들어 가시는 하느님의 손길인 거에요. 우리는 저 하늘을 보는 거니까. 새 몸을 바라는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것이니까.  우리는 당당할 수 있는 거에요. 어깨를 펴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런 구절이 나와 있는 거에요. 24절을 보세요

 

(묵시21,24-26)  24 만국 백성들이 그 빛 속에서 걸어 다닐 것이며 땅의 왕들은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그 도성으로 들어 올 것입니다.  25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대문들을 닫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26 그리고 사람들은 여러 나라의 보화와 영예를 그 도성으로 가지고 들어 올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들어가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거에요. 이 장면도 이사야서에서 이미 예언된 거에요. 한 번 보실래요.

 

 (이사야 60:1-3)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2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야훼께서 너만은 비추신다. 네 위에서만은 그 영광을 나타내신다. 3 민족들이 너의 빛을 보고 모여 들며 제왕들이 솟아 오르는 너의 광채에 끌려 오는구나.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입성하는 모습을 그려보면 막 흥분이 되지 않습니까? 

지금 나는 이렇게 추하고 더럽고 어두운 면을 갖고 있는 이런 사람이지만, 이런 이 몸뚱아리를 갖고 있는 자지만, 이제 내가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새 몸으로 변화되어서 그곳으로 입성하는 거에요. 이 내 동료들과 함께 손을 잡고 그 곳을 입성하는 거에요. 이제 영원히 살 곳으로 입성하는 거에요. 그거를 생각하면 흥분이 안 되시냐 말이에요. 

 

여러분이 천국에 입성할 때는 천국 천사들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가 줄을 서서 박수를 쳐 줄 겁니다. “잘했다. 내 아들아” “잘했다 내 딸아” “이제 끝났어” “이제 영원히 너의 세상이야” 이게 희망인 거에요. 이 희망이 있으면 오늘을 여러분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정말 예수를 알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져 버린 많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의의 흰옷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입성을 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셔야 되는 거에요

이제 다시는 밤이 없고, 어둠이 없고, 죄가 없고 또 다른 악한 자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성문을 다시 닫을 필요가 없는, 이제는 완전히 안전한 그곳, 여러분은 그 곳으로 들어 가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런 구절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곳에 다시 밤이 없겠고, 성문이 닫히지 않더라 계속 열려 있더라”라는 거에요. 성이 열려 있더라는 것은, 지옥이 있는 놈들이 가끔 올라 와갔고 돌어 올 수 있더란 말이 아니라, 이제는 악한 자들이 절대 공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문을 닫을 필요가 없다라는 거에요

안전하다. 이제는 여러분이 타락할 이유도 없고, 타락할 수도 없는 그 곳, 그 곳도 이사야서에 미리 예언되어 있는 거에요, 볼까요?  

 

(이사야60:11.19-20) 11 밤에도 낮에도 잠그지 아니하고 네 성문은 늘 열려 있어, 왕들이 앞장 선 가운데 뭇 민족이 보화를 성 안으로 들여 오리라.  19 낮에는 해가 너를 비출 필요가 없고 밤에는 달이 너를 비출 필요가 없으리라. 야훼가 너의 영원한 빛이 되고 너의 하느님이 너의 영광이 되리니  20 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아니하고 너의 달이 다시는 스러지지 아니하리라. 야훼가 너의 영원한 빛이 되리니 다시는 곡하는 날이 오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묵시록은 구약을 모르고는 절대 해석할 수 없는 거에요.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네 빛이며 등이다.”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태양, 이 달, 그 빛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면 안 되요. 그 말은 이 세상의 것으로 좌지우지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왜?  여러분을 비추고 있는 발광체는 하느님이고, 예수니깐, 절대 그런 것으로 주눅들지 마시고, 교만떨고 그러지들 마세요. 절망하지도 말고, 실망하지도 마세요. 잠깐이에요. 잠깐 입고 있는 거에요. 잠깐 거하다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구약부터 예언되어 있는 그 찬란한 땅에 반드시 들어가게 될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분이 신부로서 이 땅에서 무얼하고 있어야 된다구요? 단장을 하고 있어야 된다니깐요. 그 거를 하시냐는 말입니다. 그 걸 안하고 여러분은 지금 그 신랑의 재산이 얼만가? 어떻게 그 재산을 빼먹을까? 요런 궁리하고 있는 거에요.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 단장을 하는데 신경을 쓰지 않고, 제 단장을 안하고 하느님한테 어떻게 땡깡을 부려갖고 그 분을 내 힘으로 사용해서 병이나 낫고, 부자나 되고, 내 소원을 성취할까? 여기에 관심이 있다니깐요? 

이런 악한 인간들, 그런 신부들은 곧 소박맞게 되있어요. 여러분 단장 안하고, 준비 안하고 어디 신랑 앞에 가요? 

결혼식 날 신랑이 신부를 딱 봤더니, 눈꼽이 이만한게 달려있고, 이빨도 안닦고, 입에서 냄새가 나고, 머리에 새 둥지가 이만한게 달여 있어... 그럼 그걸 어떻게 해요? 그거를.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다니깐요. 아니에요? 여러분의 거룩을 준비하고 계시냐구요. 그 나라에서 여러분은 어린 양의 신부로 사셔야 되는데, 그 단장을 하고 계시냐 말입니다. 그걸 안해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거기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보세요. 

 

(묵시21:27) 27 그러나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그 도성으로 들어 가지 못하고 흉측한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도 결코 들어 가지 못합니다. 그 도성에 들어 갈 수 있는 자는 다만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올라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여기서 흉측한 짓(속된 것), “코이논”은 우상숭배자들을 가리키는 거에요. 그러니까 하느님, 예수님 말고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게 “코이논”인 거에요.

그리고 가증한 일, “브델리그마”란 뜻은 우상 숭배자나 배교자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진리 이외의 것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 그리고 거짓말 하는 자들은 거짓 예언자 거든요. 거짓 예언자를 암시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거짓 敎理로 엉터리 그리스도교를 가르치는 자들, 다 어디있는 자들이요?  성당 안에 들어와 있는 자들이라니깐요. 이게. 성당 안에 들어와서 단장하지 않고 그 신랑의 재산을 빼 먹을려고 하는 인간들, 그들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게 우상 숭배자, “코이논”, “브델리그마”, 거짓 말 하는 자들인 거에요.  이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무얼하면서 사셔야 하는 지 아시겠죠? 어떻게 준비를 해야 되는가 아시겠죠?

 

여러분, 오늘날 한국 교회를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와요. 비근한 예로,  송구영신 미사예배가 왜 한국 교회에만 있는지 아세요?  다른 나라에는 없어요.  한국의 무속 신앙에서 나온 거에요.

 한국의 무속 신앙에 섣달 그뭄 날 자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고 그러죠? 눈썹 센다고. 눈썹이 왜 세요?  한국의 무속 신앙에는 새해가 되기 전, 섣달 그뭄 날에, 밤에, 자정이 되기 전에 집집마다 귀신들이 찾아 온다고 믿고 있어요. 신들이 온다고, 그래서 그 때에 자고 있으면 안되요.

 깨어서 그 귀신들이 왔을 때 얼른 소원을 빌어야 새해에 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때 자고 있으면 눈썹이 센다라는 것은 액운이 들어온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못자게 하는 거지요.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났더니 그런 건 미신이래요. 그래서 안했어요. 그런데 찜찜해.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송구영신 예배(미사)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걸 그대로 갖고 들어 온 거에요. 교회 안에.

 여러분 이렇게 이야기하고 우리 교회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안하면, 분명히 요 중에 있는 사람 중에 찜찜해서 딴 교회 송구영신 예배 갈 사람 있을 거에요, 그죠?  심지어 어느 교회에 가면은 교인 수 대로 성경 구절 하나씩 적어갖고 통에 넣은 다음에 하나씩 뽑으라고 그래요. 

그래 갖고 이게 내년에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니까, 이 말씀 잘 붙들고 살으라고. 세상에 성도가 일년에 그 한 구절을 갖고 살아야 돼요? 이거 다 무당 짓 하는 거에요.  

매일 매일을 여러분은 결단하고, 매일 매일을 회개해야 되는 거에요. 그날 한날을 어떻게 “아, 일년 동안 이거 망친 거 다 구겨버리고 새 도화지 받자”. 이거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매일 매일, 아니 매 순간 우리는 회개하고 결단하며, 회개하고 결단하며 살아 가는 거에요. 이거는 어떻해서든지 하느님을 이용해서 그냥 자기 이익만 챙기려고 하니까. 교회 안에 온통 그런 무속 신앙이 들어와서 잡교가 되어 버렸어요, 이거를.  

그것마저 안 하면 우리 교회는 대목을 다 놓치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 때 사람들이 복 받으려고 헌금 많이 하거든요.(웃음) 

그리스도교는 신부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거 단장 안하고 남편 앞에 섰다가 나중에 큰 낭패 당할 수 있어요. 오늘부터 여러분이 꼭 해야 할 그 일을 하십시오. 단장을 하십시오. 거룩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영광송으로 마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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