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11-15 조회수993 추천수17 반대(0) 신고
 
2007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cannot be observed,
and no one will announce, ‘Look, here it is,’ or, ‘There it is.’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
(Lk.17.21)
제1독서 지혜서 7,22ㄴ─8,1
복음 루카 17,20-25
 
오늘의 독서와 복음 듣기





오늘은 수학능력평가가 있는 날입니다. 아마 많은 학생들이 그리고 그 부모님들이 이 날을 기다리고, 또한 가장 긴장을 하는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지금까지 노력한 만큼의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하면서 이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셨으면 합니다. 저 역시 오늘 하루 기도하면서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새벽 묵상 글을 시작합니다.

어머니와 6살 먹은 어린 아들이 시장을 갔었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물건을 구입하는데, 맞은편에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한 여인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장애는 얼핏 보아도 상당히 심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얼굴은 심한 화상을 입었고, 다리도 무척이나 불편하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의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던 6살 먹은 어린 아들이 이 여인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엄마, 저기 저 아줌마 봐!”

주위 사람들은 아이가 장애인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말하는 모습을 보고서, 흉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인상을 찡그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주위의 눈총을 받으면서 아이에게 조용히 충고했지요.

“얘야, 장애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흉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란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애인인 그 여인 앞으로 다가가더니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었어요.

“와! 아줌마가 쓰신 그 모자는 정말 멋져요.”

이 어린 아들에게 장애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며, 관심도 없었습니다. 유일한 관심은 그 장애인이 쓰고 있었던 모자였던 것입니다.

무엇을 보느냐가 그리고 어디에 관심을 갖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즉, 좋은 것, 긍정적인 것을 바라보고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쁜 것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나쁜 생각만을 간직하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세상 안에서는 미움과 다툼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던지지요.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세속적으로 팡파르가 울려 퍼지면서 화려하게 다가오는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도 훨씬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왔던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이 하느님 나라에 영광스럽게 들어갈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엉뚱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우리들의 완고한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바로 세속적으로만 보려하는 마음 때문에, 함께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만 누리려는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과연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세속적인 관심꺼리만 바라보려 한다면 결코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시선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려 할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를 느끼고 그 안에서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수험생을 위해 기도합시다.




밥을 대하는 마음(김풍기, ‘좋은생각’ 중에서)
 
조선 시대에 과거 시험을 주관하는 관리가 결정되면 예빈시라는 관청에서는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예빈시의 음식이 형편없고 더러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손도 대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돌아가곤 했다. 심지어 밥에 쥐똥이 섞여 있기까지 했으니, 그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명종 때부터 선조 연간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관료였던 정유길은 그 음식을 남김없이 먹었다. 물론 쥐똥이야 골라내고 먹었을 테지만, 눈 하나 까딱 않고 태연히 음식을 먹는 그의 먹성은 참 대단했다.

정유길은 잔칫집에 갈 때면 언제나 조반을 먹지 않고 갔다. 집안사람들이 조반을 먹고 가라고 권하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나를 위하여 음식을 차려 놓고 부르는데, 내가 만약 집에서 배불리 아침밥을 먹고 간다면 잔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할 것 아닌가.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렸더라도 내가 그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잔칫집 주인은 자신이 차린 음식이 보잘것없어서 내가 먹지 않는 줄 알고 서운해할 것이야. 이 어찌 오만하고 무례한 짓이 아니겠느냐.”

이런 마음으로 언제나 음식을 대했기 때문에 정유길은 어느 자리에서나 환영받았다. 이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제는 보릿고개라는 말이 아득한 옛말이 되었을 정도로 먹을거리가 풍족한 시대가 되었다. 어려운 집도 있지만, 예전에 비하면 음식의 풍족함은 지나칠 정도다. 그러다 보니 음식을 대하고도 무덤덤한 경우가 많다. 남들이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음식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정성을 들였겠는가. 내 앞에 놓인 음식을 위해 많은 사람이 씨앗을 뿌리고 기르고 수확하고 요리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식탁에 놓이기까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의 노동과 정성이 들어가는 것이다. 음식을 대하면서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진 적이 얼마나 있을까.

건강하고 맛있게 먹어 준다면 음식을 준비한 사람 역시 흐뭇해할 것이다. 정유길이라고 왜 쥐똥 섞인 밥을 알아차리지 못했겠는가마는, 내 앞에 놓은 음식이 어떠하든 정성스럽게 대하는 마음이 참 아름답다. 이런 사람이라면 세상의 무엇을 대하더라도 남을 배려하고 그들의 값진 노동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품어 줄 것이다. 오늘 내게 놓인 음식을 마주하면서, 그 정성에 값하는 하루를 지냈는지 되돌아본다.
 
 
 
 너를 지켜줄꺼야 (Violin 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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