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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판관기 1장에서 본 일석이조의 함정
작성자이혜원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07 조회수425 추천수9 반대(0) 신고
"一石二鳥"...
"도랑치고 가재잡고."...
"꿩먹고 알먹고"...
매우 실리에 밝거나 계산이 빠를때, 약은 일을 잘할 때 이런 표현을 잘 쓴다. 實利, 實益, 實用....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모세와 그 뒤를 잇는 여호수아의 지도에 따라 이집트탈출과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땅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전쟁여건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계심으로 그들은 승리했고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하느님의 명에 따라 제비를 뽑아 열두지파가 그에 합당한 땅을 상속재산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러면서 그들은 그 땅에 남아있던 민족들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았다. 성경에는 '섞여살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스라엘민족은 왜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여 이민족을 다 몰아내지 않고 그냥 섞여살았을까. 나의 짧은 생각 안에서는 두 가지의 이유를 떠올릴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민족은 정복자로서 토착민족들을 노예로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판관기 1~2장에도 이민족들에게 노역을 시켰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는 어쩌면 여자를 취하는 일에 있어서도 유리했을지 모른다.
둘째는, 이집트 종살이를 거쳐 40년간 광야생활을 해온 민족으로서는, 그 가나안땅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던 토착민족들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착생활에 대한 지혜, 농경생활에 대한 지혜, 해당지역의 기상이나 지리, 식량자원 등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저런 필요에 의해, 즉, '얼마나 좋은가. 노예로도 부릴 수 있고 필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쫓아내지 않고 두면 일석이조이지 않은가..'하는 생각들을 하며 이민족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렇게 매우 약은 듯 보이는 행동은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토착민족들이 정착생활을 더 잘하고 농사도 더 잘짓고 생활력이 더 좋고 하는 것이 그들이 섬기는 신들로 부터 받은 은총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이스라엘민족들이 하게 된 것이다. 그 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느님보다 더 뛰어나 그들에게 이토록 풍요롭고 편안하고 안정된 정착생활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결과 이스라엘민족들은 바알과 아스타롯 등 이방신을 섬기게 되었고 여기저기 목상이나 우상들을 세우게 되었다. 즉 "하느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하느님의 진노를 사 이스라엘 민족은 이민족들로부터 환난을 받게 되고 그때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부르짖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판관들을 내려 보내 주시게 된다.
 
실익, 실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익을 최대화시키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가. 우리는 보통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내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더 현명하게 약게 움직이려고 한다. 점퍼 하나를 사도 이쪽면으로 입으면 파랑색 뒤집어 입으면 검은색이니 두 벌 효과가 있어 일석이조다 라고 한다. 지하철에서 아이디어상품으로 파는 것들 중에 요렇게 하면 뭐고 또 요렇게 하면 뭐다 하면서 광고하는 것을 자주 본다.  하지만 이런 것들 중에는 어느 하나에도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뒤집어 입어서 두 가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점퍼이긴 하지만 그러다 보니 어느 한 면도 온전하지 못하거나 두 면 다 뒤집어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든지, 요렇게 저렇게 모양을 바꾸는 과정에서 견고성이 떨어진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남의 명의를 빌려 다른 일을 또 한다든지, 전방 도로의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까 두 차선에 걸쳐서 운전한다든지.. 짬짜면이라는 메뉴처럼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에서부터 매우 심각한 것까지 많은 모습들이 있다. 요령을 잘 찾아서 약게 사는 것 같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만 멀리 보면, 조금만 크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속된 말로 잔머리 굴리는 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모습이 보이면 그 사람의 영혼의 깊이가 참 얕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 나도 누군가에게든 그런 모습을 분명 들켰을 것이다. "약은 쥐가 밤눈 어둡다."라는 말도 있게 마련인가보다.
 
이스라엘민족들은 하느님의 명에 철저히 순종하여 이민족들을 다 쫓아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피정복자들을 노예로 부릴 생각을  하기 이전에 먼저 그들 스스로 정직한 노동과 아름다운 땀을 흘렸어야 한다. 토착민족들이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삶에 대한 지식을 정복자로서 댓가없이 차지하기 보다는 그들 스스로 찾아갔어야 한다. 정직하고 다소 우직한 방법이긴 하지만 스스로 찾고 노력하고 탐구하고 시행착오도 반복하고 하면서 스스로의 필요를 채워갔어야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겨운 과정이긴 하지만, 찾고 구하고 그러다 실패하기도 하고 또 발견해내기도 하고 하는 과정, 그 자체가 삶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항상 그런 진행형에 놓여있는 게 아닌가. 노예로 써먹을 수도 있고 정보도 얻을 수 있고 하는 일석이조, 실리, 실익, 실용의 계산 뒤에는 자칫 빠지기 쉬운 위험한 함정이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실용이 대세다. 특히 새 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실용"이 아닌가 싶을 만큼 모든 걸 실용으로 풀어간다. 정말 실용이 바람직한 것인가. 무엇을 위한 실용인가. 아니, 그 보다 더 근본적으로, 무엇이 실용인가. 무엇이 실용이 아닌가. 이렇게 정말 실질적인 이익만을 좇아 가는 게 옳은가. 이런 실리 또는 실용의 이면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다른 모습이 있지는 않은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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