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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7-11-14 조회수897 추천수12 반대(0) 신고
 
2007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saved you.
(Lk.17.19)
 
제1독서 지혜서 6,1-11
복음 루카 17,11-19
 
 
오늘의 독서와 복음 듣기





어제 낮 12시에 가게 축성을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유를 가지고서 20분 전에 출발했지요. 사실 우리 성당에서 축성할 가게까지는 차로 1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길이 너무나 막힙니다. 또한 왜 이렇게 신호에 계속 걸리고, 신호도 왜 이렇게 깁니까? 그러면서 차 안에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왜 이렇게 차가 많은 거야? 신호체계는 왜 이 모양 이 꼴이야? 아니 바빠 죽겠는데 끼어드는 저 차는 뭐야?”

결국 축성할 가게에 5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막상 도착을 하니 주차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부정적인 생각이 제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일도 안하나? 평일 낮에 주차할 곳이 없다는 것이 말이 돼?”

그런데 문득 한심한 제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즉, 가게 축성이니 기쁜 마음을 가지고 축하해야 할 자리이지요. 하지만 저는 2~30분 동안 계속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나쁜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바꾸자고 생각했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내가 약속시간에 10분 늦음으로 인해서 약속시간 늦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차보다는 자전거가 약속시간 맞추기가 훨씬 좋으며, 자전거 주차할 곳이 더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안 좋은 일만 계속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께 감사를 드렸을 때 모든 것이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원망이나 미움이 가득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감사야 말로 내가 겪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단 한 명의 나병환자만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는 정말로 자신의 치유를 간절하게 예수님께 외쳤었지요. 당시의 나병환자가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사람들에게 접근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들이 자신의 치유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가를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졌지만,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사는 더 커다란 선물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육체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라는 선물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감사할 일이 없다하더라도 감사하십시오. 입으로만 말해도 괜찮습니다. 더 큰 감사를 드릴수록 주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분명히 감사할 이유는 있으며, 그 이유로 우리는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세요.




사랑이란 이름의 아들(이도환, ‘마음을 밝혀 주는 인생의 지도’ 중에서)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이 다스리는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 그 마을은 사람들 간의 빈부 격차가 매우 심했는데,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게으름뱅이라고 욕했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뱃속에 기름만 잔뜩 낀 비곗덩어리라고 비난하며 서로를 헐뜯었다.

왕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연회가 끝날 무렵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왕자가 볼일이 있어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지내게 되었으니 부디 내 자식을 사랑으로 잘 대해 줄 것을 부탁하노라.”

왕은 마을 사람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자가 몇 살이며 어느 곳에서 누구와 살고 있는지 밝히지 않고 그 마을을 떠났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어느 아이가 왕자인지 몰라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다 보니 어른들끼리도 서로 헐뜯지 않았고 마침내는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마을은 점차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곳으로 변해 갔다.

일 년이 지난 뒤 왕이 다시 그 마을을 방문했을 때 마을 촌장이 말했다.

“왕이시여, 얼굴도 모르는 왕자님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이제 왕자님이 누구인지 밝히시고 궁으로 데리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촌장의 말을 들은 왕은 한바탕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궁궐에 잘 있는 왕자를 또 어디로 데려간다는 말인가? 내가 이곳에 남겨 놓고 간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식일세. 그 자식이 잘 커서 이 마을을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내가 어찌 데려가겠는가!”
 
 
 
 
 
“Ten were cleansed, were they not?
Where are the other nine?
Has none but this foreigner returned to give thanks to God?”
(Lk.17.17-18) 
 
 
 Ronan Hardiman -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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