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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쿠나 마타타 (걱정거리가 없다) (로마 4:1-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17 조회수2,168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하쿠나 마타타 (걱정거리가 없다)

(로마서 4:1-8)

1 우리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2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3 성서에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4 공로가 있는 사람이 받는 보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품삯을 받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5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6 그래서 다윗도 선행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7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8 주께서 죄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

 

예전에 아프리카 케냐 사람이 이런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빨리, 빨리’, 케냐 사람은,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 그 케냐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부터 제일 먼저 배운 말이, ‘빨리, 빨리였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의 입에는, ‘빨리, 빨리란 말이 습관처럼 붙어 있더란 거죠. 음식을 씹으면서, 계산하러 나가는 사람은, 한국 사람밖에 없다 그래요. 그러나 아프리카 케냐 사람들의 입에서는, ‘빨리, 빨리가 아니라, ‘하쿠나 마타타가 습관처럼 튀어나온다고 그래요. 하쿠나 마타타 스와힐리어 구문입니다. 말 그대로 옮기면, 걱정거리가 없다는 뜻이에요. ‘No Problem’. ‘어차피 되어질 일이면 되어질 것이다는 거죠.

재미있는 건, 하쿠나 마타타를 입에 달고 사는 민족이나 국가들이, 전부 가난한 아프리카나, 안와트 같은 남태평양에 사는 가난한 나라들이라는 거예요. 반면에, 문명(文明)이 발전하고, 문명의 혜택(惠澤)을 크게 입고 있는 나라들일수록, 빨리, 빨리’, ‘hurry’를 입에 달고 산다는 거죠. 그래서 가난한 거지라고 속으로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는데!

영국의 신경제재단이, 세계 178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행복지수 순위표를 보면, 하쿠나 마타타를 입에 달고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가난한 나라들이, 상위 순위에 올라 있고, 방글라데쉬가 1위입니다. 빨리, 빨리, hurry’를 외치면서, 분주하게 뭔가 성취하며 살고 있는 강대국들이, 하위권에 랭크(rank)가 되어 있어요. 참고로 세계 178개국 중에, 미국 국민의 행복지수(幸福指數), 150위입니다. 그리고 러시아가 170위예요. 한 때 세계를 양분하여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닌 두 나라가, 최고 꼴찌라니까요. 한국이 102!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희망(希望)이 없을 때는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희망이라는 게 생기자, 인간들이 그 때부터, ‘빨리, 빨리가 어디로 분주(奔走)하게 달리기 시작하더라는 거요. 그리고 그렇게 달리는 만큼, 행복이 떨어져 나가요. 원래 희망(希望)이라는 단어의 자는, 바랄 ()’자죠? 그러나 옛날에는 이 바랄 자와 드물 ()’자를 혼용해서 썼어요. 드물 자는 바로 옆에 벼화가 붙으면, 드물 자거든요. 그래서 희망이라는 건 성취하는 이가 드문 거예요. 희망은요? 그저 희망이에요. 바라는 거죠. 그럼에도 인간이 보다 나은 ’, 보다 나은 미래라는 희망을 향해, 죽어라고 달리고 있는 거요. 로또 한 번 맞아보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그러면서 행복을 잃어가는 거죠.

 

그렇게 아담 안의 모든 인간은, 지금보다 나은, ‘하느님처럼의 삶을 향해 달려요. 발전 없는 인생은, 게으른 인생이 되고, 심지어, 악한 인생으로 평가받아요. 오죽하면 유치원 애들도,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읽고, 그 캐릭터에 대해서 불만을 표출(表出)하더랍니다. 어린 왕자가 자라지도 않고, 성숙해지지도 않고, 힘도 세지지도 않고, 그 상태로 죽는 게 못 마땅한 거예요. 애들이요! 이런 시대가 된 거죠. 인간은 발전(發展)해야 하고, 성숙(成熟)해야 하며, 그러한 발전과 성숙을 에너지로 삼아서, 역사에 기여를 해야 한다는 아담적 사고가, 아이들에게서까지 보이더라는 거요. 그게 바로 인간의 자존심(自尊心)을 세우는 길이고, 그러한 인간의 주체성(主體性), 존재성(存在性) 챙기기에서, 인간의 행복이 찾아올 것이라고 착각(錯覺)을 하는 거요.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지금 그렇잖아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굉장히 행복해질 것 같죠?

그런데 하느님은, 선악과 따먹은 아담들이,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건설하고 있는, 이 역사와 인생의 결국이, 파멸(破滅)! 파괴(破壞)! 불살라짐이라고 말씀하세요. 그 말은, 인간들이 역사를 통해서 건설(建設)해 놓은, 보다 성숙한 인간상과, 보다 발전된 세상이, 결국 하느님의 빛! 아래에서 불살라지도록, 계획이 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말라기 3:19-21) 19 보아라, 이제 풀무불처럼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다가왔다. 그 날이 오면, 멋대로 살던 사람들은 모두 검불처럼 타 버려 뿌리도 가지도 남지 않으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20 그러나 너희는 내 이름 두려운 줄 알고 살았으니, 너희에게는 승리의 태양이 비쳐와 너희의 병을 고쳐 주리라. 외양간에 매여 있던 소가 풀려 뛰어 나오듯, 너희는 밖으로 나와 21 나쁜 자들을 짓밟으리라. 내가 나서는 그 날이 오면, 나쁜 자들은 너희 발바닥에 재처럼 짓밟히리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마지막 때가 되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검불같이 된다는데, 검불라는 단어! ‘코쉬라는 단어가 말라비틀어진 짚이에요. 역사가 역사 내내 건설한 이 집이, 그 나라가, 말라비틀어진 코휘,이라는 건데, 고거 다 태워버리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똑같은 불이 성도에게도 떨어지는데, 그 불은 치료(治療)하는 광선(光線)이 되더라는 거죠. 성도는요, 그 마지막에 떨어지는 불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받게 돼요. 이게 불같은 시험이에요. 베드로가 이야기한 불같은 시험!’ 그래서 그들이 세우고 있는, 육의 집! 역사라는 집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계속 불사름을 당해요. 이걸 고난(苦難)’이라 그래요.

그렇게 말라비틀어진 역사라는 집과, 자아라는 집이, 그의 인생 속에서 불태워진 자들에게는, 이걸 자기부인(自己否認)이라고 해요. 인생 속에서 불태워진 자들에게는, 마지막에 내려오는 성령(聖靈)의 불이, 치료하는 광선! 즉 그들을 성도로 완성하는 광선이 될 것이지만, 왜냐하면? 그게 다 타요. 고린도서에 나오는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이 그거란 말이에요. 공력을 다 태워 버리고, 예수라는 기초와 예수라는 집만 남긴다는 게, 바로 그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그 불이 내려와서 완성시키는 거예요. 완성!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 빨리, 빨리를 외치면서, 전혀 누군가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의 나라, 육의 나라, 세상 나라를 열심히 건설한 건축자(建築者)들은, 그 나라와 함께, 영원히 불타게 된다는 말이에요.

(베드로후서 3:7) 7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느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심판(審判)과 멸망(滅亡)의 날까지 이 세상이 보존되어 있어요. 무엇에 의해? 말씀에 의해서! 그런데 그 심판과 멸망의 날에, 뭐 하기 위해서, 간수(看守)해 두신데요? 불사르기 위해서! 그러면 첫 창조(創造)라는 건, 불사름을 목적으로 창조가 된 거죠? 하느님이 바보예요? 불태울 걸 왜 만드시냐 말이에요? 거기에서 성도에게, 뭔가 가르치실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옛 하늘과 옛 땅은, 그것을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被造物)의 역사를 포함하는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태초에, 이 천지는 불사르기 위해 창조가 된 거예요. 이 역사는, 불살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지금 그렇다면 왜 불살라버릴 걸 창조하셔서, 왜 당신의 백성들을 넣으시는가?

(시편 28:4-5) 4 그들의 행실 따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 따라, 그들의 소행 따라 마땅히 갚으소서. 5 야훼께서 하신 일, 손수하신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짓부수어 주소서!

요걸 알게 하기 위해, 불태워버릴 첫 창조를 창조해 놓고, 결국 마지막까지 열심히, 뭘 하게 만들어요. 그 다음에 하느님나라를 옆에다가 딱 세워버리는 거죠. 그러면 아방궁(阿房宮) 옆에 개미집 같은 것이 생기는 거예요.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것이! 이걸 불사른다 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무슨 영화처럼 불타는 게 아니라! 이게 불사른다는 이야기예요. 빛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하느님은 이 역사 내내, 인간들의 자가발전을 허락하세요. 어디까지 쌓아 올리나 보시겠다는 거죠. 하는데 까지 해 보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당신의 건축물! 하느님의 성전(聖殿)이에요. 그것이! 인간들은 자기들이 왕이 되어, 자기들이 거할 자기들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하느님이 하느님의 성전을 건축해서, 그 옆에다 꽝하고 세워버리는 거예요. 어떤 게 천국인가 보라는 거예요. 그렇게 이 역사는, 인간들의 나라는, 하느님나라 앞에서 민망(憫惘)하고 무색(無色)해지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진정한, 행복이 나오는 거고, 진정한 순종(順從)과 연합(聯合)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죽어라고 열심히 했는데, 역사 내내 열심히 했는데, ‘아니네!’를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역사가 존재하는 거요. 불살라지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같은 로마서에서, 하느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간의 열심을, ‘자기 의()’라고, 못을 박는 거예요.

(로마서 10:2-3) 2 나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열성만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바른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3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가 바로 죄의 본질(本質)이에요. 열심히 뭔가를 하는데, 인간들이 인간들을 위해서, 인간들의 가능성(可能性)과 능력(能力)을 드러내기 위하는 열심! 이게 자기 의()’거든요? 그게 죄()예요.

라는 건, 원래 없음이었던 자들이, 하느님이라는 존재 이외에는 존재가 없었으니까. 여러분들은 진화론자가 아니죠? 그러니까 하느님이 창조하시기 전에는, ‘없음이란 말이에요. 다 하느님 밖, 예수 밖, 모든 게 없음인데, 없음이었던 자들이 있음의 흉내를 내면서, 자신을 있게 하신 이의 은혜(恩惠)와 공로를, 찬송(讚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모든 게, ()예요. 단순히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사회법으로 금한 어떤 걸 하는 게 죄가 아니라, 제발 좀 알아먹으시란 말이에요. 죄는, ‘없음이란 자들이, ‘있음의 흉내를 내는 고게, 죄란 말입니다.

원래의 자기 처음 자리를 잊고, 아니 생각하지도 않고, 원래 자기는 있음이라고 우기는 것! 요게 마귀란 말예요. 그건 바로 란 말입니다. ! 그러한 오해(誤解)에서는, 반드시 자기 주체성 확립(確立)이라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자기 주체성 확립의 과정에서, ‘,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이야라고, 자존심을 챙겨 가면서, 고게 행복이라며 착각하고 사는 게, 역사예요. 우리는 그렇게 살았잖아요? 나를 증명(證明)하는 게 행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죽어라고 돈 버는 거죠. 그걸 벌어서 하루 네 끼 먹는 사람 있어요? 다섯 끼 먹은 사람? 난 재벌 회장들의 일과를 보면서,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있나? 하루 세 끼 중에, 두 끼를 차 안에서 먹더라고요. 그렇게 하려면 뭐 하러 그 것 해요? ‘자랑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이 어디 가면 굉장히 부러워 해 준다고, 착각(錯覺)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무리들은, ‘빨리, 빨리를 삶의 모토(motto)로 해서, 역사 속 바벨탑을 쌓으며, 스스로의 복을 찾아가고 있는데, 하느님나라의 백성들은, ‘하쿠나 마타타하면서,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요. 그분이 끌고 가시는 곳으로 나는 반드시 갈 거니까! ‘하쿠나 마타타’, ‘될대로 되라’, ‘케세라 세라’, ‘어떻게든 되겠지!’

이게 하느님이 끌고 가시는 데에, 내 몸을 맡긴다는 뜻이에요. 하느님이 끌고 가시는, 그 이끌리는 삶에, 나를 맡긴다는 뜻이에요. 그게 하쿠나 마타타’ ‘No Problem.’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내 가치를 챙기려고 하지 않아도, 하느님이 이미 묵시(黙示) 속에 완성해 놓았기 때문에, ‘No Problem.’ 내가 조금 실수하고, 실패(失敗)해도 괜찮다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옆에 달린 강도에게 그랬잖아요? ‘주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 좀 기억해 주세요!’ 그랬을 때, 강도가 얼마나 면목 없겠어요? 죽을 때까지 강도짓만 했는데, 그 때,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니까요. ‘No Problem,’ ‘하쿠나 마타타.’ 그랬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 6절 이하를 보면, 바울로가, 사람의 참된 행복을 이렇게 정의를 해요.

(로마서 4: 6-8) 6 그래서 다윗도 선행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7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8 주께서 죄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복은, ‘빨리, 빨리, hurry up’ 하면서, 자아 성취(成就)와 자아 주체성 확립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쿠나 마타타하면서, ‘하느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서, 일한 것이 없이, 하느님께, ()로 여기심을 받는 게 행복이다.’ 그래요. 세상 나라, 자아라는 나라의 건축을 멈추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느님나라를 덧입는 게, 행복이라 그래요.

건축자들은 항상 예수라는 모퉁이 돌을 울타리 밖으로 집어 던지죠? 그거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아담무리들은, 행복의 정의(定義), 완전히 잘못 내리고 있는 거예요. 행복은, 인간이 노력하고 발전시키고, 성취하여 얻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빈 그릇이 되어서,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넙죽 받아 챙기는 거. 이걸 행복이라 그래요.

이 구절은, 다윗의 시(), 시편 32편을 인용한 구절인데요, 다윗은 충신 우리야의 아내를 겁탈(劫奪)해서 임신을 시켜놓고, 그 사실이 탄로가 날까봐, 사람을 시켜서, 우리야를 교살(絞殺)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단을 시켜서, 그 실체를 보게 만들었죠. 다윗이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되었어요. 그 전까지의 다윗의 자의식(自意識), 원수를 두 번이나 살려준 사람! 아무도 대항하지 못한 골리앗을 물맷돌 5개로 물리친 용감한 사람! 이게 다윗의 자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의 실체를 그냥 폭로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껍데기를 확 벗겨 봤더니, 자신은 말할 수 없이 추악(醜惡)한 죄인이더라는 거예요.

돌이킬 수가 없어요. 부정해진 밧세바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을 능력도 없고, 이미 저질러졌어요. 죽은 우리야를 살려낼 방법도 없어요. 어떻게 해야 돼요, 그러면? 큰일 났네, 일은 벌어졌네. 그 때 유일한 방법이, 하느님이 덮어주는 거예요. 가려 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시편 32편은! 나단이 와서, 다윗의 죄를 확 폭로(暴露)한 다음에, ‘그런데, 하느님이 용서해 주신답니다.’까지 이야기했어요. ‘이게 뭔 일이냐!’ 그걸 듣고 쓴 시가 32편입니다.

본문7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두신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러죠. 거기에서 덮어주시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에피칼립토예요. 그 단어는, ‘덮다, 숨기다라는 뜻이죠. 바울로는 의도적으로 아피칼립토란 단어와, 바로 그 앞에, ‘용서해주다’, ‘아피헤미를 동의어로 채택하여 쓰고 있어요. 7절을 잘 보면! 그러니까 죄를 용서받는다는 건, 그가 지은 죄가 다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물론 그거는 묵시 속에서 완료될 성도의 현실이에요.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죄를 용서 받는다는 게, 여전히 죄만 생산해내는 나를, 하느님께서 가리고 덮는다가, 용서받은 죄인이에요.

여러분은 지금 이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데, 성경은, 여러분을 의인이라 그러죠. 그런데 여러분이 의인이 된 게 아니라, 다윗은, 이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지었어요. 마지막에는 더러운 배설물처럼 살다 갔어요. 그런데 다윗이 안 거예요. 하느님이 덮으시면 된다. 안 거예요. 그래서 바로 밑에 있는 본문 8절로 가면, ‘8 주께서 죄없다고 인정해 주시는 사람도 행복하다.' 라고 하는 거요. 거기서 인정(認定)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로기조마이,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을 기록할 때 사용되는 단어예요. 차변과 대변을 기록하는데, 차변에는, 수입을 기록하고, 대변에는, 지출을 기록해요.

하느님의 장부 차변에는, 우리의 선과 의가 기록이 되고, 대변에는 우리의 죄가 기록이 된다고 가정(假定)해 보자고요. 성경이 의인은 하나도 없다,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했으니까, 당연히 차변에는 기록될 게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대차대조표의 대변에는? 칸이 모자라죠? 로마서 118절부터 320절까지, 그 전체 내용이 다 들어가야 돼요. 그거 우리 거거든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대차대조표의 대변 항목을, 하나도 기입하시지 않는다.’ 이게 로기조마이예요. 죄가 없어서가 아녜요. 수많은 항목이 있어요. 여러분은 앞으로도 거기에, 대변에 적힐 수많은 일들을 할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 적으신다. 이게 메 로기세타예요.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 죄를 대변 항목에 안 적으신다.’라는 뜻이에요. 없는 게 아니란 말예요. 안 적으시는 거예요. 이게 덮으심이에요. 그래서 복음이라는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버린 거예요. 그것을 경험하고 실감하는 게, 역사이며, 인생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쏟아내고, 자신의 영광과 가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하느님께서, ‘끝까지의 사랑!’ 끝까지의 사랑으로, 계속 우리의 발을 씻기고 계시는 거예요. 매 순간 당신의 피로 우리를 덮어버리시는 거요.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예수의 피와 ,십자가의 필연성(必然性)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6절과 8절에도, 똑같은 로기조마이,’ ‘여기심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거예요. 다시 6절로 가보세요. 오늘은 제가, 밑에서부터 올라가며 설명해 드리고 있어요.

6 그래서 다윗도 선행과는 관계없이 하느님께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읊었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느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이란 어구에서, ‘여기심을 받다라는 단어가, 똑같은 로기조마이예요. 하느님께서 하늘의 대차대조표의 차변 항목에, 전혀 기록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도 없고, 생각하는 자도 없다.’ 그랬으니까, 차변 항목에 전혀 들어갈 게 없는데, 당신이 준비하신 ()’, 차변 항목에 로기조마이,’ ‘임퓨트(impute)’하신다는 거예요. 그걸 바울로가 행복이라고 표현하는 거고. 그러한 복된 소식을, 우리는 복음(福音)’이라 하는 거예요. 그게 안 좋으면 할 수 없는 거고.

그걸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자신의 실체 파악(把握)이 먼저 되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구나!’라는 이 실체 파악! 자아 인식! 그런데 인간들이 그걸 안 하는 거예요. 심지어 교회라는 사람들도, 말씀 앞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실체를, 애써 외면(外面)하려고 하지, ‘제가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라는 고백(告白)을 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한 하느님의 전가가 실제로 효력(效力)을 발휘한다는 걸 인정하고 수긍(首肯)하는 걸, ‘믿음이라 그래요. 물론 그 믿음은, 하느님의 믿음에서 격발(激發)되는 우리의 주관적 믿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한 것이 없이예요. 일한 것이 없이! 본문 4절과 5절을 보세요.

(로마서 4: 4-5) 4 공로가 있는 사람이 받는 보수는 자기가 마땅히 받을 품삯을 받는 것이지 결코 선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5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구절을, 조금 더 원어에 맞게 제가 풀어서 번역(飜譯)해 볼게요.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받는 품삯을 은혜로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당연한 보수(報酬)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심판대 앞에서, 염소들이 그러죠?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일 했으니까 달라는 거예요.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5,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요게 이거예요. ‘나는 흙이었어요. 그냥 흙이었는데, 먼지였는데, 하느님이, ‘너 의롭다, 존재 되라!’ 창조의 말씀이 떨어져서, 창조물이 되었을 때, 이걸 맞아요. 그렇게 된 거죠!’ 인정하는 것! 요게 일한 것이 없이예요.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제발 그렇게, 그냥 유아적으로 생각 좀 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인간들은 절대로, 자기가 한 일을 들고,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못하는 족속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한 일이라고는, 죄지은 거 밖에 없다는 걸 아는데, 하느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하늘 소망(所望)을 품게 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자들은, 하느님의 주()되심과,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만을 찬송하게 되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의롭다한다 말이에요. ‘()’가 뭐라고 했어요? 디카이오수네!’ ‘짜다크!’ 라 그랬죠.

나는 아무런 공로도 없고, 일한 것도 없습니다. 내가 죄인 중에 죄인 맞습니다. 더스트(dust) 맞습니다. 먼지가 맞습니다. 먼지가 무슨 선한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그 만을 꼭 붙드는 자! 믿는 자! 그가 의롭다여김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4, 5절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때나, 신약 때나, 율법(律法)이 있기 전이나, 율법이 주어진 이후나,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다 은혜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게, 로마서 전체의 진술(陳述)이에요. 잘 보면, 로마서 117! 이게 코어 키(core key)’예요. 로마서 전체의 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이게 로마서 전체의 핵심 열쇠(core key)이고, 그걸 중심으로, 그 이야기를 죽 설명해내는 게 로마서예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율법 있는 자건, 율법 없는 자건, 전부 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래서 하박국의 그 말씀을 들어서, 바울로가 계속 반복하여 설명(說明)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뭐가 잘 나서가 아니라, 율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서가 아니라, 착하게 살아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로마서3,25)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여기서 과거에 지은 죄, 십자가(十字架) 이전의 구약 세대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어떤 개인의 예전에 지은 죄가 아니라, 원어로 보면, 이게 십자가 서기 이전의 그 모든 죄()! 그리고 그 이후의, 26절에 지금 이시대에는, 오늘날에 와서는라고 나오죠? 그때에도, 이때에도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화목제물(和睦祭物)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다를 설명한다 말이에요. 거기에 대한 확실한 예가 율법 이전시대 사람인 아브라함이죠? 또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거예요. 또 아브라함? 지겨워요. 이제 아주!

(로마서4,1-3) 1 우리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2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3 성서에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도는 로마서 321절부터 31절까지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의롭게 되는 길은, 하느님이 준비하신 또 다른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웅변(雄辯)하죠? 그리고는 그런즉하고 41절을 시작하는 거요. ‘그런즉!’ 거기에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예()로 등장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하느님의 의 이야기여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첫 구절부터 원색적(原色的)이며 강력해요. 유대인의 조상인데, 아브라함이 그의 육신으로 얻어낸 게 뭐가 있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祖上)이 되고, ‘()’의 조상이 된 것에, 아브라함이 그의 육신으로 보탠 게 뭐냐? 이런 뜻이에요. 육신으로서의 아브라함은, ‘쓰레기다라고 선언(宣言)해 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게 아니라, 하느님이 선물(膳物)해 주신, ‘믿음으로의롭게 되었다는 거예요. 여기에도 인정해 주셨다,’ ‘로기조마이가 나와요. 아브라함이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마누라 팔아먹고, 애굽으로 도망가고, 그러는데, 하느님이 로기조마이여겨주시는 거죠. 차변 항목에, 아브라함의 인생의 차변 항목에, 하느님이 를 죽 기입(記入)해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대변 항목을, 하느님이 싹 지우개로 지우더니, 차변 항목에다가, 그는 파라오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陵辱)을 받는 걸,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낫게 여기고. 언제 그랬냐고요? 그런데 하느님이 차변 항목에, 자기가 기록해 주시는 거예요. 이게 여겨주신다예요. ‘로기조마이’. 이걸 구원이라 한다 말이에요. 이게 덮으심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처럼, 각기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창세기 26장으로 가 보세요. 거기엔 또 다른 말이 나와요. 지금 바울로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한 게 뭐가 있느냐? ‘아브라함은 쓰레기다!’ 그러는데, 하느님은 다른 말을 하세요.

(창세기 26:4-5) 4 그리고 네 자손을 하늘에 있는 별만큼 불어나게 하여 그들에게 이 모든 지방을 주리라. 땅 위의 모든 민족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따라 내가 지키라고 일러 준 나의 계명과 규정과 훈계를 성심껏 지킨 덕이다.

바울로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뭐 한 게 있느냐 하는데, 하느님은 계명과 규정과 훈계를 지켰다 그래요. 누구 말이 맞아요? 여기에 계명과 규정과 훈계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토라, 후카, 미스바는 다 율법을 가리키는 단어예요. 아브라함 때 율법이 주어졌어요? 헷갈리죠, 아브라함, 모세, 다윗 어떤 시대 사람인지? 이거 다 율법이란 뜻인데, 아브라함 때 율법이 주어졌어요? 아브라함은 BC 2000년 사람이에요. 율법은 시나이 산, BC 1500년 무렵에, 모세에게 주어진 거란 말이에요. 그럼 이때는 율법도 없었는데, 하느님이 내 아들,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그래요. 아브라함에게만 몰래 살짝 율법을 줬는데, 아브라함이 그거 다 지킨 거예요? 여러분 율법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메시야에 관한 하느님의 창세전 약속이에요. ‘그래서 너희에게 메시야가 필요하단다!’ 이게 율법이 가리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걸 믿었다는 거예요. 이게 율법을 지켰다.’예요.

율법이 의미하고 상징(象徵)하는 게 따로 있었는데, 그 진의를 알아들은 걸, 율법을 지켰다라고 하지, 그런 어떤 구체적 세목 몇 개를 지키고, 안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에요.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하여, 왜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살려야 되는지를 알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이사악에게 찾아가서 똑같은 일을 행하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또 야곱에게 찾아가서 똑같은 일을 행하시고, 그리고는 여러분의 인생에 찾아오셔서, 또 똑같은 일을 행하시는 거예요. 왜 예수가 와서 너를 구원해 줘야 되는 줄 알아?, 이렇게! ‘왜 죽어야 되는지 아니?’ 이렇게!

 

아담과 하와는 죄가 없었는데,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천국은 죄가 없어서 가는 게 아니라, ‘가 덧입혀져야 가는 곳이란 말이에요. 그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지, 뭐 아담과 하와가 왜 지옥가요? 천국 갔어요. 알아들었다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산 자의 어미라고 이름을 지은 거 아녜요? ‘산다! 우리는.’ 그래서 신약에서도, 계명을 지킨다, 율법을 지킨다, 말씀을 지킨다. 요런 개념과, 예수를 믿는다는 개념을 같은 걸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일서 322절로 가보세요.

(1요한 3:22-24) 22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3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2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명을 지키는 게 예수를 믿는 거라 그러잖아요? 예수를 믿는 게,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 이름 앞에서 자신들의 처음 자리를 확인(確認)하여, 다른 이들을 외모(外貌)로 판단(判斷)하지 않는, 다른 말로, 사랑하는, 다른 이를 외모로 판단하는 거, 이게 미워하는 거예요. 그런데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당신이나 저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 아니면, 다 그냥 쓰레기이며, 죽은 흙에 불과합니다. 이걸 인정하면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걸, ‘사랑이라 그래요. 그게 바로 계명을 지키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지킨다, 말씀대로 산다는 말의 의미는, 성경(聖經)에 나오는 하라, 하지마라의 명령(命令)을 잘 분별하여 지켜내고, 수행한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하라, 하지마라의 명령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도 똑같이 나오고, 불경(佛經)에도 똑같이 나와요. 그러면 그 사람들도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대로 사는 게 뭔지, 잘 생각해 보세요. 그게 아니라, 말씀이신 예수를 아는 거예요. 말씀이신 예수가 창조해 나가는, 새 창조의 과정(過程)에 들어가 있는 그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말씀에 의해 끌려가는 거, 새 창조의 자리로,‘

 

말씀을 지킨다는 건, 그 말씀을 내가 장악(掌握)하여, 사유(私有)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야 지키죠? 그런데 하느님이신 말씀이, 어떻게 우리 같은 인간에게 장악이 됩니까? 포착(捕捉)이 돼요? 말씀이 우리를 포착하고 장악하여, 당신이 이끄는 곳으로 끌고 가죠. 이걸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디서 어줍지 않은 도덕, 윤리의 수준을 갖고 끌고 들어와서, 교회에서, ‘왜 말씀대로 안 사느냐고?’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들 말씀이 뭔지는 아느냐고? 말씀에 대한 정의, 죄에 대한 정의, 구원에 대한 정의, 죄인에 대한 정의, 이런 것도 하나도 세워지지 않은 인간들이, 어줍지 않게 훈계(訓戒)하고 돌아다녀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그려내는 하느님이에요. 그래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분이 하느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배우고, 예수를 의지하고, 예수를 의존(依存)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하느님을 보면 되는 거예요. 그 말씀을 하나하나 지켜내는, 그 세목을 지켜내는 게, 우리의 본무(本務)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율법과 계명을 지켜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복을 받았다는 창세기의 말은, 그의 처음 자리를 자각(自覺)하고, ‘! 나는 이런 인간이구나!’ 이렇게, 처음 자리를 자각하고, 하느님이 선물해 주신 믿음에 의해서, 자신을 완전히 부인당하고, 오직 어린 양 예수만 믿는 자가 되어, 의롭게 되었다는 그런 말인 거예요.

, 이제 왜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구원 받은 대표적(代表的) 인물(人物)이 아브라함으로 등장하는데,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으로 구원 받은 이의 대표로, 아브라함이 동일하게 등장(登場)하는지 아시겠죠? 루터가 잘못 본 거예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 아닙니다. 로마서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 하는 행함은, 믿음이 격발해내는, 자기부인인 것이지, ‘우린 아니구나!’라는 이런 자기 부인인 것이지,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도 열심을 부려서 행할 수 있는 도덕적, 윤리적 착한 행위 정도가 아니란 말이에요. 성도에게 요구되는 행함은,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이,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행함(行爲)이어야 돼요. 그래야 믿음으로 하는 행함일 거 아녜요?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믿음과 행함은 뗄래야 뗄 수 없다면서요. 야고보가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행함만, 성경이 요구하는 행함이잖아요? 그런데 믿음이 없이도 할 수 있는 그 행함은, 성경이 요구하는 행함이 아니란 말이에요. 믿음으로만 나오는 행함! 그게 뭐냔 말예요? , 야고보서로 가서, 야고보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그 행함이 뭔가 한 번 보자고요.

(야고보서 2:17-24) 17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지만 나에게는 행동이 있소. 나는 내 행동으로 내 믿음을 보여 줄 테니 당신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오. 19 당신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20 이 어리석은 사람이여,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 입니다. 23 이렇게 해서 '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 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24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았대요. 바울로와 야고보가 싸우고 있는 것 같죠, 마치? 어떤 토론의 석상에서! 바울로는 아니다. 무슨 행함이냐?’ 야고보는 행함이다!’ 그러잖아요? 그래놓고, 아브라함의 예를 드는데, 아브라함이 무얼 했느냐? 아들을 바치지 않았느냐? 그래요. 그래서 혹자(或者)들은 자식을 바쳐야 된다. 자식까지도 바칠 수 있는 헌신(獻身)을 해야 행함이다! 그래요. 오늘 맏아들 다 잡을까요, 오늘 그냥? (하하하하) 그건 몰렉에게 제사지내던, 우상숭배(偶像崇拜)자들이 했던 일이에요. 맏아들 잡아서, 자기 복을 구했다니까요. 행한 거예요, 그거? 맏아들 잡았잖아요? 신에게. 몰렉이라그러니까. 어디 딴 곳에 가서, 우상 섬겼는 줄 아시는데, 성전 안에 그 제단이 있었다 말입니다.

여러분. 이 야고보서의 시작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야고보서 2:1)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여기서부터 오는게, 믿음과 행함의 이야기예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예수를 믿은 믿음을 받은 자들아, 선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니,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누가 잘 나고, 누가 못 나고가 어디 있니? 그런데 믿음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다른 이들의 됨됨이나, 성숙의 정도나, 성취의 정도! 이런 걸 갖고, 저 사람은 신앙(信仰)이 좋은 사람! 저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 이 사람은 부자니까 축복 받은 사람! 구약 때는 부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여겨졌거든요, 이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 받은 사람! 저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詛呪) 받은 사람! 어떻게 그렇게 판단을 할 수가 있니? 여기부터 시작하는 거요.

지금 야고보가,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어, 강조하고자 하는 행함은,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서, 믿음을 선물 받은 자들이, 그 자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겉으로 나타난 증상(症狀)만 갖고, 사람들을 판단하는, 못된 행위들을 지적(指摘)해내는 거요. 그래서 갑자기 귀신이 등장하는 거예요. 귀신이 가진 믿음! 귀신들도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이 한 분이신 줄도 안대요. 그리고 그 앞에서 두렵고 떤대요. ‘귀신들도 두려워 떱니다.’

그러면 적어도 귀신들이 우리 믿음보다 나은 거죠? 여러분, 하느님의 이름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떨어본 적이 몇 번이니 있어요? 귀신들은 계속 두렵고 떨어요. 우린 귀신보다 못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뭘 하겠다는 거요, 귀신들은, 적어도 하느님이 언제 오는 지도 알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떨어야 하는 존재라는 걸 알아요. 인간들만 몰라요. 성도(聖徒)라고 하는 인간들만 몰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아 되느냐고요? 덮어야죠!

그런데 귀신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게 있어요. 귀신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아요. 원래 마귀, 사탄, 귀신! 이건 예요. 마귀, 사탄, 귀신이란 존재가, 하느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도, ‘있음의 흉내를 내려고 하는 모든 존재의, 악마적 속성의 총합(總合)으로 상징적(象徵的)으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짜 그 존재가 있긴 있지만. 그걸 모형하여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귀신은 절대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아요. ? 나도 내 주체성과, 존재성을 챙기겠다고 튀어나온 게, 마귀거든요. 고걸 설명하기 위해, 자기자리를 이탈한 루시퍼가 등장한 거니까! 절대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지 않아요. 귀신은!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홀려낸, 신앙지상주의 빌리비즘(Believism)이 바로 그러한 거예요. 지옥 가기 싫어서, 천국 가고 싶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그분의 은혜와 자비 앞에서, 완전히 빈 그릇이 되는 건, 자존심이 상해서 싫다는 거예요. 천국은 가고 싶어요. 그런데 내가 주인공인 천국이어야 돼. 지옥 가기 싫어요. 역시 내가 주인공이에요.

자비라는 히브리어와, 어머니의 자궁(子宮)이라는 히브리어가, 그 어근이 같다고 그랬어요. 옛날에는 혼용해서 같이 썼어요. 긍휼이라는 건, 어머니 자궁 속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탯줄에 연결이 되어서, 어머니 절대 의존적 존재를 살아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존재일 수 없고, 생명일 수 없음을, 깨닫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생명을, 긍휼(자비)이라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의 존재성과 주체성을 챙겨서, 하느님 앞에서 그 탯줄을 제거하고, 홀로 있음의 흉내를 내는 고깃덩어리! 이거 유산(流産)된 거예요. 이거는요! 그 마귀의 세력은, 절대로 그 자비를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난 홀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이미 고깃덩어리예요. 뿌리 뽑힌 풀! 나무와 똑같은 거예요. 살아는 있지만 죽은 거예요. 사망으로 가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헌금(獻金), 선행(善行), 구제(救濟), 기도(祈禱), 전도(傳道), 예배(禮拜)할 수 있어요. 이거 다 불교에도 있는 거예요. 이슬람교에도 다 있는 거예요. 우리보다 헌금 더 많이 하고, 우리 보다 기도 더 많이 합니다. 그들을 포탄, 박격포 탄이 날아와도 하루 다섯 번씩 꼭 기도해요.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는 왜 못해!’라고 지적(指摘)을 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걸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녜요. 어떤 일을 하든 그 속에서 자비를 구하느냐, 하느님의 그 탯줄, 나에게 꽂혀 있는, 하느님의 생명선(生命線)이 떨어져 나가면, 난 죽는다는, 이 자각(自覺)이 있느냐, 없느냐, 이게 문제란 말이에요. 그러면 죄인 됨의 자각(自覺)이 맨 먼저 있어야 되는데, 이게 없단 말이에요. 이게! 여러분 예수 왜 믿으세요? 천국 가려고 믿으세요? 아니면 병 걸릴까봐? 마음의 평안(平安)을 위해서? 잘 생각하세요. 내 천국, 내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예수 믿는 게, 잘하는 걸로 알고 있었죠? 그건 예수님을 모독(冒瀆)하는 거예요. 여러분! 천국, 구원 이런 거 없으면, 쓰레기 되는 거예요. 이게 좋은 믿음이에요? 여러분은 그 예수를 사랑하는 분이에요? 그 예수와 함께라면 초가삼간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면서. 이거는 그냥 립서비스(lip service)입니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처음 자리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그걸 자각하는 게, 성도의 본무라는 걸,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은, 예수가 믿게 하셔서 믿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자기 자식의 심장에 칼을 꽃을 수 있었던 건, 하느님의 언약(言約), 제가 도와준다고 성취되는 게 아니네요. 얘가, 여기서 죽어도, 하느님은 내 후손(後孫)을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게 만드실 걸 저는 이제 믿습니다. 제가 안 도와드려도 되네요!’ 그전에는 도와드렸잖아요? 내가 죽으면 안 되니까! 그 언약이 성취 안 되니까, 와이프도 팔아먹고, 애굽으로 도망도 가고, 내가 살아야 되니까. 그랬는데 모리아산에까지 가보니까 하느님의 언약은 하느님이 성취하시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죽여!’하면, 죽이는 거예요. ‘난 몰라요. 어차피 살려내시든지, 아니면 딴 놈을 데려다가 또 만드시겠죠.’ 자기부인의 자리지, 거기는! 나는 내 아들까지도 바쳤습니다가, 행함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해가 가세요? 라합? 마찬가지예요. 내가 속해 있던 나라를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그 이스라엘에게 팔아먹어 버리는 거예요. 이 나라 아니구나. 난 저 나라에 속해야 사는 구나!’라고 내 인생 전체를 팔아버리는 거예요. 이게 라합이에요. 그래서 야고보서의 행함이, 아브라함과 라합으로 등장하는 거지, 그 사람들이 행한 행함을 본받아서 하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고걸 본받는 자들이 우상 섬기는 자요. 몰렉에게 아들 바치는 자!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에게 아들을 바쳐서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날 찾아와서 자기 아들을 나에게 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야고보서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 누가 친구라 그래요? 예수님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가 친구라 그래요. 우리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의 친구가 된 거란 말이에요. 그 이야기예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런데 전부, 자기들이 뭘 해서, 예수님께 가겠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은 거예요. 하느님 앞에서 없음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우리는요. 결국에는! 그게 자비를 구하는 자, 어머니의 탯줄의 소중함을 아는 자. ‘이거 끊어지면 안 되는구나!’ 끊어지면 유산(流産)되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로가, ‘, 무슨 행함이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거야그랬다가, 다른 곳에서는 , 이 새끼들아 어떻게 그렇게 사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말을 들으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로가요, ?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디서는 고린도교회 같은 곳에 편지한 거 보세요. , 이 도둑놈들아, 너희들이 예수 믿고 어떻게 그렇게 사냐?’ 다른 곳에서는 , 자유해.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거야!’ 이런 모순(矛盾)되는 설교(說敎)를 저만 하는 게 아니라, 사도 바울로, 성경이 했단 말입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그렇게 설교하다가 가셨다니까요. 뭐예요? 어떤 일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백성(百姓)은 예수의 자비를 붙들게 되어 있는 거예요. ‘, 이 도둑놈의 새끼들아!’ 그러면 맞습니다.’로 가게 되는 거고. ‘구원은 예수 믿는 믿음으로 얻는 거야.’ 그러면 그렇죠. 제가 이 모양이니까, 예수의 자비로 저는 구원받는 거죠.’ 어떤 설교를 해도, 예수의 자비로 가게 되어 있어요. 뭐가 옳은 설교고, 뭐가 그른 설교라고, 그 사람이 진짜 예수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함부로 판단(判斷)하면 안 되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예수를 붙드는 가를 봐야지.

그래서 초대 교회 사람들이, 하느님의 복음(福音)을 알게 되고, 성령이 임하자, 자기 걸 다 내놓아 버린 거예요. 헌금정도가 아니라, 십일조 정도가 아니라, 재산 전부를 내놓은 거예요. ‘아 역사는, 우리의 행복과 구원에 전혀 기여(寄與)가 안 되는 구나!’하고 버린 거예요. 그건요, 착한 일을 한 게 아니라. 만일 성령 받은 자들은 전부 그렇게 살게 된다면, 그게 지속적으로 이어졌어야 돼요. 그런데 안 이어졌어요, 여러분! 성령 받은 자들은 전부 그렇게 산다가 아니라, 하느님나라가 그런 나라인데, 그러한 모습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지향성(指向性)으로 나타나고, 문득 문득 하느님의 은혜와 우리의 이 접촉점이 형성될 때 나타날 텐데, 그 때 , 우리가 요리로 가는구나!’를 알라는 거예요. 집 팔아서 헌금하고 같이 모여 살라가 아니라니까요.

 

보세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 이야기가 창세기 15장이라 그랬죠? 그 창세기 15장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아세요? 그 믿음과 ()’의 이야기! 지금 사도 바울로가 로마서 4장에 인용해 쓰잖아요, 지금? 어떻게 시작 되죠? 아브라함이 무서워하더라.’에서 시작 돼요.

(창세기 15:1, 6)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야훼께서 환상으로 나타나시어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 주며, 매우 큰 상을 너에게 내리리라.' 6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

요 이야기거든요. 아브라함이 뭘 무서워하고 있었을까요? 이때에. 그런데 이 무서워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뭘 보고, 도대체 너는 의롭다, 넌 믿음이 있다했을까요? 요 때는, 아브라함 네 개국 연합군(聯合軍)318명을 데리고 가서 완전히 박살내고, 개선행진(凱旋行進)한 바로 그 다음이에요. 마치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 800명을 다 참수(斬首)해 버리고, 로뎀 나무에 머리 박고, ‘나 좀 살려주세요. 아니 무서워요, 죽여주세요.’ 했던 엘리야와 똑같은 모습이에요. 이겼어요. 318명을 데리고 가서 이겼는데, 금방 무서워 떠는 쓰레기가 되어 있는 거예요. . 하느님이 함께 하셔서 이긴 거라고 멜기세덱이 이야기까지 해 주었는데, 그러면 다시 그 4개국 연합군이 쳐들어와도,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이길 거 아녜요? 그런데 또 믿음 없는 아브라함이 되어 있는 거예요. 무서워 떨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오셔서, ‘내가 네 방패(防牌)!’ 무슨 말이죠? 방패는 공격을 가리는 거예요. 감추어주는 거예요. 당신의 백성을! ‘내가 네 방패야! 걱정하지 마. 너는 이런 사람 맞아. 맞아! 그러나 내가 네 방패란다.’ 그래놓고는 너는 의롭다!’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 맞네요. 금방 제가 하느님의 도움으로 4개국 연합군을 이기고 왔고, 멜기세덱이, 이거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이기게 한 거라고, 얘기를 했는데도, 저는 여전히 덜덜덜덜 떨고 있는 이런 인간인데, 하느님이 덮으시다니, 하느님 도와주세요.’ 요걸 ()’라고 한다니까요.

여러분,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께 뭘 해 드려서, 의로운 자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이 덮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자란 말예요. 절대 그거 잊지 말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 속에서, 혹은 가정생활 속에서, 혹은 직장생활 속에서, 승리(勝利)와 패배(敗北)의 삶을 번갈아가며 살면서, 하느님의 주체되심! 하느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배우고 인정(認定)하면 되는 거예요.

성도는 그 어떤 삶 속에서도, 예수의 은혜를 깨닫고, 발견하고, 인정하게 되는 복된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 그러면 노 프라블럼(no problem),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로 가는 거요. 이걸 행복(幸福)이라 그래요. 이거 행복하지 않으세요? 이게 굳 뉴스(Good News) 아녜요? 이게 왜 안 행복하냐고요? 그 은혜 앞에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 은혜를 자랑하고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돼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양식 안 주실 수도 있어요, 그죠? 날마다 우리가 원하는 거 다 주세요? 안 주세요. 그런데 날마다 우리에게 당신의 피는 먹이세요. 예수의 살과 피는 먹이세요. 그걸 감사할 수 있는 자가 성도예요.

그렇게 우리는 늘 예수를 떠나, 아사(餓死) 직전의 상태로 자꾸 달려가려고 하는데, 하느님이 쫓아오면서, 당신의 피를 마시게 하고 있는, 이 상태가 어찌 행복한 상태가 아니겠느냐고요? 그러니까 하쿠나 마타타, 케세라 세라가 나오는 거예요. 그냥 막살라는 게 아녜요. 끌려가는 삶! 그 속에서 이 현실(現實)을 수긍하고 인정(認定)하며, 행복(幸福)해 하시라는 거예요.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 영생을 선물 받는 자! 그들이 복된 자다! 잊지 마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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