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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42) 음식은 모두가 깨끗하다. (로마14,13-23)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31 조회수76 추천수2 반대(0) 신고

[이태리] 성 바울(바오로)대성당, 바울참수터...

 

2024. 1. 31. (수요일)

 

로마서42) 음식은 모두가 깨끗하다.

 

(로마14,13-23)

13 그러니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도리어 형제를 넘어뜨리거나 죄짓게 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합시다. 14 주 예수를 믿는 나는 무엇이든지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더럽게 여겨 진다는 것을 알고 또 확신합니다. 15 여러분이 음식 문제를 가지고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지니고 살아 가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음식 문제를 가지고 형제를 망쳐 놓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16 그러니 여러분이 좋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18 이러한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시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19 우리는 평화를 도모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을 추구합시다. 20 음식 문제를 가지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됩니다. 과연 모든 것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음식을 먹는 것이 남을 죄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을 먹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21 형제를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의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22 여러분에게 어떤 신념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각각 그 신념대로 살아가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23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벌써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가 됩니다.

 

인생을 사는 일에도 그렇겠지만 신자로서 사는 인생에 대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과 그 방법에 대하여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뭔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라는 질문을 당연히 누구나 해야 된다면,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야 말로 그 정체성이 더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답이 나와야 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일들이, 사실은 매우 모호하게, 매우 성경과 세상을 사는 방법의 구별이 다만 명분이나 윤리, 도덕으로 나뉘고 성경의 가르침에 대하여 아직 깊은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그중에 대표적인 문제인데, 사랑은 그저 이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쳐다보는 걸 사랑이라 그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에서와 같이 자신의 옳음을 그렇지 않은 자를 단죄하여 확인하지 않는다.’ 그게 사랑입니다.

나의 나됨을 나와 같지 않은 자를 비난하여 확인하지 않는다. 비난을 안 하고 단죄를 안 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유익한 자가 되기 위해서 산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만만치 않은 문제이죠. 옳고 그름을 무시하란 말인가? 잘하고 못하는 경계를 허물란 말인가? 당연히 우리에게는 혼란스러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 지금 로마서에서 굉장히 강조되는 것으로 ~

 

(로마12,9-11)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11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악을 미워하고 선한 일을 하라.’ 사랑이 선에 속하는 성경의 구체적인 요구입니다. “내가 맞고, 너 틀리다.”가 선이 아니라고 가르치는데, 우리는 맞고 틀리고 그래서 잘하고 못하고 내가 옳고 너는 그르고 나는 좋은 사람이고 너는 나쁜 사람이고 라는 이 이분법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로마12,14)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여기 오면 사랑이 무슨 말인지 확실하죠. “박해하는 사람 위해서 살아라.” “아이고 그건 못하겠습니다.” 박해하는 사람 복받으라고 빌어라.“ ? 14장에서 이렇게 돼 있었습니다.

(로마14,4) 4 우리가 남의 종을 판단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가 서거나 넘어지거나 그것은 그의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는 그를 서 있게 하실 힘이 있으시니 그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 권한이다. 나보고는 사랑하고 살라고 했다. 이웃에게 악을 행치 말라고 배웠다. 저 사람에게 내가 잘하는 것이, 잘하는 짓이 모를 것 같은 그 마음을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 기억하고, 참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만치 않은 문제죠. 또 풀어나가야 됩니다. 성경이 그랬다. 그러니까 당장 그렇게 하자. 그렇게 간단하게 실천이 되지 않으니까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죠. 로마서 8장으로 갑니다.

(로마8,18-21) 18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받는 고난, 세상은 다 고단한 법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야 사실이니까, 아 뭐 반대할 수 없지만, 예수를 믿고도 힘들다에 대해서는 우리는 긍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면, 안 믿고 산 것보다는 나아야 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 여기서 말하는 현재의 고난은 믿지 않는 자의 고난이 아니라 믿는 자를 포함한 인생의 고단함입니다.

그게 왜 고난이냐? 오늘 우리가 다루는 것 같이 우리를 박해하는 자, 틀린 자, 무지한 자, 악한 자를 우리가 품고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은 것을 현실로 보상받을 수 없는 인생과 길과 자리를 지켜야 되기 때문에 신자의 인생은 고단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아도 하느님이 보상을 해주지 않는 이유는 너를 보상해주면 네 옆에 세운 이웃은 심판을 받아야 된다. ,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으니, 니 고난, 나와 함께 가자 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비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사랑하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 같이 모두를 부르시는 기회와 방법과 하느님의 능력과 일하심의 경의로운 동참입니다. 그 고난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여기에 지금 설명된 것 같이 피조물들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연을 보십시오. 재앙이 있습니다. 병이 있고 썩고 자연의 참사가 일어납니다. 폭풍이, 홍수가, 그 자연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고요?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하느님이 주시고 싶은 구원, 그 영광, 그것이 나타날 때까지 하느님이 기다리시고 심판을 유보하시고 구원을 행사하시어 우리에게는 참으로 원치 않는, 아직도 썩어지며 종노릇 하는 현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와 세상을 썩어짐으로 끝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승리를 모든 창조세계에게 주실 때까지 우리 모두도 하느님의 일하신, 썩어짐을 방치하고 있고 썩어짐에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와 방법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자유를 가지는 것이죠. 하느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

고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겠어요?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다 안아야죠. 그들에게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 외에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걸 해야죠.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라 그것을 명예롭게,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법으로 위대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늘 억울하지요. 시편 73편 같이 되는 거죠. “하느님, 저 악당들은 왜 형통하게 살고, 지가 바라는 것보다 더 받습니까? 우린 뭡니까?” 이게 나오지요. 필리피서 2장으로 갑니다.

(필리2,5-11)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10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랑이 보입니까? “나 이런 하느님이다.” 기다리시는 하느님, 양보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손해 보시는 하느님. 우리는 이 하느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하느님 누구에게 떠밀려서 할 수 없어서 하신 일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랑은 하느님이 그런 성품을 가지신 그런 위대한 인격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기다리실 수 있는 분, 용서하실 수 있는 분, 충분히 우리가 익도록 기다릴 수 있는 분, 위대하죠.

그러니 우리가 어디에서 늘 틀리느냐 하면, 엘리야가 갈멜산 전투에 이겼으나 그 악한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서 호렙산까지 도망갑니다. 하느님이 와서 묻죠. “엘리아야, 너 왜 여기 있느냐?” 그 답은 은밀해야 들립니다.

다 죽고 나 하나 남았는데 나도 죽이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이제 텍스트를 담을 데가 없습니다. 나도 죽이려고 하는데 내가 도망을 가야지 어떡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답이 이겁니다. “7천 명이나 남겨뒀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명령을 내리시죠. 너 가서 예후로 이스라엘 왕을 삼고, 하자엘로 시리아 왕을 삼아라

북왕조 이스라엘은 유다와 달리 하느님 없는 길로 갔습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하느님의 신정 정치를 유지하고 있는 유다에게는 큰 적입니다. 거기다 시라아는 그때 국제 정세에서의 강대국입니다. 그 정권을 연장하라는 것입니다. 컨텍스트를 연장하랍니다.

그 악한 세력과 그 존재들을 연결하라고 하고 네 뒤를 이어 엘리사를 세우라고 하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텍스트를, 텍스트를 담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책임이죠. 정치적 경제적 차원에서 또는 사회적, 교육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교가 뭘 해야 되는가?

컨텍스트에 대해서는 우리는 모릅니다. 한 나라의 정치, 사회적, 국가, 민족적 위대한 지도자가 그리스도교에서 나와야 되느냐? 그건 모릅니다. 그것은 교회가 할 일도, 교인이 할 일도 아닙니다. 컨텍스트에 어떤 기여를 하느냐는 전적으로 하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웃 앞에서 텍스트를 담아내는 남겨진 7천 명으로 일을 해야 된다는 건 외면할 수 없는 모든 이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교회라는 이름을 비로소 컨텍스트를 바꾸고 자신의 짐을 돌려고 하는 그 시험에 빠지지 마십시오.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도 좋다! 그게 개혁주의죠. 우리가 갖고 있는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신앙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개혁주의라는 말로 요약된 이 이해가 있습니다.

이제 깨우치고 결심하고 행사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매일 담아야 된다 이겁니다. 깨우치셨습니까? 오늘이라는 날에 그걸 담으십시오. 내일은 내일 또 담아야 됩니다. 그게 개혁주의입니다. 다 뜯어고치자! 그렇게 간단한 그런 구호가 아니고 하느님이 하루를 더 살게 하면 하루만큼 더 담으십시오.

나는 이런 깨우침이 있었다. 이런 훌륭한 일을 했다는 어제이고, 오늘 깨우친 것 오늘 담고, 내일은 내일이 오늘이 되어 연장되는 모든 정황에 시간적으로 연장되는 세월 속에 우리가 아는 내용을 담는 자로 자리매김을 하시오.

그러니 그 일에 사실은 그 독특한 컨텍스트(정황)를 가진 인종이 있습니다. 흑인들이죠. 흑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백 년에 걸쳐서 인종적 차별을 당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그 오랜 세월 동안에 겪은 수모들은 저들에게는 이제 유전자로 남아서 그 민족만이 가지는 독특한 성격을 형성할 만큼의 그 유산이 되었습니다.

아 비겁할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는 자폭할 수 있고 망가질 수 있는 그런 아주 기가 막힌 유산을 갖게 되었죠. 억울합니다. 그 속에도 당연히 뛰어난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걸 극복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당연히 그렇죠.

흑인인 것은 죄가 아니다. 열등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이 틀린 것이다. 그것을 분노로, 폭력으로, 힘으로 뒤집어 엎으려는 시도도 늘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또 높고 고상하게 인격적으로 승리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놀라움은 내가 저 무지하고 저 우월감에 가득 차서 저지르는 실수를 감수하고 내가 용서하고 극복하리라, 한 날, 다음 날도 동일한 일을 반복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저들을 용서하고 저들에게 보복하지 않기로 해서 컨텍스트가 바뀌지 않고, 내 깨우침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 철 없는 것들이 다만 힘만 가지고 컨텍스트에 의지해서 세력을 잡은 자들의 말이 안되는 차별을 다시 참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계속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죠. 갈라디아서 6장입니다.

(갈라6,9-10) 9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합시다. 믿는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데 낙심할 만큼 해야 되고 포기할 지경까지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상을 받지 않습니까? 그것 자체가 위대한 일이라는 걸 알지 못하면 신자로 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해결을 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로 미루어두고 있습니다.

그럼 다만 참고 다만 희생하는 것이라고요.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라고요. 영광의 자유, 자발적 선택이 됩니다. 왜요? 인간에게 이것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꺾는 것은 아무런 명예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인생 속에서 마음껏 경험할 일입니다. 힘으로 이기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우리의 인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나이가 들면 더 확실해지죠. 세상이 약속했던 것, 속았던 것들의 진실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를 배우고 '아무래도 좋다'가 되죠.

'아무래도 좋다'에 실감나는 예가 있습니다. 쇼생크 탈출. 레드라는 흑인 죄수가 있죠. 종신형을 받고 수감 중입니다. 그 영화에서 세 번에 걸쳐서 가석방 청문회에 출석합니다. 아직 형을 다 마치기 전에 모범수를 미리 풀어주는 제도이죠. 두 번 퇴짜를 맞습니다.

뭐라고 얘기했는데요? ‘사회에 복귀할 준비가 되었는가?’ ‘되었습니다. 저는 교화되었습니다. 제 죄를 충분히 뉘우쳤습니다. 이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고 성실히 살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위원회에서 도장을 뭐라고 찍죠? 부적격!

마지막에 불려 나갑니다. 주인공 앤디가 탈옥한 다음이죠. “당신은...”,

잠깐 나보고 사회에 복귀할 준비가 됐냐고 물으려는 거지요? 그래 돌이켜보면 옛날에 젊은 철딱서니 없는 애가 기억이 나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끔찍한 일을 저지른 아이지. 지금 만날 수 있다면 이 얘기를 해주고 싶어. 니가 하는 게 뭔지 아냐고? 그럴 수는 없지.

나보고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됐냐고? 귀찮게 하지마. 난 그 딴 건 몰라. 난 이제 그 따위 것은 아무래도 좋아.” 합격! 그게 무슨 얘길까요? 그 따위 것 상관없어. 그게 무슨 얘기에요?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무슨 말일까요?

난 내 이웃이 나한테 편해야 되는 그런 조건은 이제 구별이 없어졌어. 나는 누구를 이웃으로 해서도 살 수 있어. 감옥이면 어때. 여기에도 내 이웃은 있어. 내가 필요한 사람들이 여기 있어. 나 여기서 살아도 돼. 그게 아무래도 좋아요.

누구한테 배웠을까요? 엔디한테 배웠죠. 엔디는 뭘로 그것을 그에게 납득시켰을까요? 앤디가 탈옥한 후에 그 죄수들이 식당에서 밥 먹으면서 옛날의 앤디를 추억하는 과정에 이 얘기가 나오죠. 맥주 사건. 성경을 잘 봐야 돼요. 앤디도 모르고 레드도 모르고 무슨 신앙생활을 하겠어요?

쇼생크도 안 가보고. 그가 경비대장 해들리에 받은 유산의 세금을 면제해주는 일에 이 조건을 걸었죠. 내 동료들에게 맥주 세 병씩 주신다면... 그래 앤디가 우리를 동료라고 불렀어! 그 말이죠. 앤디가 우리를 동료라고 불렀어.

우리 이웃이 되세요. 가서 꼬장꼬장하게 굴지 말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 그런 설명 같은 거 하지 말고, 가서 이웃이 돼서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세요.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알려주세요. 그리하면 우리 잘 아는 이 말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우리가 말하지 않고도 증언할 수 있게 됩니다.

 

(1코린15,57-58)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58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 보고 하는 말이고, 우리가 우리를 만난 이웃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가 당신을 역전시킬 수 있어.” 말하지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봐!” 그렇게 말하지 않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 된 인생이며 영광된 길인 줄 아는 이해가 없으면 우리들은 신세 타령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레드보다는 훌륭해져야 되는 게 기본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 데라도 좋아.” 그 고백과 그 명예가 우리의 인생에 늘 증폭하기를 빕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존재와 현실과 우리의 제한들에 대하여 우린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느님 그 아들을 보내신 것 같이 우리를 보내시는 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 명예로운 인생을 살겠습니다. 그 기적의 자리에 들어가겠습니다. 순종하고 기다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웃고 따뜻한 존재로 서 있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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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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