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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누려라"
작성자박순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0-07-09 조회수2,434 추천수3 반대(0) 신고

                                                   대구 평화 방송, 1999, 11, 16, 화   

성서독서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감히 바라며 이 글을 띄웁니다. 그리고 이 묵상은 Jean DELORME 신부님의 강의를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마태 25, 14-30: 달란트의 비유

 

 14(그것은)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밑긴 사람의 경우와 같습니다.  15그는 각자에게 제 능력대로 하나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즉각, 16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가서 그것을 활용하여 다섯을 더 벌었습니다.  17마찬가지로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둘을 더 벌었습니다.  18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물러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숨겼습니다.  

 

19많은 시각이 지나 그 종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함께 셈을 했습니다.  20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가 다가 와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내어놓으며 ’주인님, 저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겨주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21그의 주인은 그에게 ’잘했다, 착하고 믿음직스러운(충성스러운) 종아, 적은 것에 믿음직스러웠으니(충성스러웠으니) 네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누려라’ 했습니다. 22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다가와서 ’주인님, 저에게 두 달란트를 맡겨주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23그의 주인은 ’잘했다, 착하고 믿음직스러운(충성스러운) 종아, 적은 것에 믿음직스러웠으니(충성스러웠으니) 네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누려라’ 했습니다.

 

 24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주인님, 저는 당신이 모진 사람이라, 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시고 뿌리지도 않은 데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5그래서 무서운 나머지 물러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 속에 숨겼습니다. 보십시오 당신 것입니다.’  26그러자 그의 주인은 대답하여 그에게 말했습니다.  ’악하고 게으런(소심한) 종아, 너는 내가 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고 뿌리지도 않은 데서 모은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다.  27그렇다면 내 돈을 은행가들에게 내맡겨야 했다.  그랬으면 내가 와서 이자까지 붙여 내 돈을 돌려 받았을 것이다.  28그러니 너희는 그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사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 넘치게 할 것이요,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진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30너희는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쫓아라. 거기서는 울고 이를 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나라와 관계되는 지난 시간의 열 처녀 비유에 이어 오늘은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오늘의 이 달란트 이야기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 있는 비유인 만큼, 그 주제 또한 외울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고 생각할 지 모릅니다. 곧 우리 각자는 각자가 받은 달란트를 이웃을 위해 열심히 활용하여 배가시켜야 한다!  이러한 해석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위해 항상 큰 몫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달란트를 배가시키는 의무에만 초점을 둔 습관적 해석은  이 비유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진짜 이야기들을 질식시켜 말을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습관적인 해석들이 달란트의 증식만을 강조한 나머지 주인의 참모습과 주인과 종들 사이의 관계의 변화 위에 우리의 관심을 둘 여유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 비유의 마지막 사람처럼 무서운 하느님의 모습에 겁을 먹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독서란 이 비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읽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 독서 방향의 초점을 미리 잠깐 얘기하자면, 바로 이 주인과 종들과의 관계 변화를 통해 밝혀지는 주인의 참 모습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이 이야기가 우리 독자를 이끄는 방향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처음에 주인이 종들과 맺는 관계는 어떠하며, 주인이 떠난 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요?

 이야기의 처음은 신뢰의 관계로 시작하지요.  특히 주인 편에서 종들에게 향한 신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재산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고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오랜 동안의 부재 기간 동안 이 신뢰의 관계가 달라집니다.  첫 번째의 두 종들과 관계되는 주인과 종들 간의 증가되는 신뢰의 관계와 셋째 종에 의한 신뢰의 단절관계가 있게됩니다.  

 

 이야기 자체에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인에게 초점을 두고 그와 관련되는 행동과 말을 살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각자 능력에 따라  나누어주고 여행을 떠납니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 사람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는 제 능력대로 하나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달란트는 그 당시의 돈입니다.  

 주인이 어디로 가는지 종들에게 준 달란트를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도

없고 다만 주인의 출발은 오랜 세월 동안의 그의 부재의 시작이됩니다.

 

 "그는 제 능력대로 하나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종들의 능력은 서로 동등하지 않지만 주인이 그들에게 갖는 신뢰는 동등합니다.  그들의 능력의 불평등을 초월하는 주인의 이 신뢰의 공평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주어진 달란트와 그것을 다루는 방법들로 인해서 주인의 이 부재 기간은 주인과 하인들과의 관계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와서 대화가 이루어질 때 그의 부재 동안에 있어왔던 그들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주인님, 저에게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십시오,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앞의 두사람 즉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에게 있어서는 주인의 부재가 그들을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이 되게 한 기간이며, 주인이 그들에게 가졌던 신뢰를 증명해보이는 기간이 되었습니다. 또 마지막 사람처럼 그들은 주인의 의도등에 근심하지 않고 주인이 떠난 후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여 곧장 그들의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주인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재산을 맡길 정도로 주인이 그들에게 갖는 신뢰와 그들이 주인에 갖는 신뢰가 서로 화합합니다.  상호적인 신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주인의 대답:

 "잘했다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종아, 적은 것에 믿음직스러웠으니 네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누려라".

 주인은 그들이 말하는 달란트의 숫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종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말만을 합니다: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종". ["충성스러운 종"으로의 번역이 더 합당하다고 합니다.] 즉 그들에 대한 인정(認定)입니다.  "믿음직스럽다"는 것 역시 신뢰의 표현이지요. 그리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깁니다.  그들에 대한 신뢰의 증가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기쁨을 누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인의 물질만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까지 함께 나누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재산 위탁은 단순한 물질의 양도만이 아니라 주인과 종들 사이의 물질의 관계를 넘어선 주체적인 관계를 나타냅니다.  주체적 관계란 달리 말해서 인간적인 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관계, 신뢰의 관계, 내면의 관계, 내밀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보여준 신뢰를 저버립니다.  주인의 돈을 땅에 파묻으면서 주인과의 관계를 물질과의 관계만으로 축소시키며, 신뢰의 관계를 단절합니다.  ’받은 것을 불리지도 않았지만 축내지도 않았으니 당신과 나의 관계는 이것으로 셈이 끝난 것이오’.  그는 선물의 관계, 신뢰의 관계, 주체적인 만남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셈의 관계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셈의 관계에도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을 너무나 잘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인님 저는 당신이 모진 사람이라, 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시고 뿌리지도 않은 데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나머지..."

 한 타인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항상 문제가 되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내 앞의 타인, 가까운자, 내 이웃에 대해서 너무나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얼마나 우리는 그릇된 판단을 하며,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요!

 

 그는 주인의 모습을 자기 위주로 상상하여 그것이 주인이라고 자기의 내부에 고정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인을 믿을 수가 없고, 주인의 의도를 의심합니다.  신뢰의 관계가 수립될 수가 없지요.  주인이 그에게 보여준 신뢰를, 주인이 갖고자 했던 이 신뢰의 관계를 그는 무시했습니다.  그 스스로 그러한 관계를 단절한 것입니다.  그 스스로 내밀한 관계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끝에 가서 주인의 말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아라"는 말은 바로 이 사람 자신이 만든 그 자신의 상태를 공적으로 인정하고 확인시켜 준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주인은 주인 자신에 대한 세 번째 종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 이 종의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밝힙니다:

 

""악하고 소심한 종아, 너는 내가 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다. 그렇다면 내 돈을 은행 가들에게 내 맡겨야 했다. 그랬으면 내가 와서 이자까지 붙여 내 돈을 돌려 받아야 했을 것이다."

이 세 번째 종은 자신의 논리대로도 행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잘 알고 있는 대로의 주인의 모습에 맞게 행동하려면, 자기는 그것을 직접 활용하지는 못할 지라도, 적어도 그것을 다른 믿을 만한 사람(은행)에 맡겨 그들이라도 그것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무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의 소심함 때문이라고 주인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악하고 소심한 종아"라는 말을 통해 볼 수 있는 이 세 번째 종의 모습입니다.  이 소심함 때문에 능력이 별로 없는 자신이지만, 자신이 매개가 되어, 그의 능력을 대신해서 해 줄 수 있을 이웃이 가질 수 있는 기회조차 차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웃과도 단절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이웃들이 누릴 수 있는 어떤 것을 다 매장해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매개가 되어 이웃들이, 다른 사람들이 주인과 만남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를 기회조차 잘라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한 종인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이 셋째종은 스스로를 관계 밖으로 내치는 셈이 되었지요.

 

 앞의 두 사람은 그들에게 주어진 돈을 활용한데 비해,  마지막 세 번째 종은 그것을 활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 감추었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받은 돈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즉 그들은 일을 위해 그 돈을 투자했습니다.  그것은 일단은 상실입니다.  그러니 이 상실이 배의 이득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더 받게됩니다. 그런데 이 소심한 종은 자기가 받은 것을 잃지 않으려다가  받은 것 마저 잃게됩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자에게 주어라".

 

 주인은 다른 두 종에게 처음 그들에게 주었던 것을 포함해서 그들이 배로 벌었던 것을 다 돌려줍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내밀한 기쁨의 관계로 그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원한 것은 달란트를 돌려 받는 것도, 종이 배로 늘인 달란트를 거두어 들임으로써 그들의 덕을 보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갈망한 것은 종들과의 참 만남이었습니다.  그의 부재는 그들을 참 만남의 관계로 이끌어줄 기회요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밝혀지는 것이 주인의 참 모습입니다.  세 번째 종이 상상하던 주인의 모습이 아닌 참 모습.

 

 결국 달란트는 종에 대한 주인의 사랑의 증표이며 참 관계 안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갈망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달란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달란트가 내포하고 있는 주인의 갈망이 더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 번째 종은 이 주인의 갈망을 읽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하느님 왕국에 대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어떤 은총이든, 그것은 그 분의 사랑의 증표이며, 우리를 참으로 만나고 싶어하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갈망의 증표인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무상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읽지 못한다면 우리는 셋째 종과 같은 처지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끝에 가서 주인의 말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어 쫓아라"는 말은 바로 이 사람 자신이 만든 그 자신의 상태를 공적으로 인정하고 확인시켜 준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느님 왕국의 바깥에 하느님이 그를 내치신다기 보다 이미 내밀한 관계로서의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밖으로 그 스스로 자신을 내친 그 상태를 하느님께서 다만 공포하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달란트는 주인의 부재 기간 동안 이러한 관계 안에서 그들을 만나게 할 유일한 끈이었습니다.

 

만나고 싶어하는 갈망은 주인 즉 하느님 편에서 먼저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갈망의 근원인 것이며, 바로 이 근원적인 갈망과의 만남에로 우리의 갈망을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셋째 종과 같은 이는 이 갈망을 읽지 못하고 의심하고 무시하고 단절해버립니다.      

 

 "사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에게는 주어 넘치게 할 것이요, 갖지 못한 사람에는 가진 것 마저 빼앗을 것이다."

 주인이 앞의 두 사람들을 "믿음직스러운 종" 또는 "충실한 종"이라 불렀지요?  그것은 그들의 신뢰에 대한 인정이라고 앞에서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인의 기쁨을 함께 누려라"라고 합니다.  이 기쁨을 함께 누리는 단계는 신뢰의 완성 단계입니다.  이렇게 믿음, 신뢰는 서로에 의해 확인되고 인정될 때, 그리고 서로간의 신뢰가 서로 만날 때 더욱 증가 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상대의 신뢰를 의심하고 거부할 때, 그의 신뢰에 충실하지 못할 때, 이 신뢰의 관계는 깨어지고 회복하기 어려우며,  신뢰는 사라진다는 것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신뢰는 신뢰를 낳고 불신은 불신을 낳는다’는 격언이 여기에 맞을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의 잘못은 자신은 주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 했지만 결국 진실로 주인을 잘못 알고 있었던 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상상 속의 인물과 그는 상상적인 관계를 자기 일방적으로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의 오랜동안의 부재는 바로 이러한 잘못된 관계를 밝히며, 드러나지 않고 있던 이 종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적인 것이된 셈입니다.  마찬가지로 참종의 모습도 드러나게 합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주인의 참 모습이 밝혀지는 것이지요.  우리 독자에게 있어서는 나와 나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번째 종의 모습은 결국 주님을 잘 알고 있다고 과시하면서

주님이라 부르지만 그는 행동으로서는 "나는 주님을 모릅니다"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자리는 당연히 진실로 서로를 잘 아는 사람들의 바깥인 것입니다.  그 자신이 그들에 대해 문외한이니 그들이 그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는 늘 스스로 바깥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지난 주의 ’열처녀 비유’ 이야기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행동이 보여주는 것이 닮았습니다.  그녀들은 주님이신 신랑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으로 신랑을 마중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신랑에 대해 충분한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들이 신랑에 대한 갈망이 한결 같이 진실했다면, 그녀들의 갈망의 등불을 태울 기름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기름이 부족했다.  즉 갈망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을 만나러 오는 신랑의 갈망을 충분히 알지 못했고 그 갈망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바꾸어 말하자면, 신랑이신 주님을 그녀들도 주님이라 불렀지만 사실은 주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들 역시 그녀들의 행동으로 "나는 주님을 모릅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문 저 쪽에서 신랑이 대답하여 "진실히 그대들에게 말하거니와, 나는 그대들을 모른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결국,

 "너희가 나를 모른다 하면 나도 너희를 모른다 할 것이다."라는 성서 말씀의 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하는 참 뜻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 이야기는,

 "거기서는 울고 이를 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주인의 말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셋째종이 스스로 만든 자신의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울때엔 눈물이 눈을 가려 사물의 실체가 흐릿하지 않습니까? 셋째 종의 상태가 이러합니다.  진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상태. 이를 가는 일, 이것은 기쁨이 일그러진 상태의 표현이 아닐까요? 일그러진 기쁨.  다른 두 종은 주인의 기쁨이 자신들의 기쁨이 될 수 있는 진실한 관계 안에 있지만, 이 셋째종에게서는 그렇질 못하니 기쁜 표정을 지으려고해도 그 표정은 일그러질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가 진실한 관계 안에 있지 않으며, 또 그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진정으로 기쁜 마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쁜 표정을 지어야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열처녀의 비유’에 관한 독서는 "1369"번의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1 : 이지희 (헬레나)

 

 내 모든 걸 믿어주신 당신

     나를 조건없이 사랑하신 당신

     풍성케도 갖가지 선물을 주신 당신

 

     하지만

     나는 당신을 의심했습니다

     

     당신의 눈치를 살피고

     내 속의 당신을 은밀히 꺼내보기도 하고     

     내 기준대로 당신을 판단했습니다

 

     진정 알지 못하였기에

     나는 당신이 두렵습니다

     주님, 내게 당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주님, 내게 어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십시오

 

  기도 2: 이지희

 서로를 진실로 알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 서로에게 주는

        깊은 믿음의 표지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나. 그리고 너의 관계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그 믿음에 따라

        기쁨의 세계로 초대된 사람입니다

        그 초대를 이제 나 또한 깊은 신뢰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누리는 기쁨을

        나도 맛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서 네 주인의 기쁨을 누려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독자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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