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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토마같은 부활신앙은 바뀌어야 ...
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4-27 조회수2,568 추천수15 반대(0) 신고

부활신앙의 허와 실

나는 언제 어디서곤 나를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별명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신학생 때 오후 시간이면 늘 테니스를 치면서 지냈기 때문에 얼굴이 검게 그을은 모습을 보고 붙여진 이름이다. 내 스스로 보기에도 키가 작고 얼굴에는 주름이 많아서 아프리카의 영화배우 부시맨의 모습과 거의 비슷하게 생각될 때가 있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오죽하랴.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처음에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시맨’ 이란 배우의 순수함을 보면서 열등감을 갖기에 충분했던 내 신체적인 왜소함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다음에 부활하면 차인표나 아랑드롱 같은 멋진 남자로 다시 태어났으면 하고 기도한다. 사춘기 시절에 키작고 못생겼다고 변변히 여학생하고 데이트 한 번 못해 본 아픔이 있기 때문이다. 하긴 내가 그렇게 잘 생겼으면 지금 신부가 되었겠냐만. 그래서 남들보다 잘난 것이 하나도 없는 내가 신부가 되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이 오묘한 섭리라고 생각된다.

 

부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제일 기쁘다. 이다음에 내가 부활하게 되면 분명히 잘 생기게 태어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루가복음 6장의 행복과 불행 선언(6,20-26)에 따르면 더욱 확실해 진다. 이 중에서 두 개만 비교해 보자.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대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아! 그대들은 굶주리게 되리니."

 

이 구절은 다른 사람에게 한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내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이다. ’복되어라. 지금 못생긴 부시맨아, 너는 잘생겨 지리니.’

 

부활을 믿으면서도 사람들은 이렇게 구체적인 일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만일 영적인 부활만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토마의 믿음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다(요한 20,24-29).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보았다고 다른 제자들이 전해주자 "내가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눈으로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한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부활한 다음에도 예수님은 생전의 모습과 같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화장을 하지 못하게 하는 풍습도 생겨난 것이다.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할 때 불에 타서 흩어진 뼈와 살이 다시 모여서 예전의 자기 모습으로 다시 부활하려면 매우 힘들지 않겠느냐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의 결과인 것이다.

토마가 갖고 있는 부활신앙이 사실이라면 당사자들에게는 죄송한 비유이지만, 다리 한 쪽이 없는 장애자가 부활을 해도 다리 하나가 없다면 나는 그런 부활은 싫다. 또 늙어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부활해도 다시 할머니로 부활한다면 그런 부활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장애자는 성하고 건강하게 부활해야 하고, 할머니는 처녀 때의 아름답고 예쁜 모습으로 부활해야 부활에 대한 희망이 가득차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처지가 현재 불행하다고 이렇게 성서를 끌어다가 자위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일 수 있고 부활에 대한 신앙과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의 머리로 무한한 하느님의 세계를 가늠해 본다는 것이 벌써 어리석은 교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활에 대한 올바른 신앙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복됩니다"(요한 20,29)이란 말씀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만 부활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다양하게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고린도인들에게 이렇게 답변을 보냈다(1고린 15장 참조). 그리스도의 부활은 자신도 확실하게 전해받은 복음이며(15,1-11),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것 중에 하나인 부활한 몸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답변이 있다. 토마 사도가 갖고 있었던 것도 이런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부활 때 우리의 몸은 ’모두 변화할 것인데, 그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일으켜질 것이다. 썩을 이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하며 죽을 이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한다’(15,51-53)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토마가 갖고있던 부활신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복음서들은 한결같이 부활한 예수님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자세하게 전해주지 않는다. 가장 공통적인 부활신앙의 대표적인 증거는 빈무덤 이야기이다(마태 28,1-8; 마르 16,1-8; 루가 24,1-12; 요한 20,1-10). 예수님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 교회는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는 반면에 대제관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훔쳐 내고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켜졌다’"(마태 27,64; 28,11-15)고 사기극으로 몰아부치며 믿지 않는 것으로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이 공교롭게도 여자였다고 보도하는 이야기들(마태 28,9-10; 마르 16,9-11; 요한 20,11-18)도 당시에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던 여자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리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계획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로는 잘난체 하던 남자들, 특히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구원을 자신했던 대제관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부활해서 당신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가르쳐 주셨으면 좋으련만. 예수님은 한갖 이름도 없는 나약한 여자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전해줄 말씀을 남기신다. 그러니 누가 여자의 말을 믿겠는가? 그것도 창녀로 소문난 여자의 말을 말이다.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요한 20,19-23) 바오로 사도에게까지 나타나신다는(사도 9,1-9) 이야기가 성서에서 전해주는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의 전부다. 요한복음 21장은 후대에 첨가한 것으로서 요한이 쓴 본래의 복음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발현이야기에서 제외시키면 말이다. 루가복음에서는 흔히 엠마로오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지만 이것도 제자들임에는 마찬가지이다(루가24,13-35; 마르 16,12-13).

 

성서에 나타난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어느 구절에서도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셨는지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부활한 예수님이 과거에 십자가에 못박혔던 그분인지를 확인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하는 토마사도의 부활신앙은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토마와 같은 부활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본래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평화이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평화"하고 인사하시며 나타나신다. 그분은 하느님과 인간이 등을 졌던 원수관계를 회복시키셨다. 죽음이 하느님과 인간을 갈라놓았던 원흉이라면 죽음을 이긴 부활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평화를 주실 수 있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평화는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화는 우리 모두에게서 그 어떤 세력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인 것이다.

 

그래서 부활을 체험하고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된 신자들이 한 마음 한 정신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행전(4,32-37)은 부활을 체험한 초대교회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과 원수가 되어 죽을 수 밖에 없던 가련한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난 신자들이 너무 기뻐서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짧은 단편으로 전해져 오는 초대교회의 이러한 모습은 세세 대대로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범으로 전해져 왔고 또 전해질 것이 틀림없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부활했느냐에 대해서 논쟁을 일삼고, 부활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살아계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 가르쳐 주셨다. 이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전해주기 위해서 당신은 부활하신 것이다. 따라서 토마사도나 나처럼 못생긴 모습 그대로 부활할 것인지, 아니면 차인표처럼 잘생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지에 관심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육적인 것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답게 생전에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모든 말씀들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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