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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 04) 인간의 죄(罪)와 하느님의 진노(震怒)
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24 조회수62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3. 12. 24. (일요일)

 

로마서 04) 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진노(震怒)

 

(로마1,24-32)

24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5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26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27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 28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29 그들은 온갖 불의와 사악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고, 시기와 살인과 분쟁과 사기와 악덕으로 그득합니다. 그들은 험담꾼이고 30 중상꾼이며, 하느님을 미워하는 자고, 불손하고 오만한 자며, 허풍쟁이고 모략꾼이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며, 31 우둔하고 신의가 없으며 비정하고 무자비한 자입니다. 32 이와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느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주제로,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이 왜 필요한가? 하는 이 커다란 주제입니다.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마음이 조급하다. 모든 자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다. 할 수만 있으면, 단숨에라도 너희에게 달려가기를 원한다.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 로마서의 앞부분에서, 그렇게 복음에 대하여 열망을 가지며 조급한 마음을 가지며 빚진 자 같은 그 애틋한 마음이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복음은 왜 필요하냐? 우리가 다 하느님의 진노(震怒)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을 하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가고,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 이런 내세적이고 운명에 관한 것으로 답을 쉽게 내면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현실을 설명해 내야 됩니다.

하느님의 진노가 뭔데? 불의한 자들과 불경한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무섭다. 다른 어떤 기준도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기준하여 하느님이 심판하시고 혹은 복 주신다. 하느님이 누구시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잘못일 수 있느냐? 너희 안에 하느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 온 천지에 하느님에 대한 계시가 있다. 너희가 핑계 댈 수 없다.

무엇에서 그 증거가 있느냐? 너희가 우상을 만드는 데 있다. 너희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는 걸 안다. 너희의 욕구와 소원 속에는 너희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 있다. 너희는 신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언제나 왜곡시키고, 부패시키고, 너희보다 하찮은 것으로 만들거나 너희의 수단으로 그래서 욕심을 정당화하는 데만 쓰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 너희 안에 하느님을 찾는 마음을 준 이 거룩하고 영광된 것을 부패시켜 하느님을 모독(冒瀆)하고 그 하느님의 깊은 창조물인 너희 자신을 더럽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은 가만히 있으실 수 없다.

 

그럼 그 심판이 도대체 어떻게 나타나는가? 너희를 너희의 선택과 욕심에 내버려 두심으로 그리하셨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24절이죠.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28,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어느, 벌 받을 곳에 그들을 잡아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했다. 그게 무엇이죠? 여기 나오는 대로, 정욕의 더러움, 부끄러운 욕심, 상실한 마음,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며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벌이었다.

너희들이 선택하고 너희들이 원한 것이 무엇인지 보도록 한 것이 하느님의 심판이었다. 하느님을 외면하자, 하느님이 없는 자리와 경우와 현실을 만들자, 모든 것은 부패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더러울 수 밖에 없었다. 모든 것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얘기 같아요? 인류 역사죠. 인류 역사고 현실입니다. 아무도 부인(否認)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가끔 사람들은 그 순진한 변명을 합니다. 원래 인류 역사에서, 그 문학에 가장 중요한 서사(敍事) 중에 하나가 이것 이랍니다.

순진한 바보가 부패한 세상 속에 들어가 논란을, 놀라운 일을 당하지만 그 순진함을 꿋꿋이 지켜가는 것. 이것이 문학적 서사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사랍니다. 그렇죠. 그러나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다든가 악의를 갖지 않았다든가 몰랐다든가 하는 것은 지금 로마서가 증언하려는 이 말이 다 다 튕겨져 나가버립니다.

그래도 현실이다. 모르고 밟았습니다. 모르고 먹었습니다와 상관없이 잘못된 것을 먹으면 죽습니다. 모르는 데를 밟으면 빠집니다. 우리는 계속 우기고 있다는 거죠. 이런 반론을 편 사람들 잘 아시죠? 세상이 어쩜 이렇게 참혹한가? 하느님이 지으셨는데 왜 이 모양인가? 하느님은 뭐 하고 있는가?

네가 원한 것이다. 너희가 나를 외면하여 자초한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의 현장입니다.

우리들이 여기 나열된 것들은 좋아하건 싫어하건 상관없이 그것이 도덕적으로 어떻고 저렇다고 비판할 필요 없이 참혹한 현실입니다. 부인(否認)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저녁 뉴스 때마다 만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와 너무 멀다.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 하느님 얘기 할 것 없고, 복음 얘기할 것 없이, 성경이 들이대는 현실에 대한 증거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또 있나요? 무슨 다른 어떤 폭로가 현실을 성경보다 더 잘 증언하나요?

루가복음 15장에 가면, 이 문제가 성경에 얼마나 중요한 핵심된 주제인가를 예수님의 비유해서 우리가 만납니다.

 

(루카15,11-19)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잘 아는 탕자 비유입니다. 탕자 비유의 핵심 되는 내용은 오늘 우리 로마서 124절에서 끝절까지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작은 아들이 한 것은 자기의 선택입니다. 아버지의 통치와 영역, 또는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 식으로 속박을 벗어나 자유를 선택한 것입니다.

먼 나라, 하느님의 통치가 아닌 나라로 가서 그가 아버지에게서 받아온 것 다 소진하고 흉년이 들어 주립니다. 돼지치기가 되었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에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어서 드디어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하인들이, 품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돌아봅니다. 중요한 표현입니다.

아버지는 얼마나 부자인가, 아버지는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는 품삯이,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그 다스리심에 있어서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복되신 분인가? 거기서는 하인들마저도 풍족한 품삯을 받는데, 나는 홀로 나오는 바람에 몰리고 몰리고 몰려서 쥐엄 열매 하나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게 되었구나!

그러니 다른 거 다 그만두고 돌아가 아들 노릇도 말고, 품꾼의 하나로 아버지의 나라 가서 살겠다. 주님의 성전에서 하루가 천 날보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일치하지요. 하느님의 통치,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이것보다 더, 더 분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비극입니다. 하느님 부재의 현실, 인간끼리 만든 세상,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받아온 세계와 우주와 원칙이 면면이 흐르고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우리를 행복과 영광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내쫓고 우리끼리 있자, 그 거대한 유산이, 그 하느님의 축복과 영광의 존재가, 그 목적을, 내용을, 현실을 아무 것도 남겨놓지 못한 채 부끄러움과 더러움으로 부패시킵니다. 멸망밖에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게 탕자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돌아가자.’ 이렇게 되죠.

32절에 가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끝납니다. 이 주제는 루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의 공통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잃어서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둔 채 하나를 찾아 나서고 5-7,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하나를 찾는 기쁨.

두 번째는 은전(드라크마)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를 찾은 기쁨. 9-10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찾는 기쁨. 기쁨이라는 것은 여기서 그 찾은 대상이 다만 한 물건에 불과하지 않다는 주인의 어떤, 더 깊은 관계성을 묘사하고 있지요.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동원되고, 찾은 기쁨이 이웃과 함께 나눠야 될 만큼의 큰 것입니다. 다만 소유와 어떤 물량이 불어나는 것과는 다르죠.

그리고 같은 주제를 세 번째 와서는 탕자비유입니다.

아들이 나가겠다고 우기고 아버지는 보냅니다. 오늘 식으로 얘기하면, ‘버려 둡니다. 그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뭔지 생각해야 됩니다. 하느님은 왜 그걸 받아주셨을까? 그건 무지하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 생각엔 붙들어 매뒀으면 제일 좋겠습니다. 그럼 아마 평생 찌푸리고 살았을꺼요 그죠?

하여튼 하느님은 놓아두셨습니다. 절대 놓치지 않을 분이. 앞에 두 개는 분명히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자기가 나가는 것을 허락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더 다룰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더 다룰 것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여기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선택권을 줬고, 그 선택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도록 긴 시간을 주었습니다. 긴 시간.

왜 세상이 이 꼴이냐? 하느님 뭐하시냐? 이 전쟁의 비극을 봐라. 그런데 하느님이 그리 하신 것이 아니다 이거죠.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핑계 댈 수 없는 우리가 한 일들입니다. 마이클 호튼의 글에 이 문제에 대한 아주 좋은 글이 있어서 인용합니다.

성경은 복음이 바로 실패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기준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볼 때 우리 모두가 실패자들이라는 것이다. 영광, 권능, 위로, 건강 그리고 불을 향한 요구는 이에 대한 갈망과 환멸이라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그런 환경 속에서 너무 약해져버린 영혼들은 위기를 만나게 되면 적절히 반응할 만한 힘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이 제공해 주는 해결을 갈망하는 욕구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천박한 희망의 희생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무엇을 항상 약속하고, 여기에 너무 쉽게 설득되는 우리는 또한 아주 쉽게 실망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실패자이죠. 서두에 얘기한 것처럼 순진해서 그랬다는 것이 핑계가 안된다니까요. 순진하게 공 따라 들어가다 지뢰를 밟아서 다리가 잘라졌다니까요. 어떻게 그런 얘기를, 현실이 무섭기 때문에 해야죠. 하느님을 외면한 것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봐야죠. 그걸 보지 않고는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지! 그걸 깨달으라고, 그럼 거기에 넘겼단 말입니까? 넘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졸랐지요. 그걸 없앴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무슨 돌이 됐겠죠.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우리의 영혼의 갈증이 하느님 이외의 그 어느 것으로도 만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얘기와 같이 하느님을 만나기까지 우리의 영혼의 평화는 없습니다.’ 대강 타협하고 살 수는 없습니까? 하느님은 그렇게 아니하시겠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는 불평이 있습니다. 이 현실에 대한 비아냥, 핑계, 외면, 체념 그리고 저항이 있습니다.

문학에는 이 문제가 아주 커다란 주제가 돼서 서구 문학에서는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 아주 중요한 주제로 면면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영문학자인 토마스 포스터라는 사람이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평하면서 이런 말을 써서 저한테 어떤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 책은 다른 모든 책과 다르다. 이렇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첫 세 마디를 보라.” 뭐냐 하면요. “콜 미 이스마엘, Call me Ishmael.”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줘.’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거기서 화자입니다. 그 모비딕이라는 전체 소설에서 그 소설의 화자입니다. 그는 이스마엘입니다.

서구는 당연히 그랬듯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인들도 알다시피 이스마엘은 서자(逝者)입니다. 화자가 서자로 시작되는 것으로부터 벌써 뭘 짐작할 수 있습니까? ‘항복할 수 없다’. 억울하다‘. 삐졌다 이거지. 이게 금방 다가오지 않습니까? 이사악이 아니니까요. 이스마엘이니까 벌써 시작부터 이런 어긋난 시선과 저항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작품입니다. 왜 위대하냐 하면, 사람이 거기까지 신과 맞서서 고집을 부리는 데까지 갈 수 있다는 게 위대합니다. 얼마나 우리가 큰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만 분노하고 거절하는 데 있어도 그렇게 큰데, 하느님의 은혜와 목적에 순종하여 크면 얼마나 클 수 있을까? 해선 기절해 버렸습니다. 제가. “콜 미 이스마엘에서는 그 말을 알아먹었는데, 그래서 상대적으로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가!”에서는 기절을 해서 깨어났더니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게 로마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히브12,3-8)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8 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시비 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악 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아들로 기르는 자들에게 구약식으로 얘기하면 율법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우상을 섬기지 마라.” 우리 식으로 할까요. “밥 먹을 때 쩝쩝대지 마라. 얘기할 땐 눈을 마주 봐라. 두 손은 앞으로 공손히 모아라.”

불편하신가요? 그것은 명예입니다. 그죠? 무엇이 있어야 만드는 물리적인 것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닌 인격과 영혼의 위대함이죠. 예의를 갖는 것, 지혜를 갖는 것, 분별을 갖는 것, 관계를 맺는 것, 하나의 존재가 되어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을 명예로 알게 됩니다. 거기엔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미뤄줘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이건 아니다. 그렇죠?

여러분 사진 찍고 사진사가 다시 찍어야겠습니다.’의 첫 번째 이유가 뭡니까? 제일 많이 하는 실수, 찍히는 사람에게 제일 많이 일어나는 실수, 눈 감는 거죠. 눈 똑바로 뜨세요. 자 하나 둘 셋 할 겁니다. 하나 둘 하고 확 찍어야죠. 셋 하면 꼭 감으니까. 이게 율법입니다.

율법의 은혜인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대로 가는 길을 차단하여 하느님이 그 안에서 만드시는 일을 하도록 하는 장치였죠.

우리 아버지가 하신 모든 말을 다만 꾸지람으로, 짜증으로, 어떤 벌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 인생들이 아버지 노릇, 어머니 노릇, 자식 노릇 하는데 우리가 제멋대로였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큰 복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아들로서 대접한답니다.

이 탕자에 비유에 그 아버지의 전 재산을 말아 먹고 돌아왔는데, ‘자 소를 잡아라. 모두를 불러라 잔치를 하자.’ 그래서 그 큰 아들의 역할이 그겁니다. 아니 창기(娼妓)와 함께 온 재산을 말아먹은 놈을.

얘야 무슨 말이냐?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느냐?” 이 말을 들으시고 상기하십시오. 우리 이 비참한 현실 왜 이렇게 됐느냐? 우리는 왜 여기까지 왔을까 돌아갈 수 있을까? 민망과 절망이 가슴 속에 가득 찼을 때, “무슨 말이냐 너는 내 아들이 아니냐?”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이 모든 걸 모아서 에페소서 4장에서는 이렇게 멋지게 요약했습니다. 참으로 멋진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다룬 내용이 이렇게 간략히 돼 있어서 이것만 읽고는 알 수 없으나, 오늘 이렇게 로마서를 이해하고 보면 이 말이 얼마나 멋지게 요약됐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에페4,17-24) 17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18 그들 안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정신이 어두워져 있고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19 감각이 없어진 그들은 자신을 방탕에 내맡겨 온갖 더러운 일을 탐욕스럽게 해 댑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그럽니다. 사실이고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외면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죠. 이제 반전이 나옵니다.

20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았을 줄 압니다. 22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23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24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하느님을 외면하여 이루어진 세상의 비참함과 더러움을 본 것처럼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현실인 것처럼 예수께서 오셔서 바꿔놓은 세상, 복음으로 인하여 새로 열린 세상, 새로 시작할 수 있고, 부름 받은 우리의 신자된 진실, 지금 당장 예수 안에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 하느님의 자녀로 명예롭게 살 수 있습니다. 25절 이하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얘기하죠.

25 그러므로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26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27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 하던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애써 좋은 일을 하여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실히 살라, 믿음을 갖고 살라, 억울해하지 마라, 세상에다가 고함 지르지 마라,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준 구원이 무엇인지 알라, 너는 더 이상 너의 정욕의 더러움이나 너희 욕심에 부끄러움이나 상실한 마음대로 살던 현실대로 내버려 두어져 있지 않다. 예수를 보내 내가 너희를 그 안에서 끌어안았다. 너희는 내 자식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상의 한 시점과 장소에 오셔서 아버지의 화목(和睦), 부르심과 아버지 안에 있는 부요(富饒)와 그 축복과 그 명예와 승리와 영광을 주셨습니다. 힘써 신자답게 사십시오.

세상에 지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 그전에 우리는 무엇을 했었던가, 그게 뭘 만들었고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이 생겨났는가, 아는 믿음과 승리와 자랑과 감사와 순종과 기적으로 사는 신자(信者)된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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