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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연중 제4주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27 조회수1,911 추천수0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제1독서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4-5.17-19

요시야 시대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1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1(70),1-2.3-4ㄱ.5-6ㄴ.15ㄱㄴ과 17(◎ 15ㄱㄴ 참조)

◎ 주님, 저의 입은 주님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 주님, 제가 주님께 피신하니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출하소서, 저를 구원하소서.

저에게 주님의 귀를 기울이소서, 저를 구하소서. ◎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주님은 저의 바위, 저의 성곽이시옵니다.

저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

○ 주 하느님, 주님만이 저의 희망이시고,

제 어릴 때부터 저의 신뢰이시옵니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주님께 의지해 왔고,

제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주님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

○ 저의 입은 주님의 의로움을,

주님 구원의 행적을 온종일 이야기하리이다.

주 하느님, 주님께서는 제 어릴 때부터 저를 가르쳐 오셨고,

저는 이제껏 주님의 기적들을 전하여 왔나이다. ◎ 

 

제2독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1─13,13 또는 13,4-13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루카 4,18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도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1-30

그때에 21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시편 31(30),17-18

주님의 얼굴을 주님 종 위에 비추시고,

주님의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주님, 제가 주님을 불렀으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해설과 묵상


제1독서(예레 1,4-5.17-19) 해설

<예레미야가 받은 소명>


제1독서 구절들에서 예레미야는 자기가 받은 소명에 대하여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를 사로잡는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님께서는 그를 예언자로 삼으셨다(참조. 시편 139,16). 어떤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예레미야 예언자에게는 그 순서가 바뀌어 “나를 생각해 주신 분이 계셨기에 나는 존재하게 되었다.”가 된다. 예레미야는 이미 하느님께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

5절에는 ‘알다.’라는 동사와 ‘거룩하게 하다.’라는 동사 두 개가 같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알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지적 활동만을 가리키지 않고,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모두 포함한다. 우리 사람에게는 일생 동안 하느님의 계획을 언제나 분명하게 깨닫도록 허용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의 계획은 단순한 지식으로 습득할 수 없고, 신앙으로만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하느님의 계획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예레미야에게는 자기 생애가 미리 ‘예정된’ 생애요, 예언자로서 섬기는 생애라는 생각이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어떠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자기가 받은 소명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확신하며 당당하게 주장한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동사는 ‘거룩하게 만들다.’ 또는 ‘죄악을 씻어 깨끗하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니다. 그 동사는 윤리적 가치가 아니라 종교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동사는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하느님과 친교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맡겨진 사명은 모든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전달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충동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거룩한 소명이요 하느님께서 지워주시는 고귀한 사명일 수도 있다. 그 소명을 따르고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온갖 고난과 박해를 당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자기 곁에 계시며 도와주심을 믿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화답송(시편 71[70],1-2.3-4ㄱ.5-6ㄴ.15ㄱㄴ과 17[◎ 15ㄱㄴ 참조]) 해설

<주님, 저의 입이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오늘 전례에서 이 시편을 취한 목적은 예언자가 받은 소명과 사명을 분명히 하려는 데 있다. 그 소명과 사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난다.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한 사람은 결코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만을 ‘내 바위, 내 보루, 내 희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정의를 꿋꿋하게 공공연히 외칠 수 있다.


제2독서(1코린 12,31-13,13 또는 13,4-13) 해설

<사랑을 노래하는 찬가>


1코린 12-14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받은 수많은 특은에 대하여 말한다. 12,31-13,13에서 바오로는 그 모든 특은을 아우르면서도 그보다 뛰어난 사랑에 대하여 말한다. 이 찬미가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1-3절)에서는 사랑이 그 어떤 특은보다 위에 있다고 말한다.

둘째 부분(8-13절)에서도 사랑의 무한한 특성을 말한다.

13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함으로써 바오로는 사랑의 출중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베푸는 극진한 사랑을 사람이 본받으려하지 않는다면 어떤 명분으로도 다른 이웃에게 참다운 유익을 줄 수 없으며 인간사회에도 조금이나마 어떤 보탬이 되어 줄 수도 없다. 하느님다운 사랑만이 생명의 가치를 창조해 낼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복음(루카 4,21-30) 해설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하여 파견되셨다>


오늘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행하신 설교가 나온다.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가 단 한 구절로(마르 1,15; 마태 4,17) 그 설교를 요약하고 있는 반면, 루카 복음서는 그 설교를 기다랗게 묘사하고 있다. 그 설교는 예수께서 땅 위에서 수행하실 사명의 서곡이며, 그 안에는 예수께서 앞으로 행하실 설교의 기본 주제들이 들어 있다.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예수께서 장엄하게 등장하여(4절, 14절, 18절), 이사야 61장에 나온 신탁을 낭독한 다음, 그 예언의 말씀은 바로 당신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행하신 설교는 회당 안에 있는 군중에게 물의를 일으킨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고장이 배출한 인물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그가 자기네와 똑같은 처지인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수군거린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른 곳에서 행한 활동을 익히 알면서도 믿을 마음이 언뜻 내키지 않는다(23절). 예수께서도 빈정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기적은 믿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마태 13,58).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당신 사명을 수행하시는 첫 장면에서부터 예수께서 이 지상에서 생활하시는 의미를 분명히 드러내려 한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당신 자신을 메시아-왕으로서 제시하셨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총을 내리는 예언자로서, 주님의 종으로서 드러내신다.

예수께서는 당신 온 생애를 통하여 구약의 약속을 실현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은총을 거절한다. 이미 나자렛에서 칼바리아의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인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을 사람들이 가로막을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본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선민의식에 빠져 다른 민족들을 무시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겨난 목적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는 모든 백성에게로 가는 다리 구실을 다하리라는 것뿐이었다.

교회공동체도 그 자체의 세력 확장과 이권신장에 그 존재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백성과 모든 사람에게 건너가시도록 하는 다리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는 데 그 사명이 있다. 교회공동체는 인류 공동체를 몸 바쳐 섬겨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다. 따라서 교회공동체는 사람이 만든 특정한 체계 속에 굳어져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새롭게 탄생되는 생명처럼 모든 백성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묵상

<나는 너를 모든 백성의 예언자로 세웠다>


이번 주일의 말씀의 전례는 예언자의 소명을 강조하고 있다. 예언자는 하느님을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이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증거하려는 예언자의 앞길을 막지 못한다. 예레미야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예언자다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어차피 모진 박해를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랑이 흘러넘친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우연히 본의 아니게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인생살이가 덧없고 괴롭다고만 느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예레미야처럼 수태되기 전부터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미리 점지되고 거룩하게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5절). 예레미야는 자기가 너무 어리고 힘이 없다고 느끼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두려움을 느낀다(7절). 그러나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헤아리면서 그분께 사로잡힌다(9절). 예레미야는 단지 자신을 비운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께 순응하고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당신이 명하시는 바를 그저 단순하게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17절). 그 이유는 주님께서 몸소 옆에 계시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8절).

이렇게 보장을 받은 다음 예레미야는 사명을 받고 파견된다. 이제 그가 하는 말은 온갖 불의를 발가벗기는 심판이 되고 그릇된 길을 사정없이 고발하고 단죄하는 심판이 된다. 그 때문에 그는 엄청난 박해와 반대를 당하게 된다(19절).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예언자를 없애지 못한다.

우리도 모두 예레미야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명을 받아 온갖 거짓과 불의를 폭로할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배척당하는 예언자>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외면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고 예언자처럼 살아가고 행동하신다. 사실 그분과 더불어 ‘주님의 은총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거룩한 해’가 시작되었다. 그분 안에서 메시아를 예고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분이 고향에서 당신 주장을 입증하는 기적을 전혀 행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분의 동향인들이 호기심만 잔뜩 있지 믿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동향인들이나 동족이라 해서 구원에서 무슨 특권을 주려 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을 미리 피하신다. 즉, 그분의 구원 계획은 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에 독점될 수 없었다. 예수께서 그런 당신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시자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어떤 예언자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계획에 동참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언자들이나 예수께서 당하신 것처럼 자기네 울타리 안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그런 보편적인 구원계획이 자기네의 속된 이권과 세력유지 확장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으로만 예언자의 소명을 다할 수 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오로지 지적만을 보고 싶어 한 것처럼 코린토 신자들도 겉으로 드러나는 인기 있는 특은들만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코린토 신자들에게 어떤 특은을 청해야 할지를 지적하면서 그 특은들은 여러 가지인 것 같아도 결국 사랑이라는 특은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언어를 말하는 특은이나 넓은 지식과 큰 신앙을 받은 특은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진 바를 모두 나누어준다거나 순교하는 특은을 받았을지라도 그것이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라면 거짓이요 자기기만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사람 사이에 참되고 올바른 관계를 맺어 주며 거짓과 불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사랑 외에 다른 온갖 특은은 사라질 것이고 사랑만이 끝이 없을 것이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이며 사랑만이 사람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 줄 수 있다. 진리와 정의를 부르짖는 외침과 예언이 가식적이고 환상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외침이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본받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복음해설(2)(스페인어 본격해설 번역문)


4,17ㄴ-21: 루카는 이사야 예언자의 위로하는 활동에 집중된 찬미가인 제2이사야서 대목(61,1-11)을 인용문으로 뽑아낸다. 이 본문은 예수께서 행하신 연설 전체를 소개하지는 않지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라는 단 한 구절로 그 연설을 요약하고 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이미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촉구하는 내용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예고한 하느님의 계획이 ‘오늘’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이제 과거를 돌아볼 때가 아니고 무슨 굉장한 미래를 꿈꿀 때가 아니다. 현재의 순간을 주께서 오고 계시는 특권적인 기회로 알고 살아가야 할 때이다.

루카는 이사 61의 예언이 주께서 은총을 베푸시는 해를 예고한 순간(19절)에 의도적으로 성경 낭독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뭇 나라와 뭇 민족에 대한 심판을 예고한 다음 구절을 그냥 지나친다. “우리 하느님의 응보하는 날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2) 이 구절을 뺀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느님의 은총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은총의 해’는 빼어난 희년(참조. 레위 24,10-13)이요, 구원이 내리는 메시아 시대다.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한다.”는 구절은 이사 58,6에서 취한 것으로서 이사 61,1-2에 표현된 생각을 다시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신다. 그분은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다.

이사 61,1-2를 인용하면서, 루카는 또 한 줄을 뺀다.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게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유하다.’라는 동사를 육체적인 치유에만 적용하고 있다. 이 순간에 루카의 관심은 다른 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일부러 뺀 한 줄 대신에,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게 하셨다.”(이사 58,6)라는 다른 인용문을 집어넣는다.

예수께 기름을 부으시는 성령께 대한 언급은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에 대한 언급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3,22; 사도 10,38).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라는 구절은 예수께서 수행하실 사명의 가장 적합한 목적 가운데 한 가지를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궁핍하고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시리라는 것이다. 루카 7,22는 이 대목에 대한 뛰어난 설명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메시아인 당신 사명에 대한 증명으로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는 행위를 보여주신다는 것이다(참조. 사도 10,34-43).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교육학이 드러난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고자 할 때, 이스라엘을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를 통과하여 놀라운 모양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는 이스라엘의 유명한 제도, 즉 희년에 기초한 은유적인 표현이다. 희년에는 노예들이 자유를 되찾고 땅도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다(레위 25,8-55).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위력을 암시하는 것 같다(이사 55,10 이하). 그리스어에서, ‘이루어졌다.’라는 표현은 완전동사(‘페플레로타이’)로 나와 있다. 다시 말해서, 채워지고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라는 인물 안에 구원이 이미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성령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의 효과(에페 2,20)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위력을 끊임없이 체험하게 해 준다.

22ㄱ절: 이 구절은 루카 4,15.17과 똑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적극적인 4,14-44 대목과도 똑같은 울림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으로 빚어진 분위기를 암시한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놀라움과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또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고향 사람들은 하잘것없는 요셉의 아들이 정말 이사야의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도 되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굉장한 인물로 제시해도 되는지 의아해 한다.

루카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불완전하게 표현한다(‘놀라워하였다.’). 그 놀람에 대한 언급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그들이 큰 관심을 보였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설교는 ‘은혜로운 말씀’으로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표현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표현으로서 ‘마음에 드는 말씀’ 또는 ‘좋은 말씀’ 이상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적인 의미 이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호의, 은혜, 사랑을 선포하는 말씀으로 보인다. 이상한 것은 이어지는 구절들의 부정적인 내용이다(22ㄴ-92절).

22ㄴ-29절: 루카가 이야기를 펼치는 논리에서, 나자렛 사람들이 던진 질문(“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은 이미 예언자를 자기들에게 파견하신 하느님의 어지심 앞에서 고마워하는 경탄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과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마르 6,1-6ㄱ에서 말하는 내용과 비슷하다(“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논쟁을 시작하는 분이시라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고향 사람들의 반발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며, 본문 전체가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일정한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으리라고 가정하면 설명이 더 쉬우리라고 생각한다. 루카는 예수께서 다음에도 나자렛을 방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마르 6,1-6; 마태 13,54-58). 그러나 이 이야기는, 루카가 예수님 유년기 이야기들과 비슷한 본문을 만들어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정돈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운명을 당신 공적 생활을 통하여 앞당겨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이야기에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갑작스럽게 거절하는 태도가 연이어서 나온다. 예수께서는 살아가고 활동하면서 그런 체험을 끊임없이 하신다. 상황이 숱하게 뒤바뀐다. 사랑을 받다가도 미움을 받으신다.

루카는 ‘요셉의 아들’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동정녀에게 잉태되셨다는 이야기에서 판단할 수 있는 요소들을 이미 독자에게 제공했기 때문이다(1,26-38). 그 사실은 루카로 하여금, 예수께서 사실 육체를 따라서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실지라도, 나자렛 사람들의 정상적인 반응을 전달할 수 있게 허용한다. 그런 표현은, 유다의 관습과 반대로, 마태 13,55(‘목수의 아들’)의 표현과 마르 6,3(‘마리아의 아들’)의 표현처럼, 예수께서 당시 여느 유다인처럼 고향 사람들 사이에서 사셨음을 알아듣게 해 준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께 기적으로 당신 신분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그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신다. 당신 운명은 항상 자기 백성에게서 배척당한 모든 예언자와 똑같다고 말씀하신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당신 사명의 신적 성격을 놀라운 일로 확인해주는 일을 변함없이 거절하신다.

“.… 하는 속담을 들 것이다.” 미래 시제가 여기에서는, 다른 경우들에서처럼, ‘있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너희가 나에게 말하는 속담은 가능하다.”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루카가 하는 이야기의 논리에서 보면,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설교하시는 방식을 이미 알고 있다(루카 4,14-15의 요약에서 언급했다). 즉 말씀에 행적(기적까지 포함하여)이 뒤따랐음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은, 사람의 자유에 대하여 외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고, 참된 메시아의 구원에 대한 깊은 믿음을 심어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아멘’) 너희에게 말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멘’ 또는 ‘아멘, 아멘’은 ‘참됨’, ‘확고함’을 뜻하는 히브리어 개념을 셈족 언어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단어는 ‘진실로’라는 부사로 사용된다. 복음서들에서는 오로지 예수께서 선언하시는 장엄한 주장들을 소개하기 위해서만 그 표현을 사용한다(마태오 복음서에서는 31번;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13번; 루카 복음서에서는 6번). 많은 사람들은, 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독특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예수님 이전에는 사람들이 그 표현을 모르고 있었고, 따라서 ‘예수께서 몸소 하신 말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25절에서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엘리야와 견주고, 1열왕 17-18에서 이야기하는 비가 오지 않는 상태를 끌어다대신다. 엘리사와 나아만 이야기는 2열왕 5에 나온다. 그 두 예언자의 활동은(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경계 밖에서 활동하고, 엘리사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낫게 한다.) 루카로 하여금 예수께서도 당신 사도들을, 유다교를 넘어서서, 이방인들이 사는 온 세계로 파견하신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게 해 준다. 예수께서 들이대시는 그 두 예언자의 병행성은 완벽하지 않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엘리야는 사렙타에서 매우 성대한 대접을 받지 못했고, 엘리사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완전하게 배척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자렛이 꼭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지 않고, 카파르나움도 이방인들이 사는 온 세계를 가리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루카는 ‘선택의 신학’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즉 하느님은 당신 자비로 이방인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1열왕 17,1이 삼년 동안 계속된 가뭄을 언급했을지라도, 루카와 야고보서(5,17)는 그 기간을 삼년 육 개월로 늘리고 있다. 그렇게 기간을 늘린 것은, 종말론적 전쟁과 마찬가지로(다니 7,25; 12,7; 묵시 11,2; 12,6.14), 묵시문학이 박해와 불행을 겪는 세월로 생각하는 전통적인 기간을 상기시킨다.

28-29절은 우리에게 스데파노가 돌에 맞아 죽은 일을 상기시킨다(사도 7,58). 루카는 예수님의 운명에서 당신 추종자들의 운명을 본다. 언덕 가파른 곳에 세워진 나자렛에는 날카로운 돌이 많았다. 그 돌에 맞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30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로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이 사실이 꼭 기적을 뜻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자렛 사람 그 누구도 감히 예수께 돌을 던지거나 벼랑으로 떨어뜨릴 수 없었음을 뜻한다. 요한은 그와 비슷한 여러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요한 7,30.45 이하; 8,59에서는 아직 당신 때가 오지 않았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9,51에서 출발해서만, 루카는 예수께서 ‘붙잡히실 때’가 되었음을 인정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유아기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루카 1-2)에 비추어볼 때, 복음서 저자가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 아들의 엄위하심을 보여주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뜻에 따라 하느님이 메시아를 보호하고 계심을 보여주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식으로 루카는 예수님의 공적 생활에 관한 첫 번째 일화를 예수님 생애의 계획 전체로, 즉 이방인들을 구원하셔야 하는 당신 사명, 이스라엘의 불신, 예수께서 당하신 박해로 채워 넣었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본다. ㄱ) 성경 인용은 예수님의 활동을 하느님의 구원사업과 연결시킨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채워진다. ㄴ) 예수께서 경건한 유다인으로서 당신 지상 생애 동안 이스라엘의 가장 존중할 만한 전통을 지키셨음이 사실이라면, 독창적이고 의외의 형태로 하느님의 주권과 당신 나라를 독창적이고 의외의 형태로 선포하셨음 또한 사실이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구약을 이어가면서도 또한 완성하셨다. ㄷ)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산상 설교에서처럼,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께서 행하신 연설은 뚜렷한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그 차원은 루카 복음서 전체로 연장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아버지로 나타내 보이려 할 때,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구해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예언자, 메시아이신 나자렛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자비로운 얼굴을 보여주고자 할 때, 당신 성령의 권능을 주어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게 하셨다. 이렇게 루카의 전언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전언이 된다.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형제자매인 모든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다(참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루카 10,29-37). ㄹ) 루카 복음서의 이 대목은 또한 ‘말씀의 신학’을 담고 있다. 회당 전례에서 성경을 낭독함으로써, 나자렛의 보잘것없는 목수가 사람들에게 자기 사명을 알린다. 교회는 그런 모양으로 하느님께서 전례 안에서 우리 사이에 현존하여 계신다고 주장한다. ㅁ) 루카 복음서의 독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구체적인 도전과 도발로서 받아들이도록 초대를 받고 있다. 일단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밖에 남지 않는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하시는 능력 밖에 머물러 있다. 루카 복음서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 예를 들어 보여준다. ㅂ)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과 당신이 하시는 일을 애써 무시하려 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목숨을 걸고 당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알려주려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만 예수께서 베푸시는 혜택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 백성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경고가 된다. 그런 뜻에서, 사람을 죽이는 포도원지기들 비유(루카 20,9-19)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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