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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빈첸시오 신부의 여행묵상 13 - 꿈 꿀 권리 (이스탄블/터키)
작성자양상윤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10 조회수1,155 추천수2 반대(0) 신고

꿈 꿀 권리

 

 

이스탄불에서 내가 묵고 있던 숙소는 그 유명한 "블루모스크" 근처에 있었는데

 

술탄아메트역에서 숙소에 가려면 먼저 작은 공원을 지나야 했다.

 

4월말, 날씨도 좋고 해서 그런지 늘 그곳에 있는 벤치에는 여행객들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이 앉아있었고

 

어느 날인가 한번은 나도 그 벤치에 앉았는데 옆에 있던 청년이 말을 걸어 온다.

 

그에게 개인적인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사실 그 자리에 앉을 때부터 그 청년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날 날씨를 즐기고 싶었는지 아니면 이스탄불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곳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왠지 나도 벤치에 앉고 싶었었다

 

하지만 누군가 말을 거는 게 귀찮아서 혼자 있는 사람들은 피하고

 

둘이나 셋이서 열심히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 옆자리를 일부러 찾았었다.

 

혼자 앉아있는 사람 옆에 가서 내가 앉게 되면 열이면 열, 분명히 나에게 말을 시킬 것이라는걸

 

터키에 도착한지 며칠 안되었음에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터키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혼자 앉아있는 사람을 결코 그냥 놔두지 않는 

 

그들의 친절과 오지랍(?)의 넓이와 깊이를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벤치의 크기라는 게 서 너 명 정도도 충분히 앉을 수 있지만

 

비록 두 명이라도 넉넉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면

 

나 같이 소심한 사람은 옆에 끼어 앉기가 좀 애매한 길이이다.(완전히 비어 있는 벤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방해 받지 않고 나 혼자 편하게 앉을 수 있는 만만한 자리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그 청년은 벤치 모서리에 앉아서

 

바로 옆 벤치에 있는 사람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벤치가 거의 통째로 비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내가 찾던 바로 그런 자리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 앉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이스탄불의 날씨와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행인 줄 알았던 옆 벤치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떠나고

 

덩그러니 그와 나 둘만 남게 되면서부터

 

혹시나 그가 말을 걸어 오면 어쩌나 하고 살짝 긴장(?)하고 있던 터였다.

 

내가 얼른 자리를 뜨면 그만이었겠지만 귀찮기도 하고 그날은 특별히 갈 때도 없었다.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ㅡ.;;

 

 

 

 

 

 

 

 

   

이스탄불 풍경

 

 

 

터키인 인줄 알았던 그는 중동에서도 아주 보수적인 국가에서 온 이십 대의 청년이었다

 

얼마 전에 이슬람교에서 기독교(개신교이지 싶다)로 개종을 했고

 

그 나라에서 개종이라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지금 이곳 터키로 피신을 온 것이라고 했다.

 

친구들은 물론 부모조차 자신이 개종한 사실을 모르고

 

오직 그의 sister(누나인지 여동생인지 안 물어봤다)만이 알고 있단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다.

 

비록 같은 뿌리를 가진 종교지만

 

철들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신앙을 바꿀 때는 나름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내놓아야 할 만큼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혹시나 목숨을 걸어야 했다면, 가족을,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면 과연 나는 개종을 했었을까?

 

이십 대의 이 청년은 자신의 종교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가족을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던 곳을 떠나야 했다

 

지구상에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피부로 느끼기는 처음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 이 청년에게는 너무나 힘들고 위험한 일인 것이다.

 

 

 

한때 우리도 그런 시대에 살았었던 적이 있었다.

 

공산주의를 하자고 총칼을 든 것도 아니고

 

단지 공산주의에 대해 공부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좋게 말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감옥에 갔었던 시절 말이다

 

고문당하고 때론 죽기도 했다.

 

꿈 꿨다는 자체만으로도 감옥에 가고 고문당하고 때론 죽어야 했던 시절.

 

바로 이웃인 일본을 비롯한 다른 몇몇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시대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 독재의 우두머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고

 

특수한 상황에서는 꿈꿀 자유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더 무서운 일은

 

아직도 그런 일을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그 청년의 나라에서는 이슬람외에는 어떤 종교든 꿈꿀 수 없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 이외에는 어떤 것도 꿈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본주의, 이슬람교기독교에 대해 말 하는 것이 아니라

 

꿈 꿀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외에도 무슨 이유로 개종을 했는지,

 

그가 느끼는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나도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고

 

가톨릭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했지만

 

쉽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외국에 살고 있는 입장이어서 그런지 그런 말을 들으니 그가 더욱 안되 보였다.

 

더구나 나는 내가 원해서 떠나온 것이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떠나온 것이 아닌가?

 

또한 나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갈수 있지만

 

그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처지 인 것이다.

 

 

 

그냥 거리를 걷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좋았던 4월의 이스탄불.

 

아침 저녁으로는 좀 써늘하지만

 

낮의 햇살은 더 없이 따뜻하고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도 더 없이 신선했던 이스탄불의 봄날,

 

이렇게 좋은 날씨에, 이렇게 좋은 곳에서,

 

우리는 그것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심각하고 우울한 이야기를 나눴다.

 

혹시나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처음부터 혼자 있고 싶었고

 

왠지 이 청년이 말을 붙일까 봐 긴장을 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별 준비 없이, 별 생각 없이 떠나 온 이번 여행에

 

뭔가 생각 꺼리는 주려고 나의 "하느님"이 그를 나에게 보내준 것은 아니었을까?

 

 

 

꿈꿀 권리 마저 박탈당한 나라에서 온 그 청년과 헤어지면서 나 스스로에게 물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젊은 날 목숨을 걸만큼 뜨거웠던 그 무엇이 있었는지?

 

그리고 신부(神父)인 나는 내 신앙에 그 만큼 절실함을 가지고 있는지?

 

 

 

- 10, 20, 30일에 업데이트 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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