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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20.“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20 조회수1,568 추천수1 반대(0) 신고

 

루카 9, 23-26(성 김대건과 성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성인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100년 동안에 1만여 명의 순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11위의 성직자와 92위의 평신도, 모두 103위께서 198456일에 시성되셨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울로는 말씀하십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나갔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자신을 버려는 것이요, <둘째>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셋째>는 진리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바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첫 번째의 길>‘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다’의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라는 뜻으로,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의 길>‘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진다’는 원어의 뜻이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는 것이기에, 죄의 용서를 소중히 맞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곧날마다 죄의 용서를 품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고통 중에 있어도 안으로는 자비와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의 길>‘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 지향이 오로지 예수님께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선조 순교성인들이 바로 그렇게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지만, 살아있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사실은 이미 순교현장에서 드러났습니다. 곧 우리 순교자들의 기록에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더러 일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전번 문초 때에 형리였던 사람이 다음 번 문초 때는 피고석에서 문초를 받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천주교교리를 순교자들로부터 배워 알게 되고 어느덧 신자로 돌변하여 자신들이 휘두르던 칼날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게 된 것입니다. 곧 심문 받는 형장이 바로 전교지요, 신앙의 증거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죽음은 죽음의 현장에서부터 이미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안에서도 죽었지만 살아있는 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부 떼르뚤리아누스는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순교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교자들 삶과 복음을 돌아다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그러기에 순교자들은 비록 겉으로는 고통의 십자가를 지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믿음의 승리의 십자가를 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죽음을 당하면서도 안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면서, 박해하는 이들마저 사랑으로 품고 벅찬 기쁨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에 희망을 걸고서 말입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바쳐야하는 순교를 강요하지는 않을지 모르나, 여전히 하늘나라의 정의와 진리를 위한 투신의 삶은 시대와 세속정신을 거슬려 박해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으로 녹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살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이 가슴에 품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흔연히 십자가의 사랑을 끌어안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빠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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