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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말씀의 전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2,434 추천수0

[전례 해설] 말씀의 전례

 

 

어느 신자가 우리 본당으로 이사를 왔다. 전 본당에서는 여러 가지 교회 활동을 하였지만 새 본당에는 아는 사람도 없고 자기 시간도 갖고 싶어 활동을 중단하려고 마음먹었다. 주일 미사 참여만 잘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성당에 갔다. 참회 예절 직전에 주례 사제는 그날 독서 한 구절을 설명하고 모두 반복하라고 하였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 4,13). 조용히 쉬려고 맘먹었던 신자가 깜짝 놀랐다. 자기 마음을 꿰뚫어 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신부의 가정 방문 때에 이 깨달음을 실토하였다.

 

 

듣고 읽고 응답하라

 

방탕 생활에 빠졌던 성 아우구스띠노가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어떤 어린이의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잡아라. 읽어라.”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것은 성서를 펴 놓고 최초로 눈에 띈 장을 읽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임에 틀림없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로마 13,13).

 

“나는 그 이상 읽으려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모든 의혹의 어둠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고백록 12장).

 

말씀의 전례란 무엇인가. 가장 쉽게 대답한다면 잘 듣고, 잘 읽고, 잘 응답하는 예절이다. 신앙은 들음에서 온다(로마 l0,17). “들어라” 하고 예언자 아모스와 예레미야가 외쳤고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다(마르 4,3).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가 2,19).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루가 11,28)고 하셨다. 사람들은 하느님께 자기 말을 들어 달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경건하게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자들의 말을 들으신다.

 

 

귀머거리, 반벙어리 신자들

 

“말씀의 전례 중 주요한 부분은 성경의 독서들과 그 사이에 외는 시구로 되어 있다. 강론, 신앙 고백, 신자들의 기도는 말씀의 전례를 더 깊이 설명하고 끝맺는다”(미사 경본의 총지침, 33항).

 

독서는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말씀의 전달이며 강론은 현실 생활에 적응하도록 호소하는 하느님 말씀의 설명이다. 그래서 이 말씀 속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신자들 가운데 현존하신다. 또한 하느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치유, 구마, 부활 등 능력을 발하였듯이 성서 말씀은 우리 구원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말씀의 전례 중 성서 봉독이 끝나고 강론을 듣기 위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졸거나 분심 잠념에 빠진다. 조는 사람의 귀는 들리지 않고 입은 벙어리가 되며 마음은 완악해진다. 사도 행전(20,9)에는 유디코라는 청년이 나온다. 주의 만찬을 나누려고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바오로 사도는 밤이 깊도록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일종의 강론이었다. 창문에 걸터앉아 있던 유디코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그만 삼층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듣지 않는 자는 귀머거리 신자요, 읽지 않는 자는 벙어리 신자이며 응답하지 않는 자는 재판받을 신자이다. 인간은 경청하기를 싫어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호소에 귀머거리가 되고 그의 귀와 마음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사도 7,51 창조). 예수님의 기적이란 귀먹은 백성이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고 복종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마태 11,5 참조).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 4,12).

 

 

미사 독서

 

말씀의 전례는 유다인들이 안식일날 시나고가(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듣는 데서 유래하였다. 율법에 관하여는 창세기로부터 마카베오 후서까지의 역사서, 예언서로서는 시편에서 지혜서, 이사야에서 말라기의 예언서까지 포함하였다.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도 시나고가에서 강론하였다. 초세기에는 독서 관습에 따라 연속으로 읽었으나 후에 선택 또는 준연속 독서로 바뀌었다. 5세기경부터 독서책이 나왔고 중세기에 독서는 미사경본에도 수록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헌장을 통하여 말씀의 보고를 개방하였고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독서 순서를 만들었다. 주일과 대축일에는 세 개의 독서를 넣어 삼 년을 주기로 성서의 주요 부분을 다 봉독하여 구원 역사를 전반적으로 듣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가’ 해에는 마르코, ‘나’ 해에는 마태오, ‘다’ 해에는 루가 복음을 읽도록 하고, 제l독서는 구약 성서이지만 복음 성서와 서로 주제의 조화를 갖도록 하였으며 제2독서(서간)와 복음은 준연속으로 읽도록 하였다. 또한 평일에는 주일과 대축일의 보충 부분으로 엮었다.

 

독서의 공식적인 장소는 강단이다. 강단은 제대 다음으로 중요하며 가능하면 고정시켜야 하고, 훌륭하고 튼튼한 재료로 제작하여야 한다. 이 강단에서 독서, 응송, 복음, 강론, 신자들의 기도, 부활 찬송, 지휘 등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해설자가 강단을 차지하면 안된다.

 

독서자는 사전에 성서 내용을 이해하고 묵상해야 하며 기술적으로 정확히 읽어 진정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해야 한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신자들은 응송으로 찬미드린다. 제2독서 다음에는 알렐루야로 찬양하며 복음과 강론이 끝난 다음에는 신앙 고백과 신자들의 기도로서 응답한다. 이렇게 말씀의 전례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동시에 인간의 성화(聖化)를 위하여 하느님과 인간과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 말씀 : 제1독서, 제2독서, 복음과 강론.

인간의 응답 : 응송, 알렐루야, 신앙고백, 신자들의 기도.

 

 

성서 봉독과 응송

 

독서로써 말씀의 전례가 시작된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식탁을 준비하도록 하셨듯이, 하느님께서 오시도록 말씀의 식탁이 준비되고 성서에 숨겨진 황금 같은 보화가 신자들에게 드러나도록 한다. 신자들은 앉아서 독서자의 성서 봉독을 조용히 경청한다. 전통에 따라 독서는 사회자의 임무가 아니고 조력자들의 임무이다. 그래서 현재 독서는 평신도가 담당하고 독서하는 사람을 독서자, 독경자, 봉독자라고 한다.

 

잘 준비한 독서자는 성서 말씀 하나하나가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닿아 새 삶을 가져오도록 한다. 쓰여진 글이 하느님의 말씀이 되도록 할 적에 듣는 신자들이 모두 “과연 그렇습니다.” 하고 반응을 보일 수 있다. 독서 끝에 “이는 주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대답이 없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잘 깨달은 신자들은 “천주께 감사!” 하고 큰소리로 외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응송이 기쁘고 우렁차게 나올 것이다.

 

유다인들의 회당에서 독서나 강론 후에 노래가 있었고 교회 초기에도 시편이나 창작 노래를 불렀다. 이것을 응송, 층계송, 응답이라 표현했는데 현재는 응답의 시편 또는 응송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제1독서 끝에 응송을 노래하거나 낭독한다. 이것은 말씀의 전례를 보완하는 것이다. 또한 신자들로 하여금 방금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그에 순종하도록 하는데 뜻이 있다. 이 응송은 성가대나 독창자 또는 교우 전체가 함께 노래하거나 기도할 수 있다.

 

응송의 시구는 독서책에서 취하는 것이 정상적이다(마사 경본의 총지침, 36항). 독서의 시구는 그날 독서와 직접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응송은 대부분 시편으로 되어 있다. 이 시편에는 인간의 희노 애락, 행복과 불행, 역경과 근심, 신뢰와 의혹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응송은 오랜 세월과 교회 전통 속에 남아 있는 삶의 표현이고 하느님께 드리는 인간의 찬미요 원의이다.

 

[경향잡지, 1991년 11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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