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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죄의 고백과 용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1,897 추천수0

[전례 해설] 죄의 고백과 용서

 

 

본당 야외 미사 겸 단합 경기 대회를 백팀과 청팀 대신, ‘한 마음’ 팀과 ‘내 탓이오’ 팀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티셔츠도 양편으로 갈라 입었다. 요즘 한창 교회에서 벌이고 있는 ‘한 마음 한 몸 운동’과 ‘내 탓이오’ 운동을 구현하는 좋은 계기였다. 경기 종목마다 승패가 엇갈렸지만 한 마음 팀이 승리하면 진정 한마음 한 몸으로 때문이라 생각하고, 패할 때엔 무엇이 부족하고 잘못이었는지 ‘내 탓이오’ 팀처럼 반성하고 결점을 인정하는 자세여서 좋았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패했을 때 그는 몸둘 바를 모르고 팀 전체에 말과 행동으로 미안함을 표현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를 단련하는 운동 경기에서도 잘못과 결함을 발견하고 반성과 고백이 따른다. 허물며 미사에 참여한 신자들이 영신적인 결함을 찾아내어 인정하고 참회하는 모습은 타당하고 경건한 예식이 아니겠는가.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와 응답이 끝나면 사제는 “그날 미사의 전체 뜻을 짧게 설명할 수 있다. 그다음에 사제는 참회의 정을 발하자고 권고한다. 교우들이 일반적 고백을 하면 사제의 사죄로 끝 맺는다”(미사 총지침 29).

 

사제는 미사의 사회자이다. 미사를 시작하면서 그날 미사 지향이나 성서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 간단히 제시해 주면 참여한 신자들이 훨씬 정신 집중을 잘하게 된다. 예컨대 주의 승천 대축일이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복음을 선포하여라.’ 과연 우리는 복음 전파에 얼마나 힘썼는지 잠시 반성해 봅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간단 명료한 표현이다. 말이 길면 짧은 ‘강론’이 된다. 길면 하지 않는 것만도 못하다. 또 꼭 해야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미사의 대의(大意) 설명은 짧을수록 좋다.

 

 

참회 양식

 

가 · 나 · 다 세 가지 형식이 있지만 모두 참회 권고, 침묵, 공동 고백, 사죄의 순서로 되어 있다. 예수 이전 시대부터 회당에서 예배할 적에 참회 예절이 있었다. 사도 시대에도 성찬 예식 전에 죄의 고백과 참회 예식을 했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Didache : 100년경 쓰여짐)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주일에 모인 신자들은 영성체 전에 고백을 통해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한다”(14,1).

 

옛 미사책에도 현재와 비슷한 고백의 기도가 있었다. 다만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할 때(1965년 이전)에는 사제와 복사가 제대 앞 층계에서 무릎을 꿇고 교대로 암송하였다. 현 미사에서 신자들은 고백의 기도를 합송하지만 내용은 ‘우리’의 고백이 아니라 ‘나의’ 고백이다. 우리 나라 말로는 ‘나’가 생략되었지만 외국어(라틴어 : Confiteor, 독어 : Ich fekenne)로는 “나는 전능하신 천주와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라고 분명히 ‘나’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고백을 한다. 하느님만이 온전히 죄와 벌을 용서할 수 있으시다. 우리는 또 서로의 죄를 고백한다. 각 개인의 죄는 사회적인 연대성을 가지며 교회 공동체에도 죄가 된다. 죄란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하여 오로지 피조물(인간과 물질)과 악에 집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해치고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특히 교회와의 관계를 해친다. 이렇게 삼중의 배반자인 죄인은 세 영역에서 화해를 이루어 다시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와야 한다. 즉 하느님의 영역, 교회 영역, 자기 영역에서 화해해야 한다.

 

 

개인 고백부터 하라

 

고백의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미사 전에 사제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한다. 앞에 인용한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 이런 가르침도 었다. “주의 계명을 범하지 말라. 받은 것은 그대로 보존하고 더 보태지도 빼지도 말라. 집회(Ecclesia : 교회)에서 네 죄를 고백하고 양심의 가책을 지닌 채 기도를 시작하지 말라”(1,4). 사도 행전(19,19)에도 “많은 신도들이 와서 자기들이 한 일을 숨김없이 자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의 화해이다. 예수님은 좀더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다”(요한 20,23).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몸을 희생시키시어 여러분과 화해하시고”(골로 1,22). 그러나 그분은 죄인이 하느님과 화해한다고 할지라도 우선 형제와 화해하지 않으면 하느님 뜻에 맞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

 

 

죄와 의무 소홀

 

고백의 기도에서 의무 소홀은 죄와 마찬가지이다. 무관심, 비협조, 선행이 없는 것은 태만, 인색, 무지, 교만의 죄다. 강도를 만나 반은 죽은 이를 보고도 지나쳐 버린 사제나 레위 사람의 이야기를 알지 않는가(루가 10,30-37 참조). 또 등잔은 가지고 있으면서 기룸은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마태 25,3) 꼴은 어떤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금화의 비유 : 루가 19,11-27) 무위 도식한 몹쓸 인간(종)은 아닌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루가 5,22). 예수님이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데 대하여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수근거렸다. 예수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가 5,21). 그 대답은 중풍 병자가 실증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었다”(요한 2,25). 생각은 행동의 시도이다. 그래서 생각으로도 죄 짓지 말고 생각의 죄도 고백하라는 것이다.

 

 

혀는 악의 불씨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사람이라고 야고보서(3장)가 지적하였다. 조심할 것이 셋 있다. 첫째,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 둘째는 입 조심이요, 셋째는 혀의 단속이다. 말 많은 사람은 입에 재갈을 물고 허풍떨지 말라는 것이다. 혀는 불과 같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불살라 버린다. 혀는 독으로 차 있고 길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갈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와서야 되겠는가. “십자가에 못박으십시오.”라고 외친 혀의 칼로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는가. 가장 나쁜 것은 내뱉는 못된 말뿐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좋은 말(인사, 칭찬, 감사, 경의)을 않는 죄이다.

 

행위는 어떠했는가. 오늘이 세상 끝날이라면 어떤 판결을 받겠는가. “그때에 예수님은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마태 16,27). 바오로 사도도 비슷하게 말씀하셨다.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1고린 3,13).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했는가. 자기 일에 책임질 수 있는가. 사명감을 가지고 했는가. 태업이나 무위 도식하지 않았는가. 부정과 불의는 없었는가. “무슨 일이나 사람을 섬긴다는 생각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섬기듯이 정성껏 하십시오”(골로 3,23).

 

 

하늘의 분노는 누구 탓인가

 

‘내 탓이오’ 하면서 왜 가슴을 치는가. 의사가 환자를 진맥할 때 가슴을 톡톡 쳐본다. 안 보이는 내장의 이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영혼의 건강은 더 중요한 일이다. 남의 손보다는 자기 손으로 확인해 보아라. 예수께서 돌아가셨을 때 “구경을 하러 나왔던 군중도 이 모든 광경을 보고는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루가 23,48). 바리사이파 사람은 내 탓은 없고 저 놈 탓만 나무랐다. 한편 세리는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루가 18,13) 하고 기도하였다.

 

땅에서 울부짖는 원성은 하늘이 듣는다. 하늘이 노(怒)하는 죄가 있다. 살인(창세 4,10), 동성 연애(창세 18,20). 빈자를 등치고, 노동자를 착취하며, 부당 임금을 지급한 죄(야고 5,1-6)이다. 교회 역사상 큰 죄가 네 가지다. 살인, 불신앙, 간음, 우상 숭배다. 쇠 파이프에 맞아 사람이 죽었다. 물고문, 성고문, 최루탄, 돌, 화염병이 살인 현장에 있었다. “당신들은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야고 5,6). 누구의 탓인가. 내 탓이 아닌가. 동조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런 사람을 지도자로 뽑지 않았는가.

 

[경향잡지, 1991년 7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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