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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미사

제목 [미사] 주일과 미사 참여: 잘못된 사고 방식 세 가지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2,778 추천수0

[전례 해설] 주일과 미사 참여 : 잘못된 사고 방식 세 가지

 

 

주일은 평일의 보충일인가 주일은 잠자는 날, 피로를 푸는 날, 스트레스 해소하는 날, 기분 전환의 날, 드라이브하는 날, 밀린 공부, 밀린 일 처리하는 날, 환갑, 혼인, 생일 축하하는 날, 등산, 수영, 낚시, 관광, 스포츠, 전시회, 예술제의 날, 애인, 친구, 동창, 사교 모임의 날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할 여지도 없이 당연시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이것이 옳은 생각이고 옳은 판단인가. 주일은 평일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평일의 보충일이고 연장의 날인가.

 

구약 성서 창세기(2,3)의 기록을 음미해 보자.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하느님이 안식일에 세 가지 행동을 하셨다는 뜻이다. 즉 쉬시고, 거룩한 날로 정하시고, 축복하셨다. 다시 말하면 주일은 안식일이요, 축제일이요, 은총의 날이다.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이것은 하느님이 창조 사업을 시작한 첫날의 일이었다. 즉 창조의 첫째 날이었다. 신약 성서에서 우선 네 복음서는 끝 부분에 예수님의 부활 기사가 나오고 부활 날이 바로 주간의 첫날인 일요일이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맨 먼저 ‘주간의 첫날’이란 말을 쓴 사람은 바오로 사도였다(55년경). 공동 번역 성서에는 일요일이라 하였으나 원어는 첫째 날(1고린 16,2)이라 하였다.

 

다음으로 요한 묵시록(1,10; 95년경)은 주님의 날 즉 주의 날, 또는 주일이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2세기 중엽에는 여드레 날이라고도 불리었다. 일요일이란 말은 3세기경 지중해 전역에 알려진 이름으로 역시 종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 즉 태양신으로 공경하던 ‘해’를 정의의 태양(말라 3,20), 세상의 빛(요한 8,12), 참 빛, 사람들의 빛(요한 1,4)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날로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주일은 무엇보다도 주님이 부활하신 날로 일주일 중에서 부활축일인 셈이다. 이날은 주님께 속하는 거룩한 날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여 영원한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묘지를 찾은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현존은 주일 미사 중에 이룩된다.

 

“주의 만찬인 미사 때에 하느님의 백성은 주님을 기념하는 미사성제를 봉헌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사제를 중심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십자가상 제사의 계속인 미사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단체 속에 실제로 계시며 사제의 인격과 당신의 말씀 속에 현존하시며 본체적으로는 온전히 성체의 형상 속에 현존하시는 것이다”(미사 경본 총지침 7).

 

주일은 주님과 만나는 날, 감사의 날, 속죄의 날, 봉헌의 날, 희망의 날, 나눔의 날, 사랑의 날, 구원의 날, 파스카의 날, 믿는 이들의 축제일이요 잔칫날이다.

 

주일에 미사만 마치고 세속 일에 묻히는 사람은 주일의 의미가 반감된다. 이 하루를 피정, 묵상, 기도 영적 독서, 애덕 실천 등으로 경건하게 보내야 할 것이다.

 

 

미사 구경이냐 미사 참여냐

 

이런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미사본다는 말이 옳은 표현인지요?” 눈은 몸의 등불이요 마음의 등불임에 틀림없다. 눈과 눈을 맞대고(for eye to eye : 이사 52,8 참조) 하느님을 뵈옵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애틋한 갈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복 직관(至福直觀)이란 표현을 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1고린 13,12).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천국의 영원한 복을 이야기하여도 태생 소경에 불과하다. “너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다”(이사 42,20).

 

사람은 눈과 귀와 손발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감각 기관이라 하고 이 감관(感官)을 통하여 보고 듣고 만져서 주위 환경을 잘 깨닫게 된다. 그런데 누가 미사를 보러 간다고 말한다면 ‘미사는 어떻게 하는가, 누가 왔는가, 장식은 어떻게 하였는가’를 구경하러 간다는 뜻밖에 없다. 그런데 실제로 미사 구경 온 구경꾼인지 관광객 같은 신자들이었다. 물론 처음 온 이, 예비자, 갓 입교한 영세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미사 참여 전에 오늘이 무슨 주일인지, 성서의 내용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온 신자들, 그리고 반성하는 태도도 없이 앉아 있다면 관광객이 아니고 무엇인가. 미사 중에 무엇을 할 것인가. 두리번거리고, 지루하고, 분심 잡념만 머리에 가득 찰 것이 아닌가. 미사 참여는 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와 입과 혀와 감정과 마음을 합하여 하는 것이다.

 

옛부터 한국 신자들은, 미사는 거룩한 제사이기 때문에 미사 성제(聖祭)라 하였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하여 미사에 참례(參禮)한다거나 미사 성제를 드린다고 하였다. 비슷한 뜻으로 미사 성제 거행, 미사 봉헌, 또는 미사를 드린다고도 한다. 그리고 미사를 집행한다는 뜻으로 미사 집전이라고도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참여’란 말을 많이 사용하여 신자들에게 의식적이고 능동적이며 몸과 마음을 포함한 온전한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능동적 참여를 촉진하기 위하여, 회중의 환호, 응답, 시편 교송, 대경, 성가와 함께 행동과 동작과 몸가짐 등을 올바르게 하도록 유의하여야 한다”(전례 헌장, 30항).

 

미사 봉헌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행위이므로 집전 사제와 참석한 신자들 사이의 대화와 응답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미사 참여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듣고 보고 노래하며 침묵도 지켜야 한다. 특히 제물 봉헌과 영성체로써 한 몸을 이룬다. 따라서 우리는 사제와 함께 미사를 공동 집전하는 것이다.

 

 

미사 참여는 의무 수행일 뿐인가

 

어느 본당에서 신자들이 미사 시작 시간을 지키지 않으니까 “미사 시작 오 분 전에 오시오.”라고 성당 입구에 큰 글자로 써붙이고 미사가 시작되면 정문을 잠궈 버렸다. 이를 안 신자들은 문밖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하였다.

 

미사 집전은 시간을 다투는 경기인가? 경기를 시작할 때 출발 신호에 따라 달려서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달려 성당을 빠져 나가고자 한다. 복음 전파를 위하여 달려 나가는가? 미사 후의 세상 계획을 죽 세워 놓은 신자들, 강론이 길면 투덜대고 10분만 길어져도 못 참고 튀어나가는 신자들은 무엇을 위한 신앙인들인가?

 

믿음의 축제는 ‘교회 즉 백성의 축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평신도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전례 행사에 참여함을 뜻한다. 참여의 정신은 주인의 자세이며 전례의 중심은 미사이다. 원래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주인답고 낙관적이다. 부정적 신자는 싫증, 우울증에 걸린 듯 남을 옆으로 흘겨 보며 깎아 내리길 좋아한다. 소극적 신자는 피동적으로 끌려 온 듯 시간도 안 지키고 뒷좌석에나 앉아 있다가 끝나기가 무섭게 달아난다. 손님 같은 신자는 책임감이 없다. 방관적이고 남의 눈치나 보다가 대세에 밀려 행동한다.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의무 축일에 미사 참여할 의무가 있다. 또한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경배, 주님의 날의 고유한 기쁨 또는 마음과 몸의 합당한 휴식을 방해하는 일과 영업을 삼가야 한다”(교회법, 1247조).

 

이런 조항은 최소한의 의무 규정이며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은 주일 하루를 온전히 하느님 뜻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거룩하게 지내라는 것이다. 장소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주일과 의무 축일에는 미사에 참여하고 세례받을 때 고백한 믿음의 생활을 갱신하며 더욱 충실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사 중에(연중 주일 감사송 참조) 감사드리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생명보다 더 중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매일은 못해도 주일만은 감사 생활이 되어야 한다.

 

[경향잡지, 1991년 2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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