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전례/미사

제목 [전례] 순교자 공경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1,608 추천수0

[전례 해설] 순교자 공경

 

 

승천하시는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따라서 사도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바를 증언해야 할 사명이 있다.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도들과 똑같은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업적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이들을 우리는 순교자들이라고 부른다.

 

순교자들은 신앙의 영웅으로 원시 교회에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한편 신앙을 위해 투옥당하고 고문당했던 사람들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들도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증인들(Martyres)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이 순교자들과 구분되어 고백자들(Confessores)이라고 일컬어졌다. 고백자들이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는 다음과 같은 특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들은 큰 과실 때문에, 특히 신앙을 부인했기 때문에 보속을 해야만 하는 신자를 위해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청하는 추천서(libellus pacis)를 발행할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주교에게 그를 다시 교회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다는 일종의 추천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 때문에 죽은 좁은 의미에서의 순교자들이 일찍부터 큰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에 따라 순교자 공경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구체화되었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영예로운 무덤에 잘 모셔졌고, 순교자들의 피까지도 천으로 모아 보관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순교한 기념일에 특별한 경신례가 거행됐다. 여기에는 죽은 보통 사람들의 기념일과는 달리 친척들뿐만 아니라 신앙 공동체 전체가 참여했고, 순교자 기념일은 기쁨의 성격을 띤 지속적 기념일이 됐다.

 

한편, 로마에서는 해마다 거행되는 순교자에 대한 기념 흔적이 3세기에 비로소 발견된다. 갈리스도, 본시아노, 파비아노와 같은 순교자 교황들이나 주교들을 위해 로마와 그 밖의 도시에서 매년 순교자 기념일을 지냈던 것이다. 250년 이후에는 주교가 아닌 순교자들도 전례적으로 공경했는데, 라우렌시오 부제가 최초의 그러한 순교자였다. 뒤이어 아녜스, 루치아와 같은 동정녀 순교자들도 전례적으로 기념됐다. 또한 같은 시대의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풍습은 이전의 위대한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축일의 탄생을 가져왔다. 예컨대 3세가 이래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이 6윌 29일 거행되기 시작했다.

 

313년 밀라노 관용령(寬容今)과 함께 박해가 종지부를 찍었을 때, 바야흐로 순교자 공경의 위대한 시기는 개막됐다. 유명한 순교자의 무덤 위에는 이미 박해 시대에 이교도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무덤 건축물(Cellae 혹은 Memoriae)들이 있었다. 이 건축물들은 작고 개방된 소성당들이었다. 신자들은 순교자 기념 경신례를 거행하기 위해 넓은 들판에 있는 그러한 작은집(Cella) 앞에 모일 수 있었다. 주일 공동체 경신례도 여기서 거행될 수 있었다. 신교(信敎)의 자유를 얻게 되자 소박한 무덤 건축물들은 재빨리 아름다운 바실리카(Basilica)로 변해 갔다. 로마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285?~337) 자신이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라떼라노 대성전의 건립자가 됐다. 그밖에 4세기와 5세기에 건립된 순교자 바실리카들은 성 세바스띠아노, 성 고르넬리오, 성 네레오와 아킬레오, 성 라우렌시오, 성녀 아녜스, 성 실베스텔, 성 발렌티노, 성 방그라시오, 성 스떼파노 성전들이다. 이 무덤 성전들은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했다. 교외에 공동 묘지가 있었고, 순교자들도 거기 묻혔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인들에게는 법률로 보호된 원칙 한 가지가 있었는데, 무덤이 어지럽혀져서는 안되고 시신은 특별 허가 없이 이장할 수 없다는 원칙이었다.

 

순교자들을 위한 경신례도 풍부하게 발전됐다. 4세기 중엽 로마 교회의 간단한 축제력에 의하면 24개 축제일 가운데 두 가지 축일만이, 즉 성탄 축일과 베드로좌 축일만이 순교자 축일이 아니다. 물론 주일들이 있고, 부활 대축일과 성신 강림 대축일이 있다. 얼마 후에는 더 많은 순교자들의 기념일이 생겼는데, 물론 그 모든 축일은 모든 신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 축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축일들은 해당 순교자의 무덤 교회에서 거행됐다. 무덤 교회는 이날이 되면 매번 너무 협소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자 축일에 모여 왔기 때문이다.

 

순교자 축일은 본래 미사 거행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비교적 후대의 성무 집행록들(Sacramentarii)은 순교자 미사를 많이 담고 있다. 미사 전례가 대순교자들의 축일 때는 축일 전야 예식을 통해 잘 준비됐다. 전야 예식 중에는 성서가 읽혀지고 해당 순교자의 순교기가 읽혀지고, 사이사이 기도를 바치고 성가를 불렀다. 이러한 전야 예식은 여러 가지 비행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엘비라 시노드(303년)에서 부인들은 전야 예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결정했다. 어쨌든 전야 예식의 절정은 순교자 무덤에서 거행된 미사이다. 처음에는 보통 드리는 미사로 순교자를 기념했지만, 나중에는 독서, 성가, 기도, 감사송까지 순교자에 대 한 주제가 선택됐다. 5-6세기에는 미사의 성찬 기도 안에서도 순교자의 이름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친밀한 관계 때문에 오랫 동안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공경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구세주로 오셨다는 자기 증거를 죽음으로써 증명했다.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를 죽음으로써 증명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해 자신을 승리자로 증명했던 것처럼, 그분의 수난에 참여한 순교자들도 그분과 함께 승리할 것이다. 이 생각은 순교자들을 강하게 한 요인이다.

 

신자들은 순교자의 전구에 무한한 신뢰를 가졌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의 무덤 옆에 묻히길 열렬히 원했다. 순교자 가까이 묻히면 부활 때 틀림없이 순교자와 함께 부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는 여기에 반대하는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만 했고, 중요한 것은 성인들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을 본받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만 했다. 한편 순교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열성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선 위안상(Refrigerium) 내지 사제 밥상은 죽은 이와 함께 이루는 공동체, 순교자와 함께 이루는 공동체 그리고 순교자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고자 했으나, 그것은 마치 일종의 경신례처럼 순교자 바실리카 안에서 거행했을 뿐 아니라, 그 식사는 점차 진탕 먹고 마시는 자리가 됐다. 그래서 히뽀 시노드(393년)에서는 이것을 바실리카 안에서 행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옛 그리스도교에는 비교적 큰 도시들 안에 두 종류의 교회들이 있었는데, 시내에는 공동체의 경신례를 위한 교회들(본당들)이 있었고, 시외에는 공동 묘지에 순교자 바실리카들이 있었다. 그런데 순교자 바실리카에서도 자주 규칙적으로 주일에 공동체를 위한 경신례를 거행했다. 순교자들에 대한 열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신자들이 순교자 바실리카로 몰려 시내에 있던 공동체를 위한 교회들은 여러모로 피해를 입게 됐다. 따라서 교회는 그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됐다. 그 해결책으로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성해를 시내에 있는 교회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모든 교회들은 그들의 순교자를 모시게 됐다. 새로 생긴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에는 순교자의 무덤이 없었기 때문에 성해의 이동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로마와 서방 교회는 이에 반대했다. 로마에서도 6세기 이래 순례자의 무덤에 순례하기 힘든 상황이 되자 점차 순교자 성해를 사내 성당에 모시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시내에 있는 교회들과 순교자 바실리카들 사이에 균형이 잡혔다.

 

순교자 공경은 하느님의 집을 설비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성해는 한 교회를 나타내는 귀한 보물이었고, 그래서 이 귀한 보물을 보관하기 위한 용기들이 값진 재료로 만들어 졌고, 가능한 한 모든 형태를 동원해 만들었고 심지어 성인의 흉상을 만들어 그 안에 성해를 넣고 봉해 보관하기도 했다. 순교자 공경은 초기 교회에서부터 중세기 전체를 통해 아주 열렬했다.

 

[경향잡지, 1989년 11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