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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4세기와 5세기의 전례 생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1,547 추천수0

[전례 해설] 4세기와 5세기의 전례 생활

 

 

그리스도교는 4세기와 5세기에 아직 사목을 위한 체계적 조직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스도교적 교육 기관도 없었고, 교회에 의한 어린이 교리 교육도 없었고, 청소년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 단지 전례가 있었고, 자선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신자들은 활기찬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힘차게 생동하는, 살아 움직이는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례는 그 당시 “신적 제정(神的制定)인 연고로 변경할 수 없는 부분(전례 헌장, 21항)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대중에게 친근한 문화 표현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아주 친밀했다. 특히 전례에서 대중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참석자가 전례를 바르게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전례가 교육적 기능도 수행했다.

 

이 시기의 경신례에서는 성서가 많이 읽혀졌다. 주일 미사뿐 아니라 아침 · 저녁 기도 안에도 독서가 있었다. 이와 함께 교부들은 성서 독서에 대한 설교를 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서에 대하여 비교적 폭 넓은 지식을 가졌다. 교부들은 성서를 해석하는데, ‘선약 성서는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 성서는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 성서 곳곳에서 구세주의 희미한 모습, 교회와 세례에 대한 표상들을 보았다. 신자들은 경신례를 통해 시편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모든 독서에는 보통 공동으로 불렀던 시편이 뒤따랐다. 선창자는 맨 먼저 신자들이 부를 후렴을 선창함으로써 응답송의 방식으로 시편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선창자는 시편을 시작했고, 매 구절 다음에 신자들은 후렴을 반복했다. 이 구절들은 주례자에 의해 정해졌다. 예컨대, 크리소스또모(347-407년)는 부활절에 후렴으로 ‘이날은 주께서 만드신 날이다.’라는 구절을 반복케 했다. 그는 이 후렴과 시편 41장을 결합시켰다. 그는 또한 신자들이 노래를 통해 친근해진 그 구절들을 그들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 주기 위해 설교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아우구스띠노(354-430년)는 말했다. “우리는 시편을 노래했고, 서로서로 힘을 북돋워 주었고 한마음 한 목소리로 외쳤다 : 오십시오, 기도합시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게 노래하는 방식이지만, 대단히 큰 영향을 주는 가르침의 하나였다. 이 시기에 기도할 때 사용하던 시편 구절들의 모음(Capitella de psalmis)은 가장 오래된 기도서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한편 신자들은 전례에서 사제들이 바치는 기도를 ‘아멘’이란 응답을 통해 공동체의 기도가 되게 했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는 ‘기도합시다.’ ‘감사합니다.’ 혹은 ‘형제 여러분, 기도합시다.’라는 권고를 통해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촉구했다.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는 몸가짐에서도 표현됐다. 신자들의 몸가짐은 주례자의 몸가짐을 기준으로 삼았다. 신자들은 기도할 때 동향(東向)했고, 사제와 함께 손을 올리기도 했다. 때로는 기도 중에 ‘무릎을 꿇읍시다.’라는 외침이 있었고, 그러면 사람들은 ‘일어납시다.’라는 외침이 있을 때까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신자들이 사제가 제대에서 드린 기도가 바로 그들의 기도라는 것을 이해하고 따랐을 때, 이것은 신앙 생활의 가장 힘 있는 근본이 됐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통해, 특히 공동체의 전례 기도를 통해 흠숭, 감사 기도, 거룩한 희생 제물 속에서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배웠다. 또한 경신례를 거행할 수 있는 하느님 자녀들의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웠다. 신자들은 이 모든 것을 이론적 가르침이 아닌 실천 속에서 배운 것이다.

 

한편 신자들은 미사 때 봉헌 행렬과 영성체를 통해 미사에 더욱 친숙해졌다. 3세기에서 4세기까지 영성체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미사의 규칙적 순서에 속했다. 즉, 모든 미사 참석자는 거의 예외 없이 성체를 모셨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항상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자녀임이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위해 가장 좋은 음식이요 일상의 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와 영성체에 대한 열성은 급격히 식어 버렸다. 암브로시오(340-397년)는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이 1년에 다만 한 번 영성체하는 것이 관습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크리소스또모는 한 설교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우리는 헛되이 제대 옆에 서 있다. 참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성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서방에서, 특히 로마에서는 미사 때마다의 영성체와 주일마다의 영성체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물론 신자들이 제대에서 제물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봉헌 행렬 때 하느님께 바칠 제물을 제대로 운반했다. 봉헌 행렬이 미사에 도입된 이래, 그것은 크게 장려됐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거기 참여해야만 했다. 특히 주일과 축제일에는 공동체 전체가 봉헌 행렬을 함으로써 신자들의 능동적 미사 참여를 촉구했다. 신자들에 의해 봉헌된 제물들은 우선 빵과 포도주였다. 그리고 경신례를 위해 필요한 물건들, 성직자의 생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도 봉헌됐다. 예를 들면, 기름, 밀랍, 초, 교회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물건들이 봉헌됐다. 그러나 성직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몫까지도 아무 구분 없이 무질서하게 성당 안에서 봉헌하는 것이 적합치 못함을 깨닫게 되자, 4세기에는 빵과 포도주를 비롯한 경신례를 위해 직접 필요한 물건은 제대에 봉헌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외 다른 것은 봉헌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제 봉헌하고자 했던 다른 모든 것은 빵과 포도주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함께 봉헌했다. 이렇게 신자들은 생동감 있게 거행된 전례를 통해 소속감과 공동체 정신을 체험했다. 신자들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노래부르고, 함께 응답하고, 함께 봉헌하고, 미사 때는 거의 모두가 영성체를 했다.

 

그런데 과연 신자들이 정말 주일마다 경신례를 위해 모였는가? 강제성을 띠는 주일 경신례 의무는 오랫동안 없었다. 그렇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능한 한 주일마다 경신례에 참석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노(284-305년 재위) 박해 때 어떤 순교자들은 “우리는 주님의 축제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305년에 열린 스페인의 엘비라 시노드에서 ‘도시에 사는 어떤 사람이 3주일 동안 교회에 오지 않으면, 그는 얼마 동안 추방되어야 한다.’고 처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모든 곳에서 주일 경신 예배의 의무가 엄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390년 밀라노와 같은 도시에서 주일에 주교가 집전한 단 한 번의 경신례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모든 신자들이 공간적 이유에서 한꺼번에 미사 참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밀라노의 교회가 모든 사람들을 동시에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다른 곳도 많았으니, 예를 들면 같은 시기에 로마에는 많은 교회가 있었다.

 

이러한 주기적 경신례와 더불어 때때로 종교적 쇄신에 도움을 준 특별한 경우도 있었다. 로마에서는 매절기마다 수요일과 금요일에 특별한 경신례가 있었고, 토요일에서 주일로 넘어가는 밤에 밤샘 기도가 있었다. 또한 4세기에 매년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사순절이 생겨 발달하기 시작했다.

 

[경향잡지, 1989년 10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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