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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영지주의가 초기 전례에 끼친 영향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1,726 추천수0

[전례 해설] 영지주의가 초기 전례에 끼친 영향

 

 

예수께서 당신 교회에 뿌리신 전례라는 ‘씨앗’은 여러 가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해 오고 있다. 그중에는 그릇된 가르침으로 배척을 받던 영지주의(靈知主義)가 초기 전례에 영향을 주었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발견된다.

 

영지주의는 쉽게 파악할 수 없겠으나, ‘종교 및 철학의 복합 체계’로 이미 기원전에 생긴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갖고,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그들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함으로써 초기 교회에 여러 가지 혼란을 주었다. 신약 성서에서도 그노시스(γνωσιs, 靈知)에 대한 암시적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특히 바오로(1디모 1,4; 6,20; 골로 2,8 이하 참조)와 요한(1요한 4,2-3)은 이 그릇된 가르침을 단호히 배격하고 있다. 또한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하여 세상에 나타난 하느님의 아들은 가육체(假肉體)를 지니고 외관상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고통을 당하셨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물질 세계로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물질을 악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 교부들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어떻게 변호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그 관심사는 사도신경에 표현되고 있다 :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영지주의에 대항한 싸움은 2세기를 거쳐 3~4세기까지 계속됐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무시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물질을 경시했고 물질적 창조물 전체를 멸시했다. 그들에 의하면 물질은 악의 자리로 그 자체로 악하고 악령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도 악의 영역에 속하고 영혼 안에만 신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참된 인식’(γνωσιs)을 통해 이 신적 요소가 강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비로소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구원이란 물질로부터의 해방과 탈출을 의미한다. 이라한 잘못된 주장에 대항해 교회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물질을 변호해야 했다. 2세기말 이러한 변호 움직임은 전례 분야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본래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는 영적 예배가 강조됐다. 그래서 이교도들이 지녔던 예배를 위한 일정한 장소, 성전들과 제대들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음악을 동반한 화려함, 외적인 아름다움과 물질적 제물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신자 공동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순수한 경신례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지나치게 형식적이었던 구약 후기 경신례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물질이 경시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경신례는 물질과 외면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리옹의 이레네오(+220년?)가 2세기말에 기술한 “반이단론”(Adversus haereses)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성찬례는 거룩하고 천상적인데, 그것은 빵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제물을 가지고 시작한다. 따라서 지상의 창조물을 가지고 천상 제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찬례를 설정하셨을 때 당신 창조물 가운데서 빵과 포도주를 택하셨다. 그분은 모든 것을 -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을 당신 인성 안에서 종합하셨다. 그래서 “성찬례도 지상 요소와 천상 요소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이와 관련해 2세기말 신자들이 제물을 제대로 운반한 첫번째 흔적이 나타난다. 떼르뚤리아노(+220년 이후)의 글에서 신자 개개인이 봉헌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히뽈리또(+235년)에게서도 세례 미사 때 모든 세례자가 제물을 가져 와야 한다는 분명한 흔적이 발견된다. 3세기 중엽 치쁘리아노(+258년)는 모든 신자들이 규칙적으로 매주일 제물을 교회로 가지고 왔음을 암시한다. 즉 그는 봉헌물 없이 교회에 와서 가난한 사람들이 봉헌한 것에서 성체를 모시는 부유한 부인들을 책망한다. 따라서 이미 신자들의 봉헌 행렬이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점차 모든 나라들 안에 도입되어 서방 교회에서는 1천 년 이상 그것이 행해졌다.

 

이전에 사람들은 빵과 포도주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 위에 기도드려진 감사에 관해서만 언급해 온 반면, 이제는 물질적 측면을 말하기 시작했다. 빵과 포도주는 제대로 운반됐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봉헌됐다. 이 봉헌은 질서 있게 이루어진 화려한 봉헌 행렬 중에 전공동체에 의해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봉헌됐다.

 

감사의 말씀이 그 위에 말해지는 그 제물들은 이 땅의 선물들이고, 그것은 동시에 그 안에 우리의 수고와 노동이 포함돼 있는 선물들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우리의 생명이 유지된다. 이 선물들을 통해 우리의 전생애와 지상의 창조물 전체가 우리와 함께 우리의 대사제이시며 그리스도이신 거룩한 희생물 안으로 받아들여져 봉헌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은 창조주이신 그분께 되돌아가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사의 끝 영광송 바로 앞에 나오는 기도문에서도 물질이 강조되고 있다 : “당선께서 창조하신 것은 선합니다”(Per quem haec omnia semper bona creas). 또한 1~2세기에 성찬례(Eucharistia)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지만, 3세기 이후 서방 교회에서는 봉헌(Oblatio) 혹은 제헌(Sacrificium)이라는 표현이 나타났다.

 

영지주의에 대한 반작용은 교회 공간에 대한 이해와 건축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은 원래 주로 그들의 주교와 그의 대리자 둘레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주교 안에서, 그의 말씀 안에서 교회의 중심을 봤던 것이다. 그래서 주교좌는 교회 안에 가장 중심이 되는 자리를 차지했고, 그는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 당시에도 성찬례 거행은 그리스도교 경신례의 정점이었음에도 한 주일에 한 번 주일날 짧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짧은 시간 속에서도 주교의 기도와 설교를 포함한 독서들이 성찬례 거행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긴 시간을 차지했을 것이다. 게다가 말씀의 전례가 끝났을 때 통상적으로 제대가 설치됐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된 제대들은 본래 빵과 포도주라는 제물을 놓을 수 있었던 상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교회는 제대에 대해 오랫동안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 당시 “우리는 제대를 갖고 있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그 당시 제대는 값진 덮개로 장식됐지만 나무로 된 단순한 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공간의 중심으로 물질로 된 제대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물질로 된 제대가 강조되면서 4세기 이후에는 단단한 재료의 제대들이 등장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285?~337)는 성 베드로 · 성 바오로 대성당에 각각 금과 고급 돌로 장식된 350 파운드나 되는 은으로 된 제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이 시대에 돌 제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교회가 영지주의에 대항해서 싸운 이후 그리스도교 경신 예배는 외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관심을 갖게 됐다. 이제 교회의 제물이 영적인 제물이라고 더 이상 강조되지 않고 실제의 제물이라고 강조됐다. 이제 나무 제대가 돌 제대로 바뀌게 되고, 그것은 하느님 집의 중심이 됐다. 이렇게 교회 건물의 중심이 주교좌에서 제대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교회 건물의 중심이 된 제대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물질로 꾸며지게 된다. 우선 제대 둘레에 울타리가 설치되고 계단들로 제대가 높여져 제대가 교회 건물 안의 어느 곳에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제대 위의 천장이 돌로 덮여지고 제대의 뒷벽들도 아름답게 장식됐다. 이처럼 제대를 중심으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그리스도교 제대를 위한 신심 깊은 역사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경향잡지, 1989년 7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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