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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초세기의 미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1,629 추천수0

[전례 해설] 초세기의 미사

 

 

최초의 미사

 

최초의 미사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 직전에 있었던 최후 만찬이었다. 예수께서는 수난 전날 저녁, 당신 제자들과 함께 유다인의 과월절(빠스카) 식사를 하시는 가운데 최초의 미사를 거행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최후 만찬의 기사와 유다인들의 과월절 식사를 통해 첫번째 미사의 윤곽을 그려 볼 수 있다.

 

빠스카 식사는 상당히 여러 가지 형태의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본래의 식사가 나오기 전, 전식으로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이 나오는데, 이러한 음식은 출애굽 시의 궁핍함을 상기시켜 준다. 이 전식의 전후에 각각 첫번째 잔과 두번째 잔이 채워진다. 그 다음 그 집의 아들이나 그 식탁에서 가장 어린 사람이 이 식사의 관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 그러면 가장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가운데 에집트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해 준다. 이 이야기는 시편 112편과, 113편 1-8절을 노래하며 끝맺는데, 참석자들은 알렐루야로 응답한다.

 

이제 본래의 식사가 시작된다. 가장은 누룩 없는 빵을 들고, 그 위에 축복의 말씀을 한 다음, 그것을 쪼개어 나눠 준다. 이것은 하나의 빵을 나누는 형제적 일치의 상징이며,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해 바칠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런 뒤 과월절 양을 드셨을 것이다.

 

식사 후에 가장은 새로 가득 채워진 잔을 약간 높이 들고 식사 후 감사 기도인 식탁 축복을 한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돌려 가며 ‘축복의 잔’이라 불리는 세번째 잔의 포도주를 마시고, 시편 113편 9절-117편 29절과 135편을 노래한다. 이때 예수께서는 “이것은 나의 피다.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네번째 잔을 마신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라.”는 말씀으로 최후의 만찬을 마치셨다. 그러면 사도들과 원시 교회는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했는가?

 

 

원시 교회의 미사

 

150년 이전의 미사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예식은 가장 오래된 원천들 안에서 ‘빵의 나눔’이라고 불린다. “신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또한 그들은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이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눔으로써”(사도 2,46), 거룩한 기쁨 중에 생활하였다. 트로아에서 신도들은 “빵을 나누기 위해”(사도 20,7) 바오로 사도와 함께 모였다. 고린토 교회에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 빵을 뗄 때에 우리는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닙니까?”(10,16)라고 말한다.

 

미사의 가장 오랜 예식은 적어도 많은 곳에서 수십 년 동안 식사와 연결돼 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고린토에서는 그러하다.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그는 단지 고린토에서 발생한 악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미사가 다른 사도들의 공동체나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도 식사와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의 부활 후에 우리는 거의 항상 식사 때 모이는 사도들을 본다. 공동의 식탁이 그들을 모이게 했고, 공동 식사는 주님께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제공된 좋은 기회였다.

 

미사와 연결돼 있던 이 식사를 어떻게 봐야 하겠는가? 초기에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주님의 위탁에 부응하기 위해 사도들은 될 수 있는 대로 최후의 만찬 과정을 충실히 모방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 최후의 만찬은 빠스카 식사 중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도들이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빠스카 식사의 예식을 반복했으리라는 가정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 예식은 자주 반복하기에는 너무 복잡했을 뿐만 아니라, 유다교의 율법에 의하면 이 예식을 다른 기회에 이용하는 것은 전혀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미사가 상당히 이른 시기에 유다인들의 빠스카 예식과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후의 만찬에 관한 기사들 가운데, 루가와 바오로는 큰 일치를 보여 준다. 여기서 눈에 띄는 언급은 “저녁을 잡수신 후 같은 모양으로”(Simili modo postquam coenatum)라는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식사 후에’ 잔을 축성하고 나누어 주셨다. 그러므로 빵의 축성은 분명히 삭사 전에 이루어졌다. 이때의 미사는 짧은 감사 기도로 시작해서, 빵 위에 하는 말씀(축성)들, 빵의 분배, 비교적 긴 감사 기도, 잔 위에 하는 말씀(축성)들 그리고 마지막에 잔의 분배가 이루어졌으리라 보이는데, 이러한 미사 거행의 형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이미 마태오와 마르코는 최후의 만찬에 관해 ‘식사 후에’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 기자들은 전례 생활 속에서 더 이상 행해지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일반 식사가 이제 미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식사에 관해 아무 것도 보도하지 않는다. 사실 신자 공동체가 점차 비대해져 감에 따라 거기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실질적인 기술 문제와 어려움과 남용의 우려로 인하여 일반 식사와 분리하여 따로 미사를 거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와 마르코는 빵과 포도주의 축성을 나란히 앞뒤에 배열해 놓았다. 이에 따라 이제 미사는 ‘제물 준비 - 감사 기도 - 두 가지 축성 - 영성체’의 윤곽을 지니게 되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와 바오로가 최후의 만찬에 관해 전해 주는 기사들이 상세한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 주는 이유는, 해당 공동체의 전례 생활이 다소 틀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례 생활은 아무리 그것이 공동의 전승을 통해서 결합돼 있다 할지라도, 아직 일정한 규정들을 통해 거의 속박받지 않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짧은 기간 안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첫세기에 이루어진 큰 변화는 물질적 식사에 대한 포기였고. 감사 기도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이러한 변천은 예식의 외적 형태에 있어서도 하나의 큰 변혁을 동반하게 되었다. 주교나 사제가 사용하는 식탁 외에 공동체가 모이는 장소에서 식탁이 사라졌다. 이제 오늘과 같은 제대가 동장하는 것이다. 참석자들은 하느님 앞에 올바른 태도로 둘러서 있는 사람들이 되며, 예배 공간 자체도 이제 비교적 더 커지고 더 넓어지게 된다. 또한 사람들은 한 지역 전체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미사 거행을 위해 가능한 한 한곳에 모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각각의 공동체에는 같은 날 단 하나의 미사 거행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때까지는 유다인의 관습을 지켜 미사를 저녁에 거행하였지만, 식사와 미사가 분리된 다음에는 미사 거행 시간이 자유로워졌다. 그 후 신자들은 주님을 연상하게 되고, 이에 따라 주일 새벽에 모이는 관습이 생겼다. 이제 성전과의 관계는 점차 끊어졌으며, 유다인들의 회당과도 점차 단절되었고, 44년의 박해 이후에는 성서 봉독이 성 찬례 앞에 추가되었다.

 

절망 속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한 나그네를 만나 말씀을 듣고 빵을 나누는 가운데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루가24,31). 이렇게 원시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미사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장소요 기쁨과 희망의 장소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빵을 나누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를 이루고 형제 자매들과 친교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향잡지, 1989년 3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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