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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초기 전례의 공간과 시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1,717 추천수0

[전례 해설] 초기 전례의 공간과 시간

 

 

하느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므로, 인간은 그분을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피조물인 인간은 시공의 제약을 받으며 그 안에서 그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인 전례는 일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거행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전례 공간

 

초기 신자들은 경신례를 위한 규칙적인 집회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들은 때때로 가해지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 고유의 집회를 고집하였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이러한 집회에 대하여 적대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비밀 식사 모임에서 사람들의 살을 먹고 아이들의 피를 마신다는 유언 비어가 그런 생각을 더욱더 부채질하였다. 신자들은 집에서도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회를 고집하였는데, 그들은 “공동으로 기도하도록 부름받았음.”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경신례를 거행하기 위하여 어디에 모였는가? 예루살렘 신자들은 처음엔 성전 경신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독자적인 그리스도교의 경신례를 거행하기 위하여 초기 신자들은 집회를 하기에 적합한 개인 집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거기서 ‘빵의 나눔’을 거행하였다(사도 2,46 참조). 부유한 신자들이 신자 공동체가 자유롭게 집회를 할 수 있게 그들의 집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성 글레멘스, 성녀 체칠리아, 성녀 프덴치아나 성당이 그런 사실을 확인하여 준다. 즉, 공동체는 글레멘스, 체칠리아, 프덴치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던 것이다. 한편 교회는 집회를 위한 건물을 기증받음으로써 이미 200년경에 여러 곳의 건물 소유주가 된다.

 

1930년 메소포타미아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에서 최초로 콘스탄티노 이전의 교회 건물 잔해가 발굴되었다. 이 건물은 본래 주택이었는데, 232년 교회로 개축되었다. 중심에는 직각의 강당이 있었고, 주교를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제대는 이동 가능한 일상적 상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집회를 위하여 사용하던 건물과 그 당시의 다른 건물과의 차이는 외적으로 거의 없다.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집회소 안에는 성직자들을 위한 주거 공간, 도서실, 여러 가지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도 있었다. 공동체가 경신례를 거행하기 위하여 모였던 큰 강당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신자 공동체의 예배 공간은 애초부터 고대 이교도들의 성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른 종교에서는 건물이 중요하며, 공동체의 집회는 부차적인 것이다. 이에 반하여 그리스도교에서는 모인 공동체가 중요하고, 건물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그리스도교 본질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공간이나 죽은 담벽이나 금은 장식이 아니고, 거룩한 공동체인 것이다. “여러분은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2고린 6,16)라고 하였듯이, 외적인 건물은 분명 살아 있는, 선택된 돌들로 이루어진 내적 건물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또한 세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된 신자들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1베드 2,5 이하 참조), 거룩한 사제직과 거룩한 제물을 봉헌하는 살아 있는 성전을 형성한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제적 공동체이며 거룩한 공동체이다.

 

 

전례 시간

 

그리스도교 경신례의 새로운 정신은 경신례를 위하여 선택한 시간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물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초기 유다-그리스도적 공동체는 안식일 법을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빵의 나눔’은 주로 주님의 부활이 이루어진 ‘주간 첫날’에 행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바오로 사도의 공동체들 안에서는 늦어도 50년대에 일요일을 준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고린 16,2; 사도 20,7 참조). 1세기말 이미 이 새로운 기념일은 주일이라고 일컬어진다. 성 요한은 묵시록에서(1,10) 그가 ‘주님의 날’에 성령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았노라고 기술한다. 그리고 “디다케”에서는 “주일에 함께 모여 빵을 나누고 성찬례를 거행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초기 신자들은 일요일을 ‘부활일’이라고도 불렀다. 왜냐하면 이 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당신 사업을 완수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원시 교회에서는 “여덟번째 날”이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이루어진 일요일에 새 창조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주간의 7일을 더 이상 제1일에서 제7일까지가 아니고, 제2일에서 제8일로 셈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부들에게는 성서에 나오는 8이라는 숫자가 일요일, 부활, 그리스도를 통한 세계의 쇄신을 위한 상징으로 보였다. 또한 신약에서의 구원인 부활의 날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보았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도교는 일요일을 주간의 ‘시작’으로서가 아니라 ‘끝’으로 이해하였다.

 

일요일이란 명칭은 이미 그리스인,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명칭인데, 그리스도인들도 이 명칭을 배척하지 않았다. 이미 2세기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태양으로 묘사했다.

 

주간의 정점으로서 일요일의 강조는 초기 신자들이 일요일뿐만 아니라, 한 주간 전체를 거룩하게 하려 하였던 것과도 관계 있다. 이미 “디다케”에서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금요일은 주께서 수난당하신 날이고, 수요일은 그 분이 유다에게 배반당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초기 신자들은 언제 성찬례를 거행하였는가? 그들은 자유롭게 그 시간을 선택할 수 없었는데, 그 당시 일요일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 집회가 있게 된다. 늦은 저녁은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시간이고, 이른 아침은 주님이 부활하신 시간을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점차 이른 아침은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집회 시간이 된다. 플리니우스 총독은 112년 그의 심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특정한 날 동트기 전’ 집회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주간에 한 번 일요일이 있듯이, 일년에 한 번 부활절이 있다. 이 축제는 4세기까지 전체 교회가 지내던 유일한 큰 축제였다. 그 예표는 이미 구약 성서에 나타나는 빠스카(유월절)에 근원을 두고 있다. 유다교의 빠스카 축제와 신약의 빠스카인 부활 축제와의 연관성은 부활 축제일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적용되었다. 즉 오늘날까지도 부활 축제일은 유다교적 계산법을 활용하고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부활축일을 정하는 데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와의 논쟁이 심하였지만, 니케아 공의회(325년)에서는 춘분이 지나서 첫번으로 만월이 지나고 바로 그 다음 첫번으로 오는 일요일을 부활 축일로 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래서 부활 대축일은 이동 축일이 되었다.

 

부활 축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완성하신 인류 구원의 신비이다. 이 축제는 본래 부활 성야제, 즉 토요일 밤에 시작해서 일요일까지 거행되었다. 부활 성야 예식은 밤샘 기도로 거행되기도 하였으며, 2세기에는 세례 예식이 이 밤중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초기 교회에서 부활 성야 예식은 어두워진 다음에 빛을 축복하고 점화하는 예식, 시편 노래와 기도를 동반한 여러 가지 독서를 듣는 말씀의 전례, 그리고 세례 예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예식이 끝나면 신자들은 일단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부활절 아침에는 성찬례가 거행되었다. 이와 함께 오십 일간의 기쁨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청원 기도나 부활 삼종 기도와 같은 기도들을 서서 바쳤다. 물론 초기 교회 신자들은 그 당시 이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성주간과 갈은 준비 기간을 갖기 시작하였다.

 

[경향잡지, 1989년 2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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