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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빛과 소금 (마태 5:13-1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09 조회수1,240 추천수0 반대(0) 신고

 

     소금과 빛 (마태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오늘 본문은 소금으로 살지 않으면, 밖에 버려져서, 밟힘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등불을 발아래에다 두느냐? 등불은, 등경 위에 두는 것이므로, 반드시 주변에 빛을 비추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등경 위에 높이 서서, 열심히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라.

대부분 이 산상수훈(山上垂訓)의 빛과 소금의 이야기를 가지고, 세상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성도들의 본분 측면에, 초점을 두죠. 소금은 짠 맛을 내는 것이므로, 성도는 세상 속에서, 맛을 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므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충분한 역할을 감당해내야 한다느니, 소금은 자신의 몸을 녹여서,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니, 반드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식의 교훈을 던지곤 하죠? 빛은, 온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힘이 있는 것이니 성도는 어두움의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는데, 기여를 해야 한다고 하죠. 그런데 이게 팔복의 밑에 붙어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되는 거예요.

성도가 빛과 소금의 삶을 살면, 정말 세상이 영향을 받아서 변합니까? 예수님은 바로 위에서,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예요.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이, 바로 아래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서, 세상에게 영향을 주라는 말씀을 하시겠어요?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성도의 경건한 삶에 대한 교훈으로 곡해를 하는 이유는, 본문 16절 때문이에요. 본문 16절을 보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는 내용이 나오죠? ‘착한 행실!’ 그러니까 빛과 소금의 삶이 착한 행실인 거고, 그 착한 행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힘이 있다는 식의 해석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표피적으로 보면 그렇잖아요? 착한 행실은, 빛과 소금의 삶이 맞아요. 그러나 그 착한 행실은, 도덕적이며,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착한 행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착한 행실이라는 걸, 그들이 놓치는 거예요. 세상은 성도가 빛과 소금의 삶을 살게 되면, 미워하고 핍박을 하도록 되어 있지, 절대로 하느님께 돌아오게 되지 않는다는게 성경이 내놓는 공식입니다. 세상은, 절대 교회의 삶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변화되지 않아요. 교회만 변해요. 그게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바거든요.

예수님은, ‘너희는 빛이다,’‘너희는 소금이다.’어느 시점에 완료된 걸 공포하고 선언하는 거예요. 그 내용이, 이 세상이 정의하고 있는 복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슬퍼하고, 굶주리고, 목마르며, 핍박 받고, 자비를 구해야 하는 그런 모습이었어요. 그 빛과 소금의 삶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삶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세상 복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성도의 현실을, 다른 언어로 그리고 있는 거예요. 먼저 성경에서 소금이 등장하는 곳은, 하느님의 계약을 가리킬 때, 그리고 성전의 제물을 묘사하는 곳에, 주로 등장을 해요.

(2역대 13:5) 5 너희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소금 계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영원히 주신 것을 알지 않느냐?

(민수 18:19) 19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거룩한 예물들은 모두, 영원한 규정에 따라, 내가 너와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너의 딸들에게 준다. 이는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계약을 가리킬 때, 소금이라는 단어를 함께 끌어다 쓰곤 해요. 소금계약이라는 건, ‘영원한 계약, 변하지 않는 계약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처럼. 소금은,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금입니다. 그러니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소금처럼, 절대 변개되거나, 취소될 수 없는, 하느님의 계약을 가리켜요. 그래서 오람 베리트가 같이 쓰여요. ‘변하지 않는 영원한 계약

(창세 9:12, 16) 12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미래의 모든 세대를 위하여, 나와 너희, 그리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은 이것이다.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하느님과 땅 위에 사는,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겠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주시는 무지개 언약이죠. 레인보우(Rainbow). 보우가 활인데, 저주의 비에 의해 만들어진 활! 이 활이 하느님께로 당겨지는게 레이보우죠? 무지개. 그래서 하느님이 희생을 당하여, 날 때부터 악인인, 그들이 살아나는 게 무지개 계약이에요. 성경은 그걸 영원한 계약! 소금계약! 이라 그래요. 그런데 하느님이 은혜 베풀어주실 거야!’ 이게 복음(福音)인 거예요.

(창세 8:21) 21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사람은 어려서부터, 날 때부터,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교훈을 준다거나, 혼을 내준다 하는 방법으로는, 그 악을 제거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준비했다는 거죠. 이 영원한 계약 바로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세요?

(창세 8:20)20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들 가운데에서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노아의 무지개 계약의 배경(背景), 정결한 제물이, 부정한 제물들을 살리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사건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 무지개 계약을 내리세요. 그러니까 영원한 계약! 소금계약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서, 거저 살아나게 되는 하느님의 은혜의 구원!

두 번째, 오람, 베리트영원한 계약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곳이, 아브라함 계약 때입니다.

(창세 17:7)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세우시는데,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과의 사이에서도, 언약을 세우시겠다, 그러죠?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그 후손이 누구라 그래요? 한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죠.

(갈라 3:16) 16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을 뜻하는 후손들에게가 아니라, 한 사람을 뜻하는 너의 후손에게라고 하셨습니다. 이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세우신 그 언약의 원형을 찾아보면, 소금계약의 실체가 좀 더 분명해지겠죠? 그 원형이 어디에 나와요?

(히브 9:15-22)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16 유언이 있는 곳에서는 유언자의 죽음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17 유언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야 유효한 것으로, 유언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효력이 없습니다. 18 사실은 첫째 계약도 피 없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19 모세는 율법에 따라 온 백성에게 모든 계명을 선포하고 나서, 물과 주홍 양털과 우슬초와 함께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계약의 책과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계약의 피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21 그리고 성막과 의식에 쓰이는 모든 기물에도 같은 방식으로 피를 뿌렸습니다. 22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지고, 피를 쏟지 않고서는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유언(遺言)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계약이에요. 그러니까 영원한 계약! 소금계약이라는 건, 하느님과 당사자이신 예수 사이에서, 피가 반드시 뿌려져서, 내가 너에게 주는, 내 백성들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가 영원한 계약의 핵심인 거죠. 피의 계약이에요. 그 계약의 핵심 단어 하나만 뽑으라고 하면 !’ 예수라는 하느님의 후손의 피로 말미암아, 피 흘려 죽어야 할 진짜 죄인들이, 거저 살아나게 되는 게,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후손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란 말예요. 그 계약을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묘사하죠?

(에페 1:3-7)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점 많고 흠 많던 우리가 거저 구원을 받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게 창조이전 계약의 핵심이에요. 역시 피! 그런데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 읽었던, 민수기 18장에 보면, 그 계금언약의 내용이, 제사장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민수기 18:19) 19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거룩한 예물들은 모두, 영원한 규정에 따라, 내가 너와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너의 딸들에게 준다. 이는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

여기에서는 모세가 소금계약을 설명하면서, 그걸 제사장의 몫(분깃)과 연결하고 있어요. 하느님이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제사장에 영원히 주신다고 하신 소금계약이래요. 영원한 음식으로, 영원한 몫으로 네가 줄 거다. 이게 소금계약이다. 백성들이 드린 제물을 제사장이 먹고 살죠? 그 일이 변함이 없을 거야. ‘영원히, 오람,’ 영원히 변함없을 거야. 이게 오람 베리트영원한 소금계약!

그렇게 하느님께서 소금계약에 의해서, 당신 자손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해내신 교회가, 왜 예수가 소금계약을 성취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걸 인정해드리면서,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시인할 때, 그때 소금계약이 온전히 성취되는 거란 뜻이에요. 그런데 이건 반드시 될 일이기 때문에, 소금이 어떻게 짠 맛을 잃겠느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아라! 선한 일에 힘써라!’ 이런 이야기가 아녜요.

도저히 산 자가 될 수 없는 죽은 흙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피로 반죽이 되어서, 흠 없는 완벽한 하느님나라 백성이 되는 게, 하느님의 영원한 소금계약인 거고, 거기에서 탄생된 교회가, 그 소금계약이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서만, 성취가 된 것임을 인정하고, 거기에 희생하시고, 거기에 봉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정하고 찬송하게 되는 거, 이게 에페소서 1장의 창세 전 계약의 목적이잖아요? 그게 바로 소금계약의 성취란 말예요. 그래서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어찌 그게 소금이냐? 라고 하는 거예요. 소금은 절대 맛을 잃을 수 없다. 천 년이 지나도 소금은 그 맛을 그대로 유지한단 말입니다. 그 말은, ‘성도야, 너희들은 천 년이 걸리든, 반드시, 이 역사 속에서 자기를 否認하고 가야 한다.’라는 말과 똑같은 말인 거예요.

복음은 절대 소금의 역할을 못 벗어난다. 그래서 맛을 잃지 않는다고 하는 거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밖으로 집어 던져서 밟아 버릴 거야!’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녜요. ? 맛을 잃을 수 있는 소금은 없으니까. 따라서 우리 성도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소금계약을 성취해내신, 예수님의 만을 자랑하고, 전해야 되는, 하느님나라 백성들이다. 그 소금계약의 성취에는,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선한 행위도 보탬이나 기여가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예수님의 를 높이는 곳으로 가야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의 소금으로 잘 살아서,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지로 가면 안 되는 거란 말예요. 그게 바로 부패예요.

그렇게 예수님의 의()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게 소금인데, 그러면 어떻게 된다,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 받는다, 영원한 소금언약을 홀로 성취해내신,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자랑하느라,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삶을 말하는 거예요. 소금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짓밟힌 것처럼! 여러분이 예수의 의()만 증거하는, 그 소금계약을 예수가 성취하고 완성해냈다는, 그 소금언약의 성취자로서의 그 예수를 증거하는 소금으로 살게 되면, 여러분이 이 세상으로부터 밟히게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바로 밑에, ‘너는 소금이니까라는 말이 들어가는 거예요. ‘넌 소금이니까, 의를 인하여 반드시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란 뜻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문맥(文脈) 안에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전부 도덕책이 되는 거예요.

미꾸라지 잡을 때 소금 뿌려본 적이 있어요? 시골에서 우리 할머니가 가끔, 미꾸라지 잡아다가, 추어탕을 끓여주시려고, 미꾸라지를 양동이에다 한가득 넣어놓고, 소금을 쫙 뿌리잖아요? 뻣뻣하게 다 돌아가세요. 그거 생각하시면 돼요. 죽이는 거예요. 예수라는 제물이, 왜 십자가에서 죽었는지 아세요? 너희들이 이 세상 속에서, 그렇게 가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거예요. 존재 양식. 안 그러면 하느님나라의 존재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소금이 뿌려지는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 시퍼렇게 살아서, 자신의 가치와 존재성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챙겨 갖는 이들이, 영원 속에서, 죽을 자들이에요. 이 땅에서 살자고, 살고자 하는 자들은 다 죽어요. 그거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는 자가 살아요. 그게 소금이에요. 저주의 삶! 심판의 삶! 육적 자아가 부인되는 삶! 그래서 아파요. 이 상처투성이! 하느님에게 맞아서. 이 상처투성이! 이사야서에서 나오죠? 어딜 더 때릴 때가 있니? 그러잖아요? 그 몸에 하느님이 소금까지 확 뿌리시는 거예요. 우리의 인생(人生)에요. 죽으라고. 그러니까 재미없어요. 성도의 인생은 그렇게 재미없어요. 하느님이 계속 소금 뿌리는 인생이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자 말예요. 원래 빛의 원형은 하느님이죠?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도 창조의 첫머리에 빛이 있으라!’하면서 빛이 등장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창조의 일은, 다 빛이신, 하느님의 주도하에 일어나는 것임을, 명시(明示)하는 거예요. , 그 빛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시죠? 요한복음 1장으로 가보세요.

(요한 1:1-5)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빛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가 같은 단어예요. ! 그런데 5절을 보면, 빛의 대척점에 있는, 어두움의 특징이 뭐죠?  빛이 비취는데, 그 빛을 못 알아보는 걸, ‘어두움이라 그래요. 요게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했고,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했는데, 빛이 왔는데, ‘나는 빛의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빛이 나를 온전히 도와주지 않아도, 이미 빛의 삶을 조금 살고 있기 때문에, 쟤가 나를 온전히 안 도와줘도 돼! 쟤가 나를 온전히 도와주면, 나는 완전히 내 존재성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건 안 돼!’라고 하는 고걸 어두움이라고 그래요. 빛을 못 알아보는 거.

(이사 42:6-7)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감방! 하느님께서 빛이신 주님을 이 땅에 보냈는데, 그 빛의 임무는 백성의 영원한 소금계약이 되게 한 대요. 그건 가서 죽이라!’는 뜻이에요. 죽여라! 네가 십자가 지면, 그들이 전부 유죄(有罪)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죽는 거거든요. 계약이 된다는 뜻이에요.

빛이 소경의 눈을 밝히고, 흑암에 처한 자를 그 흑암에서 나오게 하는 거래요. 빛은 어두움이 뭔지를, 악이 뭔지를 이렇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걸 밝혀서, 빛은 저놈이 어두움이고, 저게 악()이구나를, 드러내고 폭로하는 거예요. 그게 소금이 했던 일이잖아요?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빛이신 그분이 왔더니, 사람들은 그 빛의 도움을 거절해요. 그게 빛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 그게 어두움이에요. 이 빛이, ‘세상은 어두움이다!’를 폭로시키고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거예요. 성경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을, ‘어두움이라고도 하지만, ‘소경이라고도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어두움을 자주 소경에 비유하죠? 그게 어두움에요. 빛은 그걸 밝혀내는 거예요. 그런데 이 빛을,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반드시 밟아 끄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예수의 삶이었단 말예요. 빛의 삶이었어요. 그 착했던 유대인들이, 이 빛을 꺼버리더라니까요. 그건 역사 내내 있었던 일이에요.

(요한 9:39-41) 39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40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몇몇 바리사이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하고 말하였다. 4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빛이 왔을 때, ‘저는 소경이 맞네요. 저는 예수님이 비춰주지 않으면, 요만큼도 빛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자네요.’ 이게 나는 소경입니다. 고 사람을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구태여 나를 비쳐주지 않아도, 나는 지금 이렇게 착하게 잘 살고 있어요. 율법 잘 지키고 있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있어요.’ 요 사람을 소경이라고 한다니까요. 여러분, 성경을 한 발자국만 더 깊이 들어가서 보세요. 빛은 내가 소경이 맞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그 사람을 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가 이 세상에 심판하러, 소금으로 왔다고 하는 거예요. ‘이거 뭐야? 나 이거 소경이네.’ 이게 심판당한 자예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를 빛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렇게 내가 소경입니다라고 하는 그 자의 바로, 그 소경됨을 예수님이 먹어버리는 걸 구원이라고 그래요.

(요한 12:46)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빛이 어두움을 비추어서, 빛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어두움이었던 자들이, 빛으로 나온 상태를 뭐라 그래요? ‘나를 믿는 사람이라 그래요. 예수를 믿는 게, ‘이에요. 자기 자신을 믿으면 안 돼요. 나에 대한, ‘라는 우상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그리고 예수에게로 그거 점점 돌려져야 되는 거요. 그들을 이라 그래요. 믿는 자라 그래요. 주님은 그렇게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자들을 흑암이라 그러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자들이라 그래요.

(마태 4:16)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빛이신 주님은 이 세상에 그렇게 오셔서 율법을 잘 지키고, 제사를 잘 드리며, 선행에 힘쓰던 바리새인들을 죄인으로 폭로해버리셨어요. 그동안에는 그들이 빛이었는데, 진짜 빛이 오니까, 그들의 실체가, 좀비로 확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바로 그 일을 한다는 뜻이에요.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라는 뜻은, 지금 온 교회가 다 건강하고, 건전하고, 좋은 교회들을 만들려고, 애를 쓰죠? 그거 다 그렇게 추구해 가는데, 어떤 놈들이 오더니, ‘그렇게 해서 교회가 건강해지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 돼!’ 어떡하겠어요? 당연히 공격받아요. 그러나 빛이 오면 반드시 갈라짐이 일어나요. 창세기 1장 보세요. 빛이 오자,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전부 갈라지죠? 그걸 거룩이라 그래요.

예수님이 내가 빛이니까 회개하라, 나를 믿어라.’ 바리새인들은, ‘아니야, 우리 착하게 잘 살고 있다니까.’ 예수님이 계속해서, ‘아니, 나를 믿으라니까이게 빛이었단 말예요. 그 삶을 우리들이 살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래서 그러한 성도의 빛으로서의 삶을 통해, 산 위의 동네가 환히 드러난다고 본문 14절이 이야기하는 거요.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산 위의 동네가 구약에 어디에 나올까요? 이 산 위의 동네는, 그냥 산꼭대기에 있는 동네를 이야기하는 거 아녜요. 성경은 그렇게 모호한 표현을 쓰지 않아요.

(이사 2:1-3)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예루살렘이었어요. 그건 유대인들 누구에게나, 예루살렘은 산 위의 동네였단 말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뭐예요? 율법주의의 핵()! 거기에 성전이 있습니다. 제사지내는 곳이에요. 율법이 가르쳐지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땅의 예루살렘은, 율법주의의 총화이기 때문에. 그런데 빛이 비추게 되면, 산 위의 동네가, 근사하게 위장을 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왔는데,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이, ‘우리 착한 사람이야.’라고 위장하고 있었단 말예요. 감추고 있었단 말예요. 그런데 빛이 와서 산 위의 동네를 확 비춰버렸어요. 그랬더니 그게 악으로 확 드러나 버렸죠. 마찬가지인 거예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들이 진짜 빛이라면, 오늘날 교회를 좀 먹고 있는 율법주의, 인본주의가, 반드시 너로 말미암아 폭로될 거란 뜻이에요. 그게 산 위의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에요. 등불을 어디에 걸아야 산 위의 동네가 다 비쳐져요? 예루살렘 이야기하는 거요. 성경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1절부터 여기까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하느님은 달려가고 있어요. 십자가로!

(마태 23;24-28)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은 목숨 걸고 율법을 지키던 사람들이에요. 아주 착하기 그지없던 사람들인데, 그들을 소경이라 그러고, 어두움이라 그래요. 그리고는 안을 깨끗이 해야지? 그래요. 하느님이 부정한 환자인 우리를, 우리가 땅을 피로 더럽히는 자들이라고, 월경하는 자들이라 그러잖아요? 그런 자들인데, 하느님이 물로 씻어서, 성령을 넣어, 새 마음으로 바꿔 준 거, 그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안을 깨끗이 하라! 예수 믿으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이 유혈병 환자, 부정한 자에 불과한 너희들을 깨끗이 성령으로 씻어서, 지금 이렇게 거저 구원해준 거, 마른 뼈 같았던 자들을 거저 구원한 거, 이거 믿니? 그게 안이 깨끗해진 거거든요? 그게 새 마음이에요. 안이 깨끗해진 거예요. 그 상태에서 나오는 거 맞아? 묻는 거란 말입니다.

도대체 이 바리새인들이 뭘 했길래, 하느님이 계속 소경이라고 그러고, 너희들은 겉만 번드르르하다, 그러고. 왜 계속해서 그들의 실체를 이렇게 폭로시키시죠? 빛이 오셔서 왜 자꾸 너희는 어두움이다. 어두움이다 그래요? 이 사람들이 뭘 했어요? 바로 그 위에 나와요.

(마태 23:15-19) 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어두움에 속한, 소경된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가르치는데,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는데, 성전에 바쳐지는 금, 혹은 성전에 있는 금으로 맹세를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리고 제단으로 맹세를 하면, 아무 일도 없는데, 제단은 제물이 태워지는 곳이죠? 그 위에 있는 예물을 두고 맹세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 속에서 하느님의 은혜를 붙들어야 했어요.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성전에 바쳐지는 금과 예물에, 더 관심이 있더라는 거예요. 성전과 제단을, 금과 예물 아래로 밀어내는 거예요. ‘은혜? 나와는 상관없어!’ 지금 안 보이는 거니까. 당장 내 눈에 보이는 어떤 부수적 유익! 이것에 관심이 더 있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의를 찬송하는 것보다는, 이건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어요. 지금 내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잘 지키고, 종교행위를 잘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어떤 평가를 받아낼까에, 더 관심이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거예요. 하느님의 은혜의 현실! 구원의 현실!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유익이 올 것인가를, 종교행위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들을, 소경이라 한다 말입니다. 그게 겉만 번드르르한 회칠한 무덤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의 의 앞에서, 그 산 위의 예루살렘, 인간들의 의는 낱낱이 폭로당하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잘 감추고 있었는데, 어떤 한 분이 오더니, 쫓아다니면서, ‘이 도둑놈들아! 간음한 놈들아! 어두움들아! 소경들아!’ 이러고 다니는 거예요. 칭찬만 받고 있었는데. 기도할 때도, 길 가운데서 기도하고, 단식할 때도 일부러 수염 길러서, 초췌하게, ‘난 밥 굶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다 존경해주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오더니, ‘나는 네 속을 안다. 이놈아!’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그걸 우리더러 예수의 십자가와 피만을 전하라는 거예요. 그 때에, 겉만 번드르르하게, 자기들의 행위로, 자기를 위장했던 자들이, ‘남들 다 존경해 주는데, 왜 저 인간만 아니라, 그래?’ 그런데 우리들은 반드시 산 위의 동네를, 감추어진 산 위의 동네를, 확 드러내는 자로 사셔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빛처럼 살아라!’가 아녜요. ‘빛이 되어라가 아녜요. ‘너희는 빛이다!’ 이거 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밑에 너희는 빛이다!’가 붙어 있는 거예요. ‘너희는 핍박을 받을 거야. ? 빛이니까. 산 위의 동네를 드러낼 거니까. 그들이 너희를 얼마나 밟겠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빛이 집안사람들에게만 비춰져요. 그래서 그들만 나 소경 맞네요.’ 하고 빛으로 돌아와요. 그래서 집안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거예요. 성도만 알아보는 거예요. 남들은, 속으로 욕만 하고 있을 거예요. ‘은혜는 무슨 개뿔이나 은혜냐?’

(마태 5:15)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나는 이렇게 어두움인데, 하느님께서 예수라는 빛을 나에게 비추어서, 내가 거저 빛이 된 거구나라고 하느님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거! 예수만을 믿는 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일을 합니까?’ 그게 착한 행실! 그 착한 행실로 인하여 그 빛을 본 자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더라. 빛과 소금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 하는 거요.

 

그렇게 해서 산 위의 마을을, 우리가 확 폭로시켜서, 그 중에 하느님의 백성들은,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나머지 다른 이들에게는, 두들겨 맞는 거예요. 그러다가 주님이 오시면, 얼른 맨발로 뛰어가서, ‘신랑이여! 왜 이제 왔느냐고?’ 그렇게 그 신랑과 신랑이 계신 곳이 그리워져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그 핍박(逼迫)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왜 그 팔복의 내러티브 바로 밑에, 빛과 소금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지 아시겠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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