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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6-03 조회수2,387 추천수0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4,18-20

그 무렵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0(109),1.2.3.4(◎ 4ㄴㄷ)

◎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로다.

○ 주님께서 내 주군께 하신 말씀이로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

○ 주님께서 당신 권능의 왕홀을 시온으로부터 뻗쳐 주시리니,

당신께서는 원수들 가운데에서 다스리소서. ◎

○ 당신 진군의 날에 당신 백성이 자원하리이다.

거룩한 치장 속에 새벽의 품에서부터

젊음의 이슬이 당신의 것이오이다. ◎

○ 주님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않으시리이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로다.” ◎

 

제2독서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1,23-26

형제 여러분,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부속가 <성체 송가: 21절부터 시작해서 짧게 할 수도 있다.>

1. 찬양하라 시온이여, 목자시며 인도자신, 구세주를 찬양하라.

2. 정성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

3. 생명주는 천상양식, 모두함께 기념하며, 오늘특히 찬송하라.

4. 거룩하온 만찬때에, 열두제자 받아모신, 그빵임이 틀림없다.

5. 우렁차고 유쾌하게, 기쁜노래 함께불러, 용약하며 찬양하라.

6. 성대하다 이날축일, 성체성사 제정하심, 기념하는 날이로다.

7. 새임금님 베푼잔치, 새파스카 새법으로, 낡은예식 끝내도다.

8. 새것와서 옛것쫓고, 예표가고 진리오니, 어둠대신 빛이온다.

9. 그리스도 명하시니, 만찬때에 하신대로, 기념하며 거행한다.

10. 거룩하신 말씀따라, 빵과술을 축성하여, 구원위해 봉헌한다.

11. 모든교우 믿는교리, 빵이변해 성체되고, 술이변해 성혈된다.

12. 물질세계 넘어서니, 감각으로 알수없고, 믿음으로 확신한다.

13. 빵과술의 형상안에, 표징들로 드러나는, 놀랄신비 감춰있네.

14. 살은음식 피는음료, 두가지의 형상안에, 그리스도 온전하다.

15. 나뉨없고 갈림없어, 온전하신 주예수님, 모든이가 모시도다.

16. 한사람도 천사람도, 같은주님 모시어도, 무궁무진 끝이없네.

17. 선인악인 모시지만, 운명만은 서로달라, 삶과죽음 갈라진다.

18. 악인죽고 선인사니, 함께먹은 사람운명, 다르고도 다르도다.

19. 나뉜성체 조각마다, 온전하게 주예수님, 계시옴을 의심마라.

20. 겉모습은 쪼개져도, 가리키는 실체만은, 손상없이 그대로다.

21. 천사의빵 길손음식, 자녀들의 참된음식, 개에게는 주지마라.

22. 이사악과 파스카양, 선조들이 먹은만나, 이성사의 예표로다.

23. 참된음식 착한목자, 주예수님 저희에게, 크신자비 베푸소서.

저희먹여 기르시고, 생명의땅 이끄시어, 영생행복 보이소서.

24. 전지전능 주예수님, 이세상에 죽을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시민 되게하고, 주님밥상 함께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복음환호송


요한 6,51ㄱㄴ

◎ 알렐루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1ㄴ-17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요한 6,56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창세 14,18-20) 해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 멜키체덱이

떡과 포도주를 봉헌하고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성경은 멜키체덱의 기원을 매우 신중하게 다룸으로써, 그 인물의 신비스런 성격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백성은 공식적인 사제에 대하여 언급할 적마다 멜키체덱을 상기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이던 멜키체덱을 떠받듦으로써 자기네 신앙이 아론의 후손들에게만 한정된 닫힌 신앙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열린 신앙임을 입증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보기 드물게 멜키체덱의 출신성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그가 하느님께로부터 생명을 받고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멜키체덱은 왕이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하게 경신례에 매인 사람이 아니고, 성전의 사제들보다도 자기 백성에 대하여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 하느님 앞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했다.

멜키체덱은 떡과 포도주를 바쳤다. 이는 멜키체덱이 보인 친절함을 본받아 그리스도인들,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네 관습과 예절과 경신례의 한계를 벗어나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열도록 촉구한다.


화답송(시편 110[109],1.2.3.4(◎ 4ㄴㄷ) 해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로다.


이 시편, 특히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로다.”라는 후렴은 첫째 독서를 되울리고 있다.

이 시편은 전통적으로 메시아의 왕권과 사제성과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예고하는 메시아적 신탁으로 해석되고 있다. 메시아는 아론의 후손으로서가 아니라 멜키체덱처럼 하느님의 선택에 따라 참된 사제가 되신다는 것이다. 히브 5는 그 신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실현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제2독서(1고린 11,23-26) 해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모임을 가질 때 밥상에 둘러앉아서 주님의 만찬과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였다. 바오로는 주님의 밥상에서 함께 밥을 나누는 것은 곧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주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처럼 목숨을 다하고 바침으로써, 당신의 살과 피와 생명과 마음을 내놓고 나누어주시는 주님의 밥상(미사성제)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그 자기희생과 헌신에 동참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를 위하여 자기가 땅 위에 사는 동안 관리하고 있는 하느님의 소유인 모든 재물뿐 아니라 자기 온 마음과 정성과 생명까지 내놓고 나누고 바치는 가정과 민족사회 인류사회 곧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사형 받아 죽기까지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상 제사인 미사성제의 내용이다.


복음(루카 9,11ㄴ-17) 해설

<예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강복하고 떼어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예수께서 굶주리고 허기진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은 메시아적인 사건인 동시에 정치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14절에서는 여인들을 빼고 남자들만을 헤아린다. 당시 여인들은 정치집회나 군대에 가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남자들은 자발적으로 성전(聖戰) 군대가 그랬던 것처럼 50명씩 무리지어 앉았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들어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군중의 기대를 따르실 수가 없었다. 굶주리고 허기진 군중이 불쌍해서 배불리 먹이신 예수께서 이제는 군중의 엉뚱한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런 그들을 설득하는 일을 결정적으로 그만두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권력과 군사력을 장악하고서 분배정의를 강제집행해 줄 분이 아니셨던 것이다. 실상, 독재권력과 진정한 분배정의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진정한 분배정의는 일반 사람들 스스로 마음이 눈떠서 ‘사랑에 찬 나눔, 곧 진정한 정의’를 자기 도덕의 힘으로 싸워 얻어 독재를 깨부술 때 비로소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일반 사람들 스스로가 ‘부자들과 권력자들에 대한 은밀한 동경과 선망’을 끊어버리고, 비인간적 독재적인 성향과 독점욕을 끊어 버려야만 비로소 진정한 분배정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다. 그 같은 일반 사람들의 도덕적인 힘 앞에는 그 어떠한 독점과 독재의 세력도 한낱 허깨비임이 여실히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그렇게 깨어난 일반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화신(化身)이다. 그리고 깨어난 사람들 곧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고 왕이 되시는 민족사회와 인류사회가 곧 하느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력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서로 목숨까지 내놓고 바치며 섬기는 일반 사람들’이 민족사와 인류사의 주역이 되게 하는 방식으로 왕이 되시려 한 것이다.


묵상

<성찬의 신비,

봉헌과 희생제사>


창세기에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봉헌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많은 교부들은 멜키체덱이 제사의 재료로 사용한 빵과 포도주를 성전전례를 예고해 주는 상징으로 본다. 그리고 히브리서에 의하면(7,1-13) 멜키체덱이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인물이 되어 있다. 왕이요 사제인 멜키체덱이 바친 제사가 승리에 대한 감사의 제사였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사도 당신의 승리에 대한 감사의 제사이다.

따라서 멜키체덱의 봉헌은 그리스도의 제사를 미리 보여 주는 아벨의 제사나 아브라함의 제사와 견줄 수 있는 제사이다. 미사경본에서도 아벨의 제사와 멜키체덱의 제사를 함께 기억한다.

구약의 제사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은 흔히 희생되거나 태워졌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셨고”(로마 8,32),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셨다.”(요한 3,16)


<계약의 피>


탈출 24는 히브 9 및 마르 14와 연관되어 있는 대목으로서 성찬의 또 다른 측면을 비추어주고 있다. 그 대목에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체결하는 계약의 예식이 묘사되어 있다. 그 예식은 백성이 주님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약속과 피의 예절로 되어 있다. 모세가 세운 제단은 계약의 상대방인 하느님을 나타냈다. 먼저 제물의 피를 제단 위에 붓고, 그 다음에 백성 위에 뿌렸다. 이렇게 하여 똑같은 피가 계약의 쌍방을 얽어맸다. “이는 계약의 피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당신 피붙이처럼 마음을 쏟으시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성찬을 거행하면서 모세의 예절 형식을 따라서 “이는 새로운 계약을 맺는 내 피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새로운 계약은 하느님과 모든 사람(인류 전체)이 맺는 완전하고 결정적인 계약이다. 이 새로운 계약에서 인류는 “서로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겠다고 맹세한다. 맹세한 대로 인류가 지상의 모든 것을 나누면서 한 마음 한 뜻이 될 때 하느님께서는 인류세상을 지상낙원으로 변하게 하시고 그 지상낙원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부활하여 영원하고 결정적인 천상잔치의 식탁으로 옮겨 앉게 될 것이다.


<생명의 빵>


생명을 주시는 빵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다.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인 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이 참 생명의 유대가 아니면 증오와 분열과 전쟁을 피하여 인류를 화해하고 일치하게 할 수 있는 길이 결코 없다. 사람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스도 자신의 참 생명(하느님 자녀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귀중한 사람이라는 복음이 아니고서는 인류가 한 가족을 이룰 수 없다. 그 복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내 것과 내 자신을 남에게 바칠 수 있겠는가? 자신을 바쳐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그 복음서에서가 아니면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물겠노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 형제자매가 된 사람은 모두 그 생명의 요청에 따라 그리스도처럼 인류단합을 위해 몸 바쳐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성찬과 인류의 일치>


마태오 복음서에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라는 말씀이 나오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발을 씻어 주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성찬전례의 근본 요소와 목적이 인류의 화해와 합심에 있음을 나타낸다.

사람은 개별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류 공동체 안에서 인류 공동체로서 구원받는다. 인간과 인류를 사랑하고(사람을 사람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사랑하고) 인류의 품에 들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잘못을 함께 견디지 않으며 구원받지 못한다. 잘못된 길에 들어 서 있으면 한시바삐 바른 길로 돌아서고, 잘못된 사람이 가져다주는 고통을 견뎌 내고 기다리는 통애(痛愛)가 그리스도다운 사랑이고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부축하며 나아갈 수 있는 일치의 길이다. 하느님께서 인류 공동으로 함께 개발하여 함께 누리라고 주신 능력, 자질, 자원 등 지상의 모든 선물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차지하고 빼앗길까 봐 방어하면서 혼자 누리는 소수 사람들의 불의(不義) 때문에 인류 대부분이 가난과 굶주림과 비참의 수렁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그렇건만 사람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선택과 결단의 자유가 있는 만큼, 참을성 많은 인류의 대부분의 수난은 마음이 얼어붙은 소수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돌아서 나눔의 기쁨과 풍요를 누리게 하여 기필코 인류가족의 완전한 일치를 기약하고 투쟁하는 고뇌요 고통임이 분명하다. 화해와 일치의 제사인 그리스도 십자가의 제사는 오늘도 인류의 발걸음 안에서 장엄하게 바쳐지고 있으며, 그 효과는 불의한 때의 나 같은 사람들의 돌아섬(회개, 회심)으로 나타나고 급기야는 인류 공동체의 일치로 나타날 것이다.

 

복음해설(2)


예수께서 빵을 많게 하신다(9,10-17)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직분을 수행하신 일은 당신의 다양한 행적과 주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하느님 나라의 기초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표지와 싹이 교회다. 마르코를 주의 깊게 따르는 루카가 이 점에서는 마르 6,45-8,26을 소홀히 지나친다. 그러나 사실은 마르코 복음서 이 부분의 내용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적인 맥락과 틀을 줄이고 있다. 루카는 고집스럽게 예수께서 당신 직분을 갈릴래아라는 경계 안에서 수행하셨다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으로 여행을 하는 것이 교회 사도들의 고유한 임무임을 강조한다.

이 대목은 마르 6,30-44; 마태 14,13-21; 요한 6,1-13과 병행한다. 마태 15,32-39와 마르 8,1-10은 예수께서 두 번째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이야기한다. ㄱ) 열두 제자가 돌아온 사실은 군중(앞으로 나올 장들에서 열쇠가 되는 낱말)이 따라온 사실과 더불어 첫째 부분을 이룬다(10-11절). ㄴ) 그 다음에 기적 이야기가 나온다(12-17절). 어휘는 양식(糧食)의 어의적 분야(‘빵’, ‘먹다.’, ‘광주리’, ‘남다.’)에 속한다. ‘군중’과 ‘열두 제자’라는 개념은 한 묶음(또는 한 본문의 시작과 끝에 되풀이되는 낱말들)을 형성하고 있다(12.17절).

10-11절: 10절에서는 사람다운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더불어 벳사이다라는 고을에서 쉬고 계신다. 열두 제자(1절)가 이제 ‘사도들’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벳사이다는, 원래는 시골이었는데, 필리포스 영주가 잘 꾸며 도시 급으로 올려놓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딸을 기려 율리야라고 불렀다. 필립보, 안드레아, 베드로는 벳사이다 출신이었다(요한 1,44). 벳사이다는 사실상 갈릴래아 경계 안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루카는 그 위치를 그냥 지나친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서들이 항상 법적인 지역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루카 4,44의 해설 참조). 예수께서 “그들을 맞이하셨다.”라는 구절은 당신의 자비로우신 마음을 드러낸다.

12-17절: 이 일화(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유일한 기적 이야기)는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당신 직무를 수행하신 일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순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수님의 활동은 사도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집중될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의 생각은 점점 더 당신 자신이 겪게 될 운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이야기는 성찬을 상징하고 있다. 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성찬례의 ‘제사적’ 특징을 강조한다. 이 대목의 상징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군중을 배부르게 먹이신 사건이 유다인들에게 이집트 탈출 때 일어난 기적들을 떠올리게 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라는 말은 저녁때가 되면 밥을 먹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이 이야기가 지닌 상징성은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라는 16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께서 빵을 많게 하신 모든 이야기에서(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 두 차례 나오는 이야기까지 포함하여) 우리는 성찬에 대하여 가르치는 말씀을 만날 수 있다. 그 말씀은 엠마오의 만찬에서도 똑같은 순서로 나온다(“들고… 축복하신 다음… 떼어… 주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도 나누어 주게 하셨다고 하지만, 루카는 그 말을 뺌으로써 그리고 빵에 관심을 더 집중시킴으로써 성찬의 측면을 더 강조한다.

열두 광주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세기 유다이즘에서 그렇듯 널리 퍼진 묵시문학 흐름 속에서, 12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구나 루카는 ‘클라스마타’라는 그리스어 낱말로 ‘조각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 낱말이 초기 교회에서는 성찬 빵을 떼거나 쪼갠 조각들을 가리켰다(디다케, 9,3-4).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사람다운 예수님, 다정다감하신 예수님을 제시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고독, 평온함, 평화를 체험하려고 외딴 곳으로 물러날 필요를 느끼신다. ㄴ)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를 당신 말씀과 활동으로 실현하신다. 삶에 지친 사람들에 대한 당신 연민과 사랑을 보고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고 따른다. 그런 모양으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을 받은 분임을 보여주신다(참조. 루카 7,18 이하; 12,22-31). ㄷ) 빵을 많게 한 기적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께서 가져다주신 구원이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ㄹ) 제자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임무를 다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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