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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6주간 토요일 복음 이야기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23 조회수1,346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 세상에 모든 만물에는 각각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식물학자들에게는 우리의 눈에는 그냥 하나의 식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각각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중1 때 담임 선생님의 존함이 김민지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5년 동안 마산에서 지도한 여학생이 있습니다. 이 여학생의 이름은 박민지입니다.

 

어제 우연히 이 아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지도할 때 이름을 부릅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어떨 땐 좀 이상합니다. 제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과 이름이 똑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냥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름엔 그 자체로서 존재의 상징이 됩니다.

 

김춘수 시인의 에도 나옵니다. 지금도 30년 전 국어시간에 배운 이 시를 해설해 주신 선생님의 그때 수업 내용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워낙 감성적으로 시를 잘 지도해주셔서 그렇습니다. 이 시에 보면 꽃에도 꽃에 이름을 불러줘야 하나의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도 나타나지만 그만큼 이름이라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제 학생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이름이 선생님의 존함과 같아서 왠지 선생님의 존함을 훼손시킨 건 아니지만 반말을 하는 경거망동한 행동을 한 것처럼 여겨져서 잘 부르지 않은 것처럼 이름에는 그런 묘한 성질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면 청하는 무엇이든지 다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긴 하지만 실제 잘 하는 경향을 잘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평화방송에서 어쩌다 신부님들께서 방송에서 기도를 하시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지금까지 거의 9년 동안 한 번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대표적인 기도 양식을 실제로 보니 저도 그렇고 개종 후에는 이런 형식으로 기도를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개종 전에는 늘 하는 기도 형식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하시는 게 기도 끝에 하는 하나의 기도 형식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오늘은 이 내용을 묵상하면서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해 보면 나는 기도를 할 때마다 그렇게 기도를 했지만 과연 진심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했는지 그냥 입으로만 앵무새처럼 하는 빈말은 아니였는지 생각해봤습니다.

 

빈말은 아니겠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말씀의 의미를 자세히 모르고 했다고 하는 게 더 정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라는 호칭, 이름을 사용할 때는 우리의 입에서 그 호칭이 나갈 때는 그 의미 속에 당신은 나의 구주이시고 우리의 메시야이심을 고백하는 마음이 호칭 속에 그런 고백이 묻어 있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께 아뢰올 때 우리의 청을 우리가 직접 하느님께 올리는 게 아닌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드리기는 하지만 그 내용 자체도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대신 올려주시는 형태의 꼴로 저희를 대신해서 하시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응답이 없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말씀이라고 치부를 할 수가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답이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그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릴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청하는 기도가 그게 정말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처럼 우리의 뜻이 과연 하느님의 뜻과도 일치하는 기도인지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린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말로만 그렇게 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은 청을 하더라도 당신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청을 하니 되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알 수가 없고 또 우리가 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는 이루어지지 않고 청원이 허사가 된 것처럼 알았지만 시간이 흘러서 보면 그때 그게 진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구나 하고 알 때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청원기도는 이루어지는 여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이상한 결과가 발생하게 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는 하느님 입장에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이루어짐의 기준도 우리의 시각에서 판단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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