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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부활 제2주일 본문+해설+묵상>-김수복
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08 조회수2,243 추천수0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12-16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13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14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15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16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8(117),2-4.16-18.22-24(◎ 1)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또는 ◎알렐루야.)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주님은 나를 벌하고 벌하셨어도, 죽음에 넘기지는 않으셨네.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제2독서


<나는 죽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9-11ㄱ.12-13.17-19 

형제 여러분, 9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0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라.”

12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13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17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복음환호송


요한 20,29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알렐루야.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요한 20,27 참조

네 손을 넣어 못 자국을 확인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알렐루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사도 5,12-16) 해설

<사도들이 병자들을 고쳐 주고

악령들을 쫓아내는 등 놀라운 일들을 베풀자

신자들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사도행전 첫 장에서 초대 공동체의 생활 모습을 묘사한 짧은 ‘요약문’들이 나온다. 오늘 첫 독서는 그 요약문들 중에서 세 번째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는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구마활동을 특히 강조한다.

사도들이 행한 구마활동: 초대 신자공동체에서는 기적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권위를 입증해 주었고, 악에 대한 승리로 말미암아 우주만물이 제 본 모습을 찾게 될 마지막 시대의 증표로 여겨졌다.

내적승리: 그러나 악에 대한 참된 승리는 구마적인 성격을 띤 승리가 아니라 기쁨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움’이 실현되어 가는 상태다.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과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와 세계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속속들이 바꾸어 놓으려고 확고하게 결단을 내리고 실천하는 상태다. 또한 마음 깊은 데서부터 우러나는 진정한 회개다.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살아계시고 활동하고 계심을 드러내 보이는 데는 그러한 회개와 결단과 실천이 눈에 띄는 기적들보다 훨씬 위력이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사회의 한가운데서 힘차게 구원사업을 펴고 계시는 성령을 발견하고 그 성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 인류와 교회공동체가 악을 깨부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다.


화답송(시편 118[117],2-4.16-18.22-24[◎ 1]) 해설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 시편은 감사드리는 찬미가로서 초막절 축제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주님께 바치는 집단적인 찬미가도 되기 때문에 그 찬미에 모든 사람이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성공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사람 스스로의 능력이나 자격으로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오늘 이 찬미가를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승리를 보고 기쁨에 넘치게 된다. 십자가 위에서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이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영광스럽게 해 주셨다. 주님께서 그리스도께 이루어 주신 위대한 업적은 우리에게 찬미와 감사드릴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리스도처럼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가고 고통과 수모를 당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부활과 승리와 영광을 안겨 주시리라는 확신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에 넘칠 수 있다.


제2독서(묵시 1,9-13.17-19) 해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지만

이제 영원히 살아 계시며,

우리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


묵시록 저자는 성령께 사로잡혀 황제에게서 박해받는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자기가 받은 계시를 기록하여 보낸다. 주님의 날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구원자), 마지막 시대의 심판자, 유일하신 참된 사제(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으신 분), 유일하신 결정적인 임금(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신 분)으로 나타나신다. 여기서 나오는 황금 등잔대 일곱 개는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

묵시록 저자가 받은 계시와 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현들은 당신이 교회를 이룩하여 세상 안으로 파견하는 메시지들이다. 따라서 주님의 발현이나 계시들은 당신 부활로써 시작된 일을 이어가며 당신이 죽음을 이기고 살아계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복음(요한 20,19-31) 해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평화를 우리에게 주신다>


볼 줄 알아야 한다(19-23절): 십자가 발치에서 요한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는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졌음을 보게 된다. 다른 사도들은 예수께서 죽는 순간에 멀리 도망가고 없었다. 그분이 부활하신 다음에야 그들은 창에 찔린 그분의 옆구리를 보고서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에게 주시려는 사랑의 성령을 발견한다. 그 성령께서는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이루게 해 주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줌으로써 창조자의 행위를 되풀이하신다(참조. 창세 2,7). 그분은 또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을 줌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와 악을 쳐부순 당신 승리에 참여하게 하신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 대가를 서로 나누어 져야 마땅하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성령의 권능을 침해하는 꼴이 된다.

증거를 받아들여야 한다(24-31절): 토마는 부활한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의 증언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른 사도들과 토마가 함께 있을 때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 토마를 훈계하신다. 그 훈계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뜻 깊은 훈계다.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는 믿음보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참다운 믿음의 태도로 건너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새로운 생활 태도는 주님을 사람의 한계 안에 가두어 놓지 않는 태도이며, 사람 스스로는 무능하고 무가치함을 인정하고서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맡겨드리는 태도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받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묵상

<친교와 분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뒤에 교회가 탄생한다

사도행전은 갓 태어난 신자공동체 생활을 묘사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를 이어 준 친교의 정신을 그리고 있다. 즉, 저자는 모든 세대가 경탄하고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귀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사람은 본시 서로 친밀하게 사귀도록 만들어졌다. 만물과 사람을 창조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들과 친교를 맺음으로써 연대의 법칙을 온 우주의 기초로 세우셨다.

창조설화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람은 본래 서로 필요하고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사람들이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도록 배려하셨다. 이렇게 맺은 남녀 사이의 관계는 사람이 자유로이 서로 사랑하고 자신을 바치는 친교와 연대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의도를 외면하고 이기심에 빠져 죄를 지음으로써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는 금이 가고 사람끼리의 관계에도 금이 가게 된다. 카인과 아벨 두 형제의 이야기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형제와 친밀하게 지내기를 거부한 카인은 고독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하느님과도 친하게 지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비록 죄를 범했지만 사람끼리의 친교에 대한 욕구와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친교에 대한 그런 욕구나 그리움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회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완전한 친교를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 행위로써 새로운 구원 경륜을 펼치기 시작하셨다.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처음부터 친교의 공동체로 태어났다. 이에 교회에 몸담은 모든 사람은 자연히 인류의 일치와 친교를 위해 몸 바쳐야 하는 사명을 받게 되었다. 이 사명은 수직적으로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하며, 수평적으로는 모든 사람끼리 친밀한 관계를 맺고 서로 연대의식을 느끼며 일치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하려면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물질적 내지 영적 선물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온 인류를 한 몸으로 만들어 주고자 하며 당신이 친히 그 몸의 머리가 되어 주신다. 그리고 성령은 그 몸의 생명이 되신다.


<오늘의 현실 속에

친교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민족과 인류를 참된 친교가 이루어지는 공동체로 만들어 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이기주의, 개인주의, 자기중심주의, 타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와 차별 따위 그리고 전쟁과 착취와 억압과 학살을 극복하고 끝내려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이 평등하고 귀중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초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인 평등과 물질적인 평등 이전에 서로 귀중히 알고 물질이 아닌 자신의 노동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한마음이 되고 한 몸이 되도록 하는 일에 몸 바치겠다는 결단이 꼭 필요하다.

친교는 결코 생각이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먹을 것을 실제로 나누어 굶주림을 채워 주고 병을 낫게 하며, 내 나라가 크게 부강하지 않더라도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행동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 친교는 거짓 친교이다. 내 능력과 자질을 그리스도처럼 진심으로 나누고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며 타인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을 때 참된 친교는 이루어진다.


복음해설(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공식적인 발현;

성령을 선물로 주심(20,19-23)

이 일화는 예수부활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넷째 복음서 저자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일과 성령을 선물로 주신 일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공관복음서들은 그 일들을 다른 곳에서 펼치고 있다. 그렇지만 루카 복음서는 여기에서 그 공식적인 나타나심, 사명, 성령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하여 말한다. 마르코 복음서 마지막에서도, 1코린 15에서 바오로도 그 나타나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계기를 구분한다. 예수께서 나타나 ‘평화’를 기원하신다(20,19-20); 다시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를 나누고 제자들을 파견하신다(20,21); 성령을 주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허락하신다(10,22-23). 본문을 살펴보자.  

- “예수께서 나타나 ‘평화’를 기원하신다.”(20,19-20)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모양으로 시작한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20,19) 무대는 제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말은 우선 예수께서 나타나신 일이 비상한 일임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아마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당하던 박해를 암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은 유다인들 및 셈족 사람들 사이에서 흔한 인사법이었다. ‘평화’(‘샬롬’)는 좋은 것을 모두 합쳐놓은 상태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인사를 할 때 매우 인상적인 동작을 취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20,20ㄱ)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손과 옆구리는 예수께서 토마스에게 나타나실 때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이어서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소개한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20ㄴ) 그 기쁨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께서 최후만찬 연설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기쁨이다(6,22).

- “예수께서 다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신다.”(20,21) 그 다음 요한 복음서 저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예수께서는 인사를 되풀이하면서 장엄한 순간을 보여주신다. 그 순간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순간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신 것처럼(참조. 17,18), 이제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이 파견 행위를 마태 28,18-20; 루카 24,47; 마르 16,15에서 말하는 행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람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신 것과 마찬가지다.

-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다.”(20,22-23) 예수님은 여기에서 성령을 주어 죄를 용서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제자들을 파견하는 일을 구체화하신다. 우선 우리는 부활하신 분의 동작을 보게 된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20,22ㄱ) 이 동작과 말씀은 상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부활하신 분이 성령을 쏟아 부어주신다(참조. 7,37-39). 예수께서는 숨을 불어넣는 동작을 취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2ㄴ-23) 이제 예수께서 성령을 보내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신다(14,15-17과 병행 대목). ‘성령’이라는 호칭은 분명히 삼위일체 믿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선물로 주신다. 그 권한은 전체를 가리키는 셈족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다(“용서를 받을 것이고 -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표현은 히브리어 몇몇 표현 안에 들어 있다. 그리고 마태 16,19와 18,18에 나오는 ‘매다. - 풀다.’와 상응하는 요한 복음서 저자의 표현이다. 교부들의 해석에 따르면, 죄에 대한 그와 같은 교회의 권한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선 세례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리킨다. 그러나 또한 세례를 받은 뒤에 지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그 안에 포함된다.


토마스도 참석한 가운데 예수께서 나타나심;

복음서를 마감하는 신앙고백(20,24-29)

이 이야기는 앞 이야기와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20,24)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는 말은 부활체험을 표현하는 요한 복음서의 양식이다(참조. 20,18). 토마스는 믿기 위한 조건을 내세운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20,25) 여드레 뒤에 예수께서는 똑같은 말씀과 똑같은 인사를 하면서 나타나신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께서는 이어서 토마스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20,26) 그렇게 예수께서는 토마스가 요구한 조건을 채우신다.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이시다. 마지막에 나오는 말은 이렇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 토마스가 한 말은 넷째 복음서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가장 분명한 고백이다. ‘주님’, ‘하느님’이라는 개념은 서로를 보완한다. 요한 복음서 전체가 이 신앙고백을 향하여 달려온 셈이다. 1,1.14; 5,18-19; 8,24.28; 10,30-36; 14,6-11; 17,5.24를 떠올려보자.

요한 복음서의 일차 결론 앞에 예수께서 들려주신 마지막 말씀은 행복선언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 토마스의 신앙고백은 의심할 여지없이 놀라운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보고 믿는 일”은 하느님의 은총에 자기 자신을 열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다(6,40). 아드님을 보는 일은 사도들의 특권이었다. 아마 요한 복음서 저자는 공관 전승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을 것이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루카 10,24; 참조. 마태 13,16).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이어서 육안으로 보지 않은 사람들도 믿음이 주는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요한 복음서의 결론(20,30-31)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이어서 자기 작품을 요약한다. 우선 한 가지를 지적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20,30) 요한 복음서 저자가 자기 작품의 내용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징’이라는 개념은 어떤 저자들로 하여금 이 결론이 가정적(假定的)인 ‘표징의 자료’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왔으리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확실치 않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표징’이라는 개념으로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두드러진 대목을 짚어내려 했을 것이다. 더욱이 가장 뛰어난 표징은 예수님의 ‘부활 - 승천’이다(참조. 3,14).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도 넓은 의미로 보면 표징이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 내용을 ‘표징들’이라는 개념으로 종합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어서 요한 복음서 저자는 그 표징들의 목적, 자기 작품의 목적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31) 여기에서는 천재적인 넷째 복음서 저자가 지닌 종합능력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요한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나온 예수님의 두 가지 칭호를 종합한다. 즉 예수께서는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참조. 19,30). 그리고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아듣게 해 주는 열쇠는 서언에 나온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1,14ㄱ); 사람이 되신 말씀이 누리시는 영광은 은총과 진리가 가득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이 누리시는 영광이다(1,14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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