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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부활]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사순절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4-03-11 조회수4,506 추천수1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사순절 1

 

 

“교회는 수백 년을 지내오면서 신앙의 작품인 전례주년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전례주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거쳐 온 2000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할 뿐 아니라, 그 당시 일어났던 일과 ‘동시’가 되게 하는 초대입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을 이어주는 전례주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은 책입니다.”(책 서문에서) 

 

사십일 

 

전례주년에서 사순절이라고도 불리는 부활절 이전의 참회 시기는 40일 동안 지속된다. 부활 축제를 준비하는 때이다. 부활절 이전 참회 시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사순절은 다양한 형태들을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사순절은 자기 절제이다. 또한, 음식이나 돈이나 시간 또는 공간에 대한 포기 등 그것이 어떻게 행해지든, 사순절은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의 형태이기도 하다. 부활절 이전 40일은 막다른 골목에서 돌아서는 시간을 위해서, 바닥을 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위해서 충분하고 좋은 시간이며, 부활 축제를 참으로 생동감 넘치는 축제로 체험하도록 도와주는 시간이다. 사순절 동안 검소하게 절제하며 생활한 사람만이 부활 축제에 차려진 식탁의 풍요로움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된다. 

 

생각의 전환 

 

회개는 성경에서 사용한 그리스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한다.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라는 말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 선포는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외침들을 계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울림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롭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회개에 대해 말씀하셨다면, 그분께서는 그 시작이나 끝에서 어떤 도덕적인 성과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 또는 맺고 있기는 하지만 훼손된 그러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다. 그 관계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넘어서서 하느님과 맺는 관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야에서 하느님을 향한 회개는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고, 하느님에게로의 귀향이지, 교만에서 생겨날 수 있는 그런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회개에서 또한 다른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서서 회개하는 힘도 생겨난다. 하느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늘 자기 자신마저도 외면한다. 그래서 바쁜 일에 몰두하고 오락에 빠진다. 한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다른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해 되돌아가는 곳, 그곳에 기쁨이 있고 선을 위해 넘쳐흐르는 에너지가 있다. 우리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그러한 귀향의 은총을 빌어주자. 

 

“너희가 믿지 않으면, 머물지 못하리라.” 

 

좋은 날에도 나쁜 날에도 우리를 지탱하고 영감을 줄 수 있는 힘은 성경에 담겨 있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탄생 700년 전 예언자 이사야는 예루살렘 역사의 전환기에 아하즈 왕에게 “너희가 믿지 않으면, 머물지 못하리라.” 하고 천둥 같은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여 대 신앙고백문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하고 외울 때가 아니라, 일상에서 “저는 당신을 믿고 사랑하렵니다. 저의 힘이시여.” 하고 고백할 때 이미 그 절정에 다다른다. 성경에 담긴 믿음의 영혼은 사랑과 희망이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은 퇴화한다. 그 믿음은 삭막하게 되거나 혹은 자신을 속여가면서 사람들을 성숙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인도하기보다 오직 체제 유지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음산한 종교재판관의 믿음처럼 파괴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종종 어려움을 겪긴 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 함께 나누는 믿음의 기쁨을 위하여 기도드리자. [2014년 3월 9일 사순 제1주일 가톨릭마산 제10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사순절 2

 

 

“보호받으며 보호하고” 

 

재의 수요일 전례에서 우리는 극적인 방식으로 우리 실존의 한계를 상기하게 된다. 곧 우리 자신과 다른 이의 잘못을 통한 그리고 특히 모든 한계의 한계인 바로 죽음을 통한 제재이다. 

 

우리가 위험한 경계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비록 늦었다 할지라도 무엇이 우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게 된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묻는 이들에게 자주 목자의 표상을 가리켜 보인다. 마치 천을 짜는 견본처럼 구약성경 45권과 신약성경 27권 안에는 목자의 표상이 삽입되어 있다. 

 

성경에서는 자기 이웃의 보호자와 목자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친히 목자로서 마주 서신다. 성경의 시각에서 돌보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적인 특성이고, 사람이 되신 당신 아드님의 본질적 특성이다. 하느님이신 목자께서는 늘 새로운 사람들을 부르시어, 그들이 희미하나마 당신을 닮아 맡겨주신 이웃들에게 착한 목자가 되게 하신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 이것은 비단 교회의 직무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사명이다. 자기 형제를 돌보려 하지 않았던 카인의 어두운 형상은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늘 새롭게 역사의 지평에 나타난다. 오늘날 아벨은 이 땅에서 저질러지는 살인과 살육의 희생자들이며 병든 사회 구조의 희생자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마태오복음이 전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과 처지가 비슷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러한 사람들을 보통 이상의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줄 목자들, 보호자들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는 양심의 소리를 통해 “바로 네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실제로 돌보아주는 이들이 여전히 얼마 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함께 이웃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성모 마리아의 모범을 따르는 어머니처럼 돌보아주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다행이다.

 

목자로, 보호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항상 자기 힘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서 그 목자를 누가 보호해 주고 지켜주는가? 라는 물음이 따른다. 성경에서는 그 물음에 시편에서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네 오른쪽에 계시다. … 나거나 들거나 주님께서 너를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시편 121,5-8) 이 말들은 수많은 재앙에 직면했을 때 우리 영혼을 보호하는 지붕과 같다. 

 

사순절은 삶의 모든 가능한 영역에서 회개에로 초대한다. 이때 회개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에 속하는 지켜주고 보살펴 주는 것, 말하자면 아이들과 병자들과 그리고 영적으로 지치고 공허해진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순절은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라는 초대이다. 그러한 회개는 때때로 부담스럽고 고통스럽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기쁨으로 이끌어 주는 길이기도 하다. [2014년 3월 16일 사순 제2주일 가톨릭마산 제10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사순절 3

님 수난 성금요일

 

 

신비롭게 빛나는 십자가 

 

예루살렘 도성의 성문 앞에 세워졌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 극단적인 불화를 보여준 표지였다. 골고타에서 십자가는 한 인간을 고문하고 처형하기 위한 도구 말고 다른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사흗날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는 부활하신 분으로 나타나셨다. 제자들과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제 치욕과 죽음의 표징에서 죄와 죽음을 이긴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처형의 나무에서 생명의 나무가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최종적인 모습은 그분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거룩하게 변모된 상처를 지닌 부활하신 분으로 보여준다. 

 

찢어진 휘장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를 치욕스러운 죽음의 상징에서 구원과 죽음을 이긴 승리의 표지로 바꾸어 놓았다. 예수님께서 큰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을 때, 예루살렘의 성전 휘장이, 성전의 심장부인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진다. 그 사실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성소를 열어젖혔다는 것을,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이 열렸다는 것을, 성전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은 하느님을 향해 활짝 열리게 되었고, 뒤틀린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구원받게 되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세워졌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피로 새로운 계약이 맺어졌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사람들의 십자가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의 삶을 그늘지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늘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힌다. 역사 속에서 늘 반복해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겪는 고난의 십자가는 세워지고, 사람의 얼굴은 “피와 상처로 가득한 머리”로 변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수난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각자 겪는 고난을 상징한다. 그러나 십자가 형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 안에서 죽음을 이긴 승리의 표지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거룩하게 변모된다. 

 

왜 고난을 당하는가? 

 

인간이 겪는 고통과 그리고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다른 피조물들도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한 분이시며 동시에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그곳에서 더없이 절박하게 제기된다. 무죄한 이들의 고통에 대하여 그분께서는 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하느님께 물으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짓눌린 피조물의 수많은 한숨 소리를 마주하며 “왜”라는 엄청난 물음은 그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을 인간의 죄 때문에 피로 속량되기를 바라시는 잔혹한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 아드님 안에서 증오를 내면으로부터 극복하는 꾸밈없는 사랑의 형상으로 그분을 계시하신다. [2014년 3월 23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제10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사순절 4 

십자가의 길

 

 

우리 삶은 하나의 길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길은 영원한 고향에 이른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길’이라 하셨다. 그분께서는 죄짓고 길 잃은 사람의 뒤를 쫓아가셨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새로운 길을 가르쳐 주고, 모든 방황에서 벗어나는 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의 마지막 구간은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 경배에서 교회는 묵상하고 기도하고 노래하며 십자가와 무덤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뒤따른다. 그리고 교회는 14처에 이 길을 간직하고 있다. 이 14처는 주님의 수난에 실제로 동참하려고, 그래서 믿음과 희망 그리고 선행을 할 힘을 새롭게 얻으려고 묵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받으심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당시 지상의 최고 권력자인 로마 황제를 대리하는 빌라도 앞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서 계신다. 로마인은 애매모호한 죄수에게 그가 임금인지, 그렇다면 그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어서 밑도 끝도 없이 “진리가 무엇이오?” 하고 묻는다. 그렇게 대화는 고소당한 자의 침묵 속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사형 선고로 끝난다. 우리 모두는 죽어야 하고, 따라서 사형 선고를 받고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죄와 죽음의 장벽을 부수어 허물어버리기 위하여 오셨다. 

 

제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 

 

십자가의 죽음은 고통스럽게 죽이는 특별한 형태이다. 로마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제국에서 이방인이셨기에, 채찍질과 가시관으로 시작하여 서서히 죽임을 당하는 처참한 의식이 그분께 집행되었다. 십자가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통상 십자가의 횡목을 스스로 지고 처형장으로 가야 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방식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무게는 그분께서 측은히 여기고 죄를 속죄하려고 스스로 받아지신 사람들의 죄와 고통의 무게를 나타내고 있다. 

 

제3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눌려 첫 번째 넘어지심 

 

심문과 조롱과 채찍질의 고통으로 이미 기력이 다하신 그분께서는 십자 들보의 무게에 눌려 비틀거리며 처음으로 바닥에 넘어지셨다. 몸에 기력이 다하신 주님의 비틀거림은 아무 죄 없이 육체와 영혼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위로의 표상이 된다. 또한, 죄를 짓고 비틀거리며, 그 넘어짐에서 다시 일어서도록 주님께서 돕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표상이 된다.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죄의 힘은 구원의 은총으로 극복된다. 

 

제4처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심 

 

마리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로 향해 가시는 아드님과 눈에서 눈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말없이 대화를 나누신다. 백발의 노인 시메온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님께서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지 어느덧 33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는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다.” 하고 덧붙여 말했다. 이 말이 이제 십자가형을 받으러 가는 길에서 그리고 십자가 곁에서 실현되고 있다. 고통으로 꿰뚫린 마리아의 영혼은 그분을 슬퍼하는 이들의 위로자로 삼게 한다. [2014년 3월 30일 사순 제4주일 가톨릭마산 제10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사순절 5 

십자가의 길

 

 

제5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짐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 시몬은 골고타를 향해 힘들게 나아가는 이 낯선 죄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하지만 뜻밖에 어떤 그런 관계가 맺어진다. 이렇게 남의 짐을 진 키레네 사람 시몬의 감정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전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게 되었던, 느닷없이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지게 되었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져야 하는 질병이나 외로움의 짐인 이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6처 베로니카 예수님께 수건을 건네줌 

 

옛 전승에서는 예수님을 누구의 강요 없이 순수한 연민으로 보살펴주었던 도움의 손길에 대해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베로니카라는 이름의 한 여인은 그분께서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을 수 있도록 아마포를 건네 드렸다고 한다. 그분께서는 그 수건을 받아드셨고, 거기에 당신 용모를 새겨주심으로써, 은총의 그림인 성화상이 되게 하셨다. 베로니카는 그리스도를 위로한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에게 위로하는 법을 가르친다. 

 

제7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눌려 두 번째 넘어지심 

 

빌라도는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나무 관을 쓴 그리스도를 군중들에게 내보이며 “자, 이 사람이요. Ecce homo”하고 소리쳤다. 십자가의 길 제7처의 형상도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 “자, 이 사람이요.” 하고 말한다. “이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비틀거리며 두 번째로 바닥에 넘어지신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비틀거리며 넘어짐으로써 “이 사람”은 자신의 사람됨의 길에서 늘 잘못되어 넘어지는 사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바닥에 넘어지셨다가, 온 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신다. 주님, 저희도 쓰러졌다 다시 일어서도록 한 번, 두 번, 언제나 거듭 도와주소서. 

 

제8처 예수님께서 통곡하는 여자들을 위로하심 

 

루카복음에서 전해주고 있듯이, 백성의 큰 무리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갔다. 그 가운데에는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분께서는 그 여자들에게 돌아서서 위로하셨다. “사물은 자기 눈물을 지니고 있다.” 하고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말했다. 하물며 사람들이야 당연히 눈물을 흘린다. 심지어 교회는 오래전에 울 수 있는 은사를, 죄와 고통에 대한 눈물의 은사를 청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하였다. 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은 참된 인간성의 표현이다. 

 

제9처 예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 

 

세 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세 번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에 짓눌려 쓰러지셨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매번 다시 일어나시어, 골고타를 향한 길을 계속 가신다. 대장부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가 그분께 지운 짐에 눌려 세 번이나 넘어지신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신적인 힘으로 매번 다시 일어나신다. 바로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이다. 예수님께서는 몇 년 전에 한 죽은 아이에게 말씀하셨다. “탈리다 쿰(Talita kumi)! 소녀야, 일어나라!” 십자가의 길 제9처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에 참여하려는 모든 이에게 “사람아, 일어나라! 무관심과 절망으로부터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신다. [2014년 4월 6일 사순 제5주일 가톨릭마산 제10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 전례주년에 따른 여정 - 사순절 6 

십자가의 길

 

 

제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김 당하심 

 

옷은 교만과 허영의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옷은 그 기원에서 사람을 위한 제2의 피부이며, 더위와 추위를 막아준다. 또한, 예로부터 옷은 사람의 품위를 지켜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당신 옷이 벗겨졌다. 이는 완전한 몰수를 나타낸다. 부유함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 사람을 하느님이며 사람이신 분께서는 빈손으로 만나신다. 

 

제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팔을 벌리도록 강요했던 사형 집행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예언적으로 행동하였다. 팔을 벌리는 이 자세는 예수님의 존재를 가장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을 당신께로 끌어들이려고 그들을 향하여 팔을 벌리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분을 거부하였다. 아직도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서는 고향 같은 마음을 찾는 모든 사람을 향해 두 팔을 벌리신다.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사람이 되신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다. 그 사랑은 상처받기 쉽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질려 상처 입게 된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의 종착역은 십자가이다. 여기에서 이 세상의 모든 적대적인 것과 모든 악이 그분을 관통한다. 그러나 또한 여기에서 죄로 말미암아 갈라진 모든 것, 곧 하느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하나로 결합된다. 갈라진 것에서 생겨나는 팽팽한 긴장감, 아니 감당할 수 없도록 잡아 늘어뜨리는 힘으로 그리스도의 몸에서 혈관은 찢어지고, 그분의 심장은 피를 다 쏟아 낸다. 어린양이 늑대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어둠 속에 이미 부활절 아침의 빛이 보인다. 

 

제13처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에서 내려져 어머니 품에 안기심 

 

십자가의 길 제13처는 복음서들이 전해주는 증언을 신심 깊게 전개하여 돌아가신 아드님을 품에 안으신 마리아를 보여준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늦은 오후 저녁기도 시간에 예수님의 시신을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드렸던 이 주제를 새긴 고딕 양식의 형상을 사람들은 저녁기도의 형상(Pieta) 혹은 마리아의 탄식이라 부른다. 많은 예술가는 이 시신을 어린이처럼 작게 표현하였다. 죽은 아드님께서는 다시 품 안의 아기가 되셨다. 이는 고통 중에 살아가는 모든 시대의 어머니들을 위한 위로의 표상이다.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은 편안히 모셔진다. 죽음과 무덤은 끝장난 삶에 대한, 그래서 아무도 열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봉인이다. 성토요일의 고요가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 안에서 죽은 것처럼 보이신다. 이것이 끝인가? 

 

셋째 날 부활절이 있게 될 것이다. 향료를 가지고 간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열린 채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지옥아, 너의 승리는 어디 있느냐 [2014년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톨릭마산 제10면; 에곤 카펠라리 저, 안명옥 주교 · 홍성군 역]

 

* 위의 내용은 ‘하느님의 시간 속에 인간의 시간’을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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