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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숙한 신앙인의 잣대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4-04-10 조회수139 추천수1 반대(0) 신고

출처: https://cafe.daum.net/bbadaking/LgEV/14


 

+ 찬미 예수님!

편안하셨습니까? 첫 주일이죠.

누구한테 물어볼까요?

‘사람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 사랑하는 것이다.’ 맞아요, 틀려요?

반대로 ‘하느님 사랑하는 것이 곧 인간 사랑하는 것이다.’는 어떤가요?

 

두 가지 질문을 했어요.

첫 번째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 사랑하는 것이다. 맞느냐, 틀렸느냐?

정답은 틀릴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어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그것이 맞아요.

그런데 신앙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죠?

자선가들, 인본주의자들, 박애주의자들 많아요. 하지만 무신론이에요.

무신론을 지나쳐서 하느님께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면 아니라 하죠.

나도 사람이고 저 사람도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것이지, 하느님을 끼워 들이지 마라.

하느님에 나에게 해 준 것이 뭐 있냐?

그것은 우리들이 하느님 때문에 인간을 사랑해야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두 번째 질문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맞아요. 불변의 진리에요.

물론 하느님을 열 번 사랑하는데 열 번만큼 인간을 못 사랑하죠.

열심히 본당 활동은 하는데, 아파트 문만 열만 열고 들어가면 독재자가 되고,

가까운 사람들한테 차고 모질게 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 간격을 얼마나 좁히는가 하는 것이 영원한 우리의 숙제겠지요.

 

오늘 수계 생활의 핵심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몸뚱이 아낍니다.

조금이라도 다치면 약도 바르고, 또 몸이 배고프다하면 입에다 뭐라도 집어 넣어주죠.

얼굴에 뭐라도 하나 묻으면 예쁘게 닦아야 되고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대충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네 몸뚱이 아끼듯이 사랑해라!

그러니까 이것이 쉬운 얘기가 아니죠.

어쩌다가는 사랑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매 시간 내 몸뚱이에 애쓰는 그 정성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쉬운 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바로 수계생활의 원칙입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정신이죠.

그래서 십계명의 정신은 두 단어, 흠숭과 존중으로 요약이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사람끼리의 상호존중!

1에서 3계명은 하느님에 대한 흠숭이요, 4에서 10계명까지는 사람들끼리의 존경.

 

오늘 예수님은 한마디로 십계명의 글자대로가 아닌 정신대로 살아야 된다하십니다.

십계명의 글자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 내용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율법학자들 바리새이파들은 십계명의 내용이 아닌 글자대로 살아간다고 하십니다.

 

글자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용대로 살아가는 신자들을 성숙한 신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성숙한 신자가 어떤 모습인지, 즉, 성숙도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몇 점짜리 신자인가 대한 기준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어요.

 

신앙의 성숙에 대한 첫 번째 기준은 고난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야고보서 1장 1절에‘여러 가지 시련을 받을 때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신앙 성숙을 시험하는 가장 좋은 잣대는 바로 시련, 고통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자신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종류인지가 잘 나타납니다.

어느 정도인지는 뭐겠습니까?

손에 끼고 있는 금반지처럼 14k인지, 18k인지, 아니면 순금 24k 신앙인지?

평소에는 24k 신앙인줄 알았는데, 고통이 닥치니 쇠반지보다 못한 반지를 끼고 있구나!

또 어떤 종류인가를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기복신앙이인지 유일신 신앙인지 고통을 만나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순탄할 때는 믿음에 대해 쉽게 얘기할 수 있으나,

역경 중에 자기 신앙에 자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성서는 시련 중에 기뻐해야 된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모순된 말입니까?

아파 죽겠는데 기뻐하라는 겁니다.

벼랑 끝에 몰려서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데 그때도 기뻐하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신앙을 성숙시키는 데 반드시 중요한 재료가 시련과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자녀들이 성숙되기를 원하시고, 그 성숙됨은 인생이라고 하는 실험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왕 중에서 유일하게 거룩할 성자가 붙는 왕이 누군지 아십니까? 다윗 성왕.

그런데 성인 소리를 들었던 다윗도 전과자에요. 음란의 전과자야.

더운 여름 날 궁궐 베란다에서 아래 동네를 내려다보니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어요.

음란 마귀가 들어오죠.

그래서 자기 비서실장한테 누구냐 물으니,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야의 마누라래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내 침실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우리야의 아내는 왕이 오라고 하니까 끌려올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하루 밤을 자고 나니 갑자기 임신이라도 되었을까봐 불안해요.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있는 우리야를 불러들이죠.

동료들은 전쟁터에서 죽어 가는데, 특별휴가를 받는 것이 우리야는 이해가 안 갔죠.

그래서 갑옷도 벗지 않고 문밖에서 밤을 새우다 새벽같이 전쟁터로 다시 나갑니다.

다윗이 실패한 것에요.

그래서 우리야의 손에 상관한테 보내는 편지를 써서 보내죠.

그 편지에는 ‘이 편지 들고 가는 놈은 어떻게든 전쟁터에서 죽어야 된다.’고 적었죠.

최전방으로 내보내서 우리아를 죽게 합니다.

음란죄는 반드시 살인죄로 이어져요.

살인죄의 그 밑바닥을 보면 대부분 치정관계 때문이에요.

부하들은 잘못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말을 못했지만, 나탄 예언자가 진언합니다.

다윗 앞에 와서 지팡이를 잡고 꽝꽝 치면서, ‘너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다윗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재 위에 앉아 하느님께 회개합니다.

그 이후에는 성왕으로 살아갑니다.

다윗도 이러한 시련과 고통이 없었다면 거룩한 왕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가시 이야기를 잘 압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자람이 없이 흘러넘치는 인간이었어요.

정통 유대가문에 그 유명한 가믈리엘 랍비의 수제자로 대웅변가였고 인물도 잘 났대요.

의사들이 조심스럽게 애기하기를 바오로 사도는 간질병이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너무 괴로워 가시 뽑아 달라고 세 번이나 애원했지만 안 고쳐주시죠.

코린토 2서 12장 9절의 말씀을 대신 주셨죠.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이제껏 사도는 불치병을 수치로 여겼지만, 이 말씀을 삼킨 후 고통의 신비를 외칩니다.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제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

제가 빠질까봐 마귀가 가시 하나를 내 몸뚱이 박아 놓았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때는 악마까지도 이용하실 때가 있어요.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이인가의 첫 번째 기준은 예상치 않았던 고통과 시련이 왔을 때

 얼마나 담대하게 대처하고 시련 중에서 기뻐할 수 있느냐 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훨씬 고통이 심한데, 훨씬 더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보다 가진 것이 없는데도 훨씬 더 부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그 아무 것도 없는 데도 쪼개서 자기보다 어려운 이를 돌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신앙의 성숙도를 재는 두 번째 기준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성적으로 거부감이 생기고 내 계산과 전혀 달라도 하느님 말씀은 순종해야 해요,

따지지 말고 일단은 무조건 순종해야 됩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해서는 토를 달면 안 되죠.

왜? 순종은 믿음에서 오기 때문이죠.

 

아브라함은 믿음을 생명처럼 여겼기에 소중한 아들 이사악까지도 제물로 바칩니다.

바치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찔러 죽이려고 그랬어요.

아브라함의 칼날이 이사악의 심장에 닿기 전에 야훼의 천사가 손목을 꽉 움켜지죠.

‘멈춰라. 이제 내가 네 믿음을 알았다.’

아브라함은 어마어마한 시험을 통과한 겁니다.

 

순종은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순종의 결과는 자손에 대한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앞으로 네 후손은 하늘의 별보다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많아 장성하리라!’

유대민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잘 두었기 때문에 지금 전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유대민족이 이 세상의 첫째 자리에 언제나 있습니다.

이 말은 뭐겠습니까? 나 혼자 살다 죽으면 그 뿐이다가 아니라는 거죠.

내 순종의 결과는 내가 보지도 못할 후손들에게까지도 내려간다는 겁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면 해방이 됩니다. 치유가 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모세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했기에 이집트에서 유대 백성들을 끌고 출애굽을 합니다.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적 자유, 해방을 주십니다.

해방은 치유요, 그리고 기적입니다.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영적 영예를 주십시다.

성모님의 순종 때문에 성모님에게는 많은 칭호가 붙어 있지요.

이 세상에 있는 레지오 프레시디움의 이름만큼 성모님은 수많은 칭호를 갖고 계십니다.

바다의 별, 상지의 옥좌, 천상 은총의 어머니, 등등.

그 많은 칭호 가운데서 가장 높은 칭호가 뭡니까?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에 높은 칭호, 천주의 모친이라고 하는 칭호를 받으셨던 겁니다.

자기에 대한 신뢰와 자신에 대한 계산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순종의 자세는 분명히 약해질 겁니다.

 

세 번째로 성숙도를 재는 기준은 혓바닥을 어떻게 다스리는가?

언어가 얼마나 정화되어 있는 가를 보면 그 사람의 성숙도를 압니다.

어떤 사람은 일 년 내내 다른 사람에 대한 좋은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입만 열만 항상 다른 사람 뒷얘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사람 곁에 안 갑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만 놀라운 언어의 기능을 주셨습니다.

말은 인간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하는 무기이기에 끊임없이 다듬어가야 됩니다.

혀를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온몸을 다스리는 사람이요,

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하신 수계생활의 핵심.

이것은 첫째 고통을 얼마나 기쁘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

두 번째는 얼마나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느냐.

세 번째는 얼마나 자기 혀를 잘 다스리느냐로 드러납니다.

이 세 가지가 성숙한 신앙인을 재는 기준입니다.

 

자 여러분들, 이 세 가지가 어떠세요?

본인 스스로 답하세요.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채워나가세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청하세요.

고통과 하느님 말씀 순종, 혀를 다스리는 것이 천국 가는 지름길임을 기억합시다.

 

아멘

 

♣2018년 연중 제 31주일(11/04)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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