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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란도란글방/ 거꾸로 듣는 사람들 (마태복음 5:38-4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6-14 조회수8,262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2021. 6. 14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도란도란글방

 

거꾸로 듣는 사람들 

(마태복음 5:38-42)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40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41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

 

오늘 본문은 십자가로 이해를 해야지, 살인 하지 마! 간음 하지 마! 거짓 증거 하지 마! 그랬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운명적(運命的)인 어떤 생래적(生來的) 성향(性向)으로 갖고 태어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그것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걸 사랑으로 완료(完了)를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럼 그 중간에 뭐가 있어야 돼요? 십자가! 그러니 그건, 이 내용은 지금 십자가란 말이에요. 그 십자가로 풀어야지, 동태보복법(同態報服法)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를 하시면 안 돼요.

동태보복법이 뭐예요? 상대의 눈을 상하게 한 자는, 눈을 뽑아 버리고, 실제로 그랬어요, 고대시대 때. 실수로 어떻게 눈을 다치게 했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의 눈을 뽑게 만들었다고요. 그거 얼마나 아팠을까요, 실수로 눈 다친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순식간에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제 뽑을 거야. 그런 다음에 그걸. 그런데 그게 실제로 법 이었다니까요.

상대의 손을 상하게 한 자는, 손을 잘라버려요. 지금도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동태보복법이 부분적으로 시행이 되고 있어요. 그래서 막 손목을 작두로 잘라버리고, 채찍으로 치고, 하는 그런 벌들이 지금도 있단 말이지요. 그건 그들이 구약을 문자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성경에 근거(根據)하여 그런 법을 내리고 있는 거예요. 이슬람 사람들이 믿는 게 알라? 그게 알레프, ()이에요. 하느님이에요.

살인과 간음과 거짓증거의 문제에 관해서 주님은 그 세 가지 말씀을 하실 때 마다 꼭 붙이는 단어가 있어요. ‘아쿠오.’ 너희가 들었다. 너희는 들었지. 이거요. 어떻게 들었는지는 몰라요. 하여튼 너희는 들었다.’ 그리고 레오.’ 그리고 아르카이오스라는 단어가, 요 세 단어는 꼭 들어가 있어요. 거기에. 레마로 말 했어. 내가 말 했어 옛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어.’ 여기서 옛사람이라고 번역된 말도, ‘아르카이오스는 그냥, ‘엔 아르케태초에라는 단어, ‘베레쉬트바로 그 단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땅의 것으로 하늘의 성전을 설명하기 시작하셨다베레쉬트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전에, 시작부터, 베레쉬트 그때부터, 그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땅의 것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너희들에게 레오, 말했어.’

그러니까 창세기 11절 부터 이계명은 계속 있어 왔던 거예요. ‘내가 말 했어.’ 그리고 고 앞에 호티’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어요. ‘내가 말했기 때문에, 너희는 들었어.’ 그런데 어떻게 들었느냐면? 거꾸로 들은 거예요. 그래서 너희가 들었으나, 그 말은 이거였다.’라고 지금 주님이 지금 계속해서 설명(說明)해 주는 거잖아요? 너희는 들었어. 내가 시작부터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런데 너희는 반대로 듣더라.’.

사람들이 하느님이 주신 율법(律法)을 항상 반대로 들어요. ‘살인 하지 말라!’ 이건 우 푸오뉴오.’ 이건 희생제사 드리지 마!’라는 말이라 그랬죠? 그렇게 말씀하시면, 진의(眞意)를 담아 그렇게 하느님이 율법을 주시면, 사람들은 희생제사 해!’로 듣는다고요. 그러니까 구약 내내 희생제사 한 거 아녜요.

보세요, 너희는 들었다.’ ‘내가 희생제사 하지 마라!’고 이야기 했는데, ‘희생제사 해!’로 들었잖아? 그래서 그 밑에 그건 이런 이야기야라고 설명을 해 주신 거, 지금 계속해서 그런 방식으로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 되어 오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간음 하지 말라! ‘우 모이큐오라고 말씀 하시면, 그걸 반대로 듣고 계속해서 엉뚱한 율법에 행위를 내어 놓으면서, 세상과 간음(姦淫)하죠? 거꾸로 듣는단 말이에요.

거짓증거 하지 마! 우 에피올케오.’ 그러면 어 그래요 이제 부터는 참된 증거만 할게요.’라고 하면서 열심히 거짓 증거를 하잖아요? 자기 눈에 보이는 건 껍데기뿐이거든요. 그러니 진짜 참 된 거 이야기 할게요.’ 그래놓고는 눈에 보이는 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게 거짓말이라고 한다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그게 나쁜 건 아녜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느님 측에서 어떤 일을 행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의 결과로 그들의 그 죄, 거꾸로 듣고 하는 그 죄가, 오히려 진리로 완성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행하신 어떤 일 때문에. 인간들이 그걸 제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해 버리면 안 돼요. 그러면 피조물 아니지, 하느님이죠? 하느님 측에서 어떤 일을 하셔야, 그들이 원래 그럴 수밖에 없는 그것이 진리로 완성이 되는 이 형국, 이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 하지 말라!’의 그 구조를 헬라 원어로 보면, ‘아쿠오, 들었다예요 호티 레오 호 아르코마이오스 우 포뉴오예요. 순서대로 직역을 하면, ‘너희는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도륙(屠戮)하지 말라고 시작부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말을 했기 때문에, 너희는 분명히 들었어.’

그러니까 하느님은 창세기 1장부터, ‘도륙하지 마!’ 이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너희는 도륙 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 ‘선악과 따먹지 마!’ 이게 도륙하는 거니까. 희생제사 계속 드리는 거니까. 자기가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되어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 거. 그런데 그 죽여서 드리는 그 제사, 이거는 이 반복하여 드리는, 습관적으로 뭔가를 죽여서, 도륙하여 드리는 제사 포뉴오그거 하지 마!살인하지 마!’로 지금 이렇게 번역이 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들어요? ‘희생제사 드려!’로 듣잖아요. 듣고서 계속 희생제사 드리다가 ~ 이게 어떻게? 이 짐승의 제사가 어떻게 나의 죄를 대속을 해? 이게 이 이야기가 아니겠구나! 하느님이 준비하신 제물에 의해, 영단번에 드려지는 그 제사! 그 제물! 그것이 나를 살리는 거로구나!’라고 알게 됐어요. 그렇게 알게 되어, 그 죽여 드리는 제사를 예수님이 자기를 제물로 죽여서 끝내버리죠.

그 다음부터 이렇게 해서, 이 죽여서 드리는 제사, 우리가 생래적으로, 운명적으로 갖고 있는 성향에 의해, 요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요런 걸, 예수님이 완료해 버리셨구나.’라고 진리를 아는 걸 살아난다.’라고 하는 거예요. ‘생명을 얻었다. 산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걸 알고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산제사를 드린단 말이에요. 이젠 죽여서 드리는 제사 안 드린단 말이에요. 살아있는, 진리로 살아있는 를 드리는 거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러니까 그 희생 제사를 드리는 거, ‘살인하지 마!’라고 했을 때 그것을 거꾸로 알아듣고, 계속해서 도륙하고 희생 제사를 하면서, 사도 바오로는 그것을 죄()라고 그래요, 분명히. 그런데 그걸 통하여, 그 진짜 희생제사, 하느님께서 준비하시고 드리는 제사가 그게 바로 생명(生命)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것도 악()이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나중에 가서, 우리가 진리 안에 탁 들어 앉자나요? 그럼 이런 마음이 들어 ! 죄라는 건 원래 없었던 거구나!’ 위험한 발언인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 이게 진리를 위해, 알게 하기 위해, 필연적(必然的)으로 하느님이 준비하신 과정 속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면, 그 희생 제사를 바울로가 죄라고, ‘그게 죄야!’라고 반복하여 이야기를 하다가, ‘율법이 죄냐?’라고 이야기 한 것,’ 이 뜻을 이해하면 돼요.

! 그게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준비하신 과정으로 준비하신 어떤 거였다면, ‘! 원래 그런 건 없는 거였구나!’ 이것을 알게 된다 말이에요. 그랬을 때, 여러분이 도덕과 윤리나 사회법으로 사람들이 규정하고 판단해 놓은 거기에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심판하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고, 그 속에 있는 나를 용서(容恕)할 수 있는 거예요.

, 그렇다면 그 잘못 들음아쿠오,’ 잘못 들음살아남사이에 하느님이 하신 어떤 일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내용이란 말이에요. 이 말씀은 레위기에서 인용(引用)된 말씀이에요

 

(레위기 24:19-20) 19 누구든지 같은 동족에게 상처를 입힌 자에게는 같은 상처를 입혀주어라. 20 사지를 꺾은 것은 사지를 꺾는 것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렇게 남에게 상처를 입힌 만큼 자신도 상처를 입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이웃에게 한 그대로 갚아 주겠다고 말씀 하세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에 있었던, 함무라비 법전의 핵심내용이에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법으로 존재 했던 거라니까요. 이게 바벨론의 법이에요. 하느님은 항상 그래요. 사람들이 익숙한 법을 갖고 진리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하세요.

그들이 소를 신으로 아니까, 그 소를 갖고 신, ‘를 설명하지요. ‘얘 그 소가 나야!’ 이렇게. 그래서 성경에 소가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할례(割禮)- 하느님이 명하시기 전에 고대 근동에서 이미 하던 거예요. 그걸 갖고 그게 진짜 뭔지 알아?’를 설명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잖아요? , 고대 근동에 익숙하게 있던 그 법을 갖고, 율법, 진리를 설명 하는 거란 말이에요.

 

20절에 보면, ‘파상 쉐베르, 꺾다 부러지다예요. 꺾다, 부러지다,’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그래요. 언뜻 보면 동태보복법 같아 보이지요? 함무라비 법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이잖아요? 그러나 19절을 제대로 이해를 하면,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어요. 19절이 원리(原理)거든요. 요 원리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19절을 잘 이해를 해야, 그 다음절이 이해가 가는 거란 말이에요.

19절에 그 이웃아미테예요. 그 단어는 교제하다라는 단어에서 온 거니까. 친교하는 이웃 말고, 교제하는 이웃, ‘코이노니아하는 이웃, ‘말씀을 갖고 교제하는 이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 이웃에게 상하였으면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카탄 움이거든요. 카탄, 넘겨주다’ ‘무엇을 넘겨주면이거예요. , 말씀으로 교제를 하는 이웃에게, ‘카탄,’ 뭘 넘겨주면, 그런데 무엇이냐면 이라는 단어가 거기 있어요. 이게 , , 얼룩, 더러움이란 뜻이에요.

말씀으로 교제를 해야 하는 아미트, 이웃에게, 점과 흠, 더러움으로 넘겨주면.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너도, 그 더러움으로 만들 거야. 이런 뜻이에요 여기에 앗싸동사가 있거든요. 점과 흠으로 그 교제하는 이웃에게 넘겨주면, 네가 넘겨주면, 너도 그 점과 흠이야. 점과 흠으로 되게 만들 거야. 이거예요.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이쉬라는 그 자가, 거기에 이쉬그냥 이것,’ 이렇게 해석하면 돼요. 남자도 아녜요, 사실은. ‘이쉬라는 자가 교제를 명목으로 다른 이에게 넘겨주어, 그렇게 하느님으로 부터 보응을 받게 되는 바로 그거. 이 뭘까? 그걸 알아야 되겠지요? 점과 흠, 그 뭄, 점과 흠이 있는 제물은 하느님이 안 받는다고 그러지요?

몸에. 그 점은 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거예요 그걸 점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 깨끗함에 티로 존재 하는 거. 근데 그게 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걸 점이라고 하고, 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그 점에 의해, 그걸 갖고 그 생래적 성향을 갖고, 어떤 일을 행하여, 그게 생체기가 되면 그걸 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흠 이라는 건 후천적으로 태어난 이후에 만들어 지는 거고, 점이라는 건 내가 생래적으로 갖고 나오는 거예요. 그 점에 의해 흠이 만들어져요. 고걸 이라고 해요. 하느님은 고게 있으면, 그걸 안 받으세요. 제물에 그게 있으면, 안 받으세요.

교제 한다고 하면서, 인간이, 아담들이 생래적으로 갖고 나온, 그 선악구조 그걸로 어떤 것을 행하여, 그걸 만들어 내면, 그게 다 흠()이에요. 그걸 갖고 있는 제물은, ‘안 받아!’ 이거예요. 그게 이에요. 카탄, 뭄으로 넘겨지면 너도 그렇게 만들 거야에서 이 그거란 말이에요.

따라서 레위기 2419절은 동태보복의 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언급(言及)인거예요. 깨끗한 것이 아닌, 더러운 것을 가진 자, 그리고 그것을 이웃이라는 이들에게, 더럽게 넘겨주는 자들을, 하느님께서 어떻게 취급 하실까?를 설명하는 내용이란 말이에요.

, 원래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 하실 때, 어떤 계획을 가지고 창조 하셨죠? 하느님은 아담을 하느님의 구별된 말씀!’ 이게 아담이란 글자를 파자한 내용이죠, 사람은 하느님의 구별된 진리로 존재하기 위해, 그렇게 , 세워지기위해 창조된 거예요. 그게 아담의 존재목적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아담은 하느님의 진리가 되는 걸, 하느님화() 되는 걸 목적으로 하여 사는 거예요. 반드시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야 돼요 그분의 ’ ‘호흡’ ‘루와흐를 받아야, 생령이 되는 거라 말이지요,

그렇게 그 아담이 하느님의 목적에 맞는 자가 되어서, 이제 생기를 루와흐, 진리, 을 받아, ‘말씀을 받아 그 진리 하느님이 목적하시는 바가 되면, 성경은 그를 가리켜 하 아담이라고 그래요. 관사를 붙여요. ‘사람이라고 그래요. 하 아담은 역시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 아담의 자손을 낳게 되죠? 그걸 하 아담 하 벤이라고 불러요.

 

그러면 그걸 한국말로 번역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그 사람의 그 아들이겠죠? 성경에선 그걸 인자(人子)’라고 그래요. 예수님께서 당신을 인자, ‘하 아담 하 벤이라고 부르신 건, 그 인자,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그 사람의 그 아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진리로 낳는 아들들! 요걸 인자(人子)’라고 그래요. 아담이 낳고, 그 다음에 또 낳고, 그렇게 라인이 계속 이어진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예수님에게 와서 완료가 되잖아요? ‘! 인자가 이거였구나!’라고 알게 되고, 그 인자로부터 이제 교회가, ‘하 아담 하 벤, 인자로 또 출생이 된다 말이에요. 그래서 ! 그 하 아담의 그 자손, 진리의 라인이 바로 요렇게 낳을 교회를 이야기 하는 거였구나!’라고, 그래서 그 예수님이 나를 인자(人子)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이 내가 하 아담 하 벤이야.’라고 이야기 한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인자는 예수님 한 분만을 가리키는 게 아녜요. 진리가 된 그 아담, 하 아담!’ 그래서 그 아담이 오실자의 표상(表象)이라고 한 거란 말이에요. 예수가 하실 그 아담이 진리가 되어 계속 낳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담이 오실 자, 예수의 표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 라인의 족보(族譜)가 루가복음에 나와요.

 

(루가복음 3:23) 23 예수께서는(진리로)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는데 사람들이 알기에는( 두 마음으로 판단하지 마!)그는 요셉의 아들이요, 요셉은 엘리의 아들이며,(이제 족보가 나오죠? 그게 꼭대기 까지 올라가면) 38 에노스, , 아담,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께 이른다.

 

그럼 맨 위가 누구? 하느님. 하느님이 낳는 거지요. 지금. 요게요, 지금 다 소유격이거든요. 원래 본문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하느님의 아담, 아담의 셋, 이렇게 번역을 해야 맞는데, 지금 거꾸로 번역을 해 놓은 거예요.

하느님이 아담을 낳으시고, 아담이 셋을 낳고, 이렇게 인자의 라인, 하느님이 아담을 낳아놓았더니, 하 아담이 진리로 사람을 계속 낳아가는 거예요. 그리고는 결국 요셉, 그리고 요셉의 아들, 요셉이 낳은 예수! 거기에서 이렇게 마쳐지는 거예요. 요게 인자의 라인이에요. 그래서 예수가 그 인자의 라인 족보를 완료(完了)하는 분으로 지금 그려져 있는 거란 말이에요.

하느님이 생기를 부어서, ‘루와흐를 부어 가지고 하 아담,’ 그를 진리로 낳았어요. 다 상징입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진리로 계속 누군가를 낳아요. 그리고 그 낳은 자가 맨 마지막까지 내려가니까 예수예요. 그런데 이 예수님이 인자(人子)로서 교회(敎會)를 낳는 거란 말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이 교회를 진리로 낳게 한 그 일을, 작은 그리스도들, 그리스도인들이, 크리스토스가 복수잖아요? 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또 이렇게 진리로 설명을 해 드리는 거란 말이죠. 요게 인자의 족보, 인자의 라인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30세쯤이라고 번역된 어구는, ‘30 해처럼이죠. 이 예수님의 나이를 이렇게 추측해 본 게 아녜요. ‘30세쯤 되셨을까?’ 이게 아니라, 30처럼, 30세처럼 이에요.

요셉이 메시아의 모형으로 애굽의 총리로 선 게 30세지요 그렇게 메시아를 설명하기 위해 몸으로, 입으로 설명하기 위해 그걸 삶으로 사는 자들을 예언자잖아요. 제사장은 30부터 50까지. 50은 희년이에요. 30에 제사장이 시작되어, 50, 희년에 완성되기 때문에, 30부터 50까지만 제사장 일을 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네가 50이야? 50도 안된 놈이 왜 50의 행세를 해? 왜 네가 마치 완성이고, 네가 마치 전부인 것처럼 행세를 해?’ 이 말이란 말이에요 50살처럼 늙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고생을 많이 해서? 아니라니까요. 호지 않은 금 옷 입고 있었다니까요. 금보다 더 비싼.

, 그러면 , 이제 예언자, 제사장, 30이죠? 그럼 왕, 오실 왕의 모형이 누구였지요? 다윗! 다윗이 왕위에 올라간 게 몇 살? 삼십(30). 그러면 제사장, , 예언자 이게 누구의 역할이에요? 다 기름을 붓지요, ? 메시아의 역할이기 때문에. 메시아가 기름을 붓다, 말씀으로 덮다라는 뜻이에요 기름으로 붓다, 금으로 싸다, 말씀으로 덮다. 다 같은 말이에요. 그래서 금하고 기름 하고는 같은 단어로 써요. 심지어 히브리 사람들이.

 

그러면 한 번 보세요. 메시아는 죽어야 할, 우리 대신에 속전으로 오시는 분이잖아요? 구약의 율법에,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면, 죽여 버리면, 속전으로 얼마를 주게 돼 있어요? 30으로 주게 돼 있어요. 그러면 소는 뭐라고 그랬어요? 하느님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것인데, 그걸 하느님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소로만 볼 수 있는 거예요. 이게 율법(律法)이란 말예요

율법이 모든 인간들을 받아서 죽입니다. 율법에 묶이면 다 죽어요. 그런데 이를 살릴 수 있는 속전이 얼마? 30! 예수님이 얼마에 팔렸어요? 30. 그러니까 이 30은 메시아의 숫자란 말이에요. 그래서 ‘30세쯤에가 아니라, ‘30처럼시작 하신 거예요. 메시아의 사역을.

그런데 그 앞에, ‘아오고스토스 에이미라는 어구가 붙어 있어요. 예수께서 메시아의 일을 시작 하시자, ‘에이미, Be’동사예요 그처럼 되는 자들이 생겨나더라는 거예요. 그들을, ‘아들이라고 부르잖아요? 에페소서에서 우리를 창세전에 아들로 부르셨다고 그러죠? 아들이 뭐예요? ‘그 사람의 그 아들,’ 인자들이 되는 거예요. 또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 예수를 선악의 눈으로 판단해서, ‘노미조해서 요셉의 아들로만 보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아니다. 그 분은 단순히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인자(人子), ‘하 아담 하 벤의 라인으로 오신 분이야. 그 라인을 완성하시는 분이야라고 족보를 쫙 펼치는 거예요. 그리고 맨 끝에 하느님. 완성자, 예수님. 이렇게 족보 제시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느님의 아담, 아담의 셋, 셋의 에노스, 계속 내려가다가 요셉의 예수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요셉이라는 단어 얏싸프뭐 뭣을 더해주다’. 뭐 뭣을 더 해서 완성 시키는 게, 요셉, ‘얏싸프예요.

야곱의 열두 아들을 누가 완성해요? 요셉은 몇 번째 아들? 11번째 아들. 12번째 아들은? 베냐민. 오른손에 아들이죠. 완성된 아들이에요. 오른쪽은 항상 완성된 아들. 요셉이 이 하나를 더하여 아들을 완성 시키는 거예요, 열둘(12). 그래서 요셉 밑으로 베냐민 하나가 오는 거지요. 그래서 요셉의 아들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로 말 하는 거니까.

므낫세는 빼앗다, 제거하다, 없애버리다란 뜻이에요 므낫세가! 그 단어는, ‘아랫것으로 해석해 주는 말이라는 뜻이에요 므낫세가. 아랫것으로 위의 것을 해석해 주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 예수죠? 그분은 제거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므낫세가, 장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위의 것을 아랫것으로 설명하는 말씀이, 이 땅에서 제거 되면, 씨가 되어 제거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그래요? 많은 열매가 맺는다, 그러죠? 에브라임의 단어의 뜻이 많은 열매란 뜻이에요

요셉은 마지막으로 어떤 걸 더 하기 위해 온 자예요. 그래서 그걸 완성 시키는 자인데 그는 아들로 이야기해야 되는 거죠? 위의 것을 아랫것으로 설명하는 말씀이 제거되고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거, 예수로 이걸 완성하는 자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요셉이에요. 성경은 그냥 우연히, 우발적으로 기록된 단어가, 단 한 단어도 없어요.

 

, 그러면 그 땅에 떨어져 죽은 그 씨에 의해, 이제 많은 열매, 에브라임이 되면, 그 많은 열매는 또 씨가 있어야 열매예요. 씨를 갖죠? 그런데 그 씨는 어떤 씨예요? 땅에 떨어져서 죽었던 씨 아닙니까? 씨도 없는 게 열매인척 하는 게 뭐지요? 무화과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이 저주해버린 거요. 너는 수술을 머리를 씨라고 나한테 속이고 있네. 이파리만 무성한 것이, 열매라고 나를 속이고 있네. 그래서 저주해 버린 거지요 그건 꽃입니다. 열매가 아니라. 맛있다고 무조건 열매라고 생각 하시면 안 돼요. 먹는 것에 그냥.

그러니까 열매! 그 열매는 씨를 반드시 가져야 되는데, 그 씨는 뭐냐면 하나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은, 그 씨를 내가 갖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열매가 되는 거죠?. 그러면 내가 씨를 간직하고 있다는 건, 씨와 내가 연합(聯合)되어 있다는 거 아녜요? 따로 떨어져서, 씨 열매가 존재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러면 그 씨의 죽음과 살아남에, 내가 동참(同參)하게 된 거란 말이에요. 그 씨를, 진리를 내가 갖고 있다면.

그 때에 ! 이게 진리구나!’라고 알았어. ‘내가 살았네.’ 그 사람을 보고, ‘살았어?’ ‘그래? 너 죽었었구나!’라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죽어야 되지?’ 이렇게 고민(苦悶)하지 마세요. 우리가 진리를 갖고 -- 내가 그럼 산거네.’라고 알았으면, 우리가 죽은 거예요. 그게 씨를 가진 자니까. 그게 바로 진리가 된 성도의 실존(實存)인거죠.

그렇게 요셉의 아들! 죽음과 열매 맺음으로 인자를 완성하신 그리스도 예수가, 낳는 자식들! 또 인자들이 나와야 되잖아요? 그 족보는 어디에 적혀 있을까요, 우리들의 족보는? .

 

(요한복음 1:10-14) 10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을 맞아 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 이걸 예수를 맞이해!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단다.’ 이렇게 함부로 갖다 쓰시면 안돼요. 11절을 잘 보세요.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하나도 맞아주지 않았다.’고 그래요 Nobody 예요. 그런데 바로 그 밑에 아무도 영접(맞이하다) 안 해요. 인간은요. 그러면 누가 맞이해야 돼요? 오신 분이 영접해야 돼요. 이게 람바노예요. ‘받다예요. 받다. 그분이 받는 거예요 영접 하는 자, 그 이름, 누구예요? 하느님!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가 아니라, 영접 하는 자! 그 이름. 영접하는 그 하느님을 믿는 자!

하느님이 어떤 이들을 받았어요. 아무도 이 예수를 안 받네. 씨로 안 담아요. ‘람바노받다, 담다예요. 아무도 안 담으려고 그래요. 아무도 안 담는데, 그 분이 자기가 담아요. 영접을 해 버리니까, 어떤 자들이, 그 영접한 그 이름을, 믿게 되더라는 거예요. 그분이 받았더니.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권세다.’예요. ‘특권을 주셨으니가 아녜요. 특권이 성도예요. 하느님의 자녀라는 권특이다, 힘이다, 그래요. 우리가 힘이에요. 그 힘!

그래놓고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라고 하는데, 단수예요. ‘난 자다.’ 그래요. , ‘하 아담이에요. 루가 복음에 족보 기억 하세요. 루가 복음 3장의 그 족보. ‘하느님께로 난 자야.’ 그래요.

14. 그들이 누구냐면 말씀 육신이야! 그래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라고 한국 성경이 번역을 했는데, 그러면 에이미동사가 있어야 되잖아요? Be 동사가. 그런데 없단 말이에요. 그냥 말씀육신이에요. ‘호 로고스 싸륵쓰예요. 그러니까 그건 이름이란 말이에요. 앞에서 하느님께로서 난 자, 그 자의 이름이 말씀 육신이야,’

그리고 카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 육신, 진리를 받아 말씀 육신이 된 그 자들 안에 있거든요. 그 안에 하느님이 텐트를 치다.’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라고 했는데, ‘성막에 그 성전을 세우다, 텐트로 덮다이런 뜻이란 말이죠. 우리 안에 성전을, 말씀 육신이 된 그 안에, 성전을 세우시니, 그들이 하느님의 외아들(독생자)에 영광을 나타내더라는 거죠. 그걸 보더라는 거예요.

독사(doxa)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 하느님의 것이 겉으로 들어난 거. 그렇게 그들이, 하느님에 의해, 영접 당하여, 그 안에 성전을 갖게 되니, 그들의 이름이 말씀 육신이 되는데, 그들이 모노게네스, 독생자의 영광! 그러니까 무슨 뭐 외아들의 영광이다, ‘모노게네스가 두 마음을 갖고 있는 자들 그 안에, ‘유니크하게 진리인 한 마음을 갖고 오신 그 분. 그 분이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바로 그 예수 그걸 보더라는 거예요 그들이. 말씀 육신들은. 그들을 인자(人子)’라 그래요

 

하느님을, 진리를 씨로 담고 있지 못한 그 곳은, 곧 죽음이에요. 그게 멸망(滅亡)이거든요.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 진리가, 씨가, 제라, 자손이 이 땅에 왔는데, 아무도 못 알아봐요. 그리고 맞이하지 않았다, ‘담지 않았다그래요. 다 죽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의인이 하나도 없었던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했던 거예요. ? 진리가 없어. 진리가 된 자가 하나도 없어요. 그건 하나의 상징(象徵)이었어요. 아브라함이라는 그 믿음의 조상이니까, 그게 교회의 대표예요. 우리 이야기 하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가세요. 그게 목적이었다면 그냥 얼른 가서 멸망시키시면 돼요. 그런데 굳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세요. 그래놓고, ‘내가 내 친구 아브라함에게 감출 것이 없다.’ 그래요. ‘감싸서 숨기지 않을 거야.’라 그래요. 원어로 보면 네가 될 것을 내가 감싸서 숨기지 않을게.’ 그래요.

그래놓고는 소돔과 고모라 멸망시키러 간대요. 아브라함이 그래요. ‘50명 있으면요? 40명 있으면요? 30명 있으면요?’ 하느님이 계속 들어 주세요. ‘30명이라도 안 해. 10명만 있어도 멸망 안 시켜.’ 그 말은 무슨 말 이었느냐 하면, ‘얘야, 믿음의 조상아, 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건,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야.

진리가 되어 그걸 전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야. 그러면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겠니?’내가 널 불렀잖아? 네가 진리가 되어, 저기에 가면, 저기가 왜 멸망하겠니?’를 물으신 거예요, 하느님이.

그걸 가르쳐 주기위해, 교회에게 그걸 가르쳐 주기위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한 거예요. 진리가, 그 씨가 담겨져 있지 않으면, 이렇게 멸망당하는 거야를 보여 주는 거라니까요. 그거는. 그래서 굳이 아브라함에게 가서, ‘아브라함아, 이거 봐. 이거. 이게 무슨 이야긴지 알아?’라고 묻는 거예요. 그건 교회인 우리에게 물으시는 거예요. 하느님이요.

그렇다면 지금 이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뭐예요? 누군가 진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진리가 되어, 그 진리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는 이렇게 멀쩡하게 존속(存續)하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 중에, 이제 한 사람씩 불려 올라가요. 성경은 그 점점 없어진다.’ 그래요 점점 없어지다가, 아니 계속 없어지는 거예요, 지금요. 마지막 한 사람이 남겠죠? 하느님이 그 진리가 된 그 이를, 반짝 들어 끌고 올라 가셨을 때, 이 땅은 어떻게 돼요? 멸망(滅亡)이에요. 그 때가. 지금 등불을 계속 하나씩 꺼가세요. 등잔을 쏟고 계시다구요. 그러니까 마지막 그 등잔이 꺼지면 끝이에요, 여기가.

그러니까 세상은 성도에게 감사해야 된다니까요. 그들이 살아 있는 근거예요. 성도는 그렇게 진리가 되어서, 멸망 받을 세상을 건지는 역할로 부름을 받아요. 그렇다고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이들이 전하는 그 진리로 살아 난다구요. 자기를 용서 하는 이들이 생긴 다니까요. ‘그러면 나는 자유(自由)네요. 하느님이 다 해결(解決)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용서 하는 자들이.

그 하느님의 용서(容恕)를 이해하고, 깨닫고, 자기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용서를 전하여 사랑을 하는 자들이 생겨나는 거. 이게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이란 말입니다. 고게 인자가 하는 일이었잖아요? 진리를, 말을, 영을 던져, 죽어있는 자들을 살려 내는 거, 용서를 이해시키는 거. 이게 인자의 역할(役割)이란 말이에요. 우리 역할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 마지막 자가 사라지면, 예수님이 어떻게 온다고 그래요? ‘구름과 함께 오신다예요 그거는요. 무슨 말일까요, 그게? ‘-- 주여 빨리 구름을 타고 오시옵소서.’ 무슨 손오공이에요? ‘오시옵소서.’ 이런 사람들 있죠?

우리가 살아서 이 땅에서 구름 타고 오는 예수를 보면, 그 즉시 사망(死亡)이에요. ? 마지막 진리가 올라가면, 멸망이라니까요. 그럼 구름은 뭐겠어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름이라는 건, 뭉게구름, 하얀 구름, 새털구름, 이거는 구름 취급도 안 해요. 캘리포니아에서는 그건 구름도 아녜요.

구름이 뭐냐면? 팔레스타인 땅은 천수답 농사를 짓는 곳이죠? 비가 와야, 겨우 농작물이 자라요. 근데 비가 안 와요. 그래서 그들은 멀리서 먹구름이 요만하게 끼면, 감사했어요. 찬송했다니까요. ‘야 비 온다! 구름이다!’ 그랬다고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그 구름이, ‘먹구름이라고 쓰여 있어요. 원어에 보면 먹구름! 우리는 먹구름 그러면은 - 니 앞날에 먹구름 꼈다.’ 그러면 안 좋은 거죠? 히브리 사람들은 그게 와야, 생명이 산다니까요. 내가 먹을 곡식이.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은 구름, 그러면 물을 머금은 것이란 뜻으로 썼어요.

그러면 물을 머금은 게 이 진리, 말씀이죠? 그러면 그 진리들이, 아래에서 그 아랫물로 윗물을 설명 하던 진리들이, 하느님께로 올라갔어요. 그들이 다 위의 물! 유리바다란 말이에요. 이게. 근데 그 물이, 물을 머금은 것이, 예수님과 함께 천군천사가 되어서 오는 게, 우리가 오는 거예요. 구름과 함께, 진리들과 함께 예수님이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올라 가셨다는 것도, 구름으로 올라가셨다는 말이에요. 그 말이. 그 모습 그대로 오신다는 건, 진리가 되어 올라가신 그분이 진리와 함께 오시겠다는 거예요.

근데 이 땅에서 그 진리를 내가 보게 되면, 죽는 거예요. 근데 그분을 기다리고 있어요. 예수 믿는 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멍~ 하니 그냥 이렇게 동화책처럼 믿는 거예요. 그래서 묵시록에서도, 그 구름을 많은 성도들이라고 그러고요, 히브리서에서도, 교회를 구름 같은 많은 증인이라고 그래요.

 

(에제키엘 38:9) 폭풍우처럼 쳐올라 가거라. 너는 너의 전군과 연합군을 이끌고 구름처럼 덮쳐들어 가 그 땅을 뒤덮어라.

 

진리, 성도를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진리의 구름이 되어서, 소돔과 고모라에 존재 했다면, 그 땅은 불로 멸망(滅亡)되지 않아요. ? 물이 있거든요. 근데 멸망했다는 건, ‘아브라함아, 너도 아직 진리 아니잖아? 네가 진리가 되었으면, 내가 너를 거기 보냈을 거야.’ 요나처럼. 죽어야 할 니느웨 땅에, 요나 하나를, 진리를 보내서 살려 내는 그림이잖아요? ‘아브라함아, 그런데 내가 너를 보낼 수가 없어. 네가 진리가 안 되면, 저들이 저렇게 죽는 거야. 인자의 라인이 끊기는 거야.’를 보여 주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란 말이죠.

다시 요한복음 1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진리이신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은, 죽은 세상에서, 주님이 영접(迎接)을 하는 거예요. 주님이 영접을 하셔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세요. 심어버리세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인자의 라인이 연결이 되고 있는 거예요. 말씀 육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인자의 라인! 하느님이 낳은 어떤 자들이 생기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루가복음 3장의 족보는 이리로 이어지는 거예요 이렇게.

성경에 그 모노게네스가 은혜와 진리로 가득 차 있더라. 그러죠? ‘! 알고나니까, 하느님이 믿음을 주셔서, 하느님이 날 맞아 주니까, ! 모든 건, 은혜요 진리구나! 그거밖엔 없구나!’를 보더라는 거예요. 그들이 독사(doxa)로 보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어야 할 그 아파르, 먼지에 ,’ 아담의 거든요. 그걸 합쳐 놓으면 피! 피가 부어지면, 고게 이렇게 이겨져서 존재가 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에는, 성경이 야차르란 동사를 써요.

히브리어에서 창조하다라는 단어가 바라,’ ‘앗싸,’ ‘야차르,’ 이렇게 있는데, 야차르는 토기장이가 뭔가 만들어 낼 때 그 창조를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일부러. 피와 먼지, 흙이 이겨져야 된다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 주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단어를 쓰는 거예요.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은요 성경을 읽자나요, 그러면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많아요. 성경에 그런 문법적 파격을 굉장히 많이 갖다 쓰거든요. 진리를 이해하는 이가 아니면,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도, 그걸 못 알아먹어요. 그러니까 원어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녜요. 아니 히브리어, 헬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예수를 죽였다니까요. 그 성경을 그냥 줬더니. 그걸 보더니, 예수를 죽이드라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그 진리를 아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 다음에 히브리어, 헬라어를 배우든지 말든지. 그래야 되는 거예요.

, 그렇게 죽어야 할 먼지, 아파르에 불과한 아담에, 진리가, 물이 피가 부어지자, 그가 사람, 구별된 하나의 말씀, ‘모노게네스, 독생자, 서더라는 거지요. 그런데 물을 받지 못한 자는 먼지!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발이, 먼지를 발에서 떨어 버리는 거예요. 아니야, 이거는. 피를 못 받았으니까, 물 진리를 못 받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없음으로 죽어야 할 아파르에 진리의 말씀이 부어져, ‘하 아담이 되고 그 하 아담의 자손의 라인으로, 그 하느님의 자녀로 들어가게 되는 그 구원의 현실을, 아담과 예수가 동시에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5:3) 3 아담은 백 삼십 세에 자기 모습을 닮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여기에서의 아담이 하야 아담이에요. 그냥 아담이 아니라. 이건 살아난 아담이런 거. ‘산 아담의 뜻이거든요. ‘구원 받은 아담이라고 이야기를 해도 좋아요. 하 아담을 낳았다 그래요 셋만 낳았어요? 아니라고요. 그런데 셋을 낳았다 그래요. 그 루가 복음의 족보에서도 역시 셋만 기록돼 있어요. 카인과 아벨은 없어요. 뭔가 상징이었단 말이에요. 그거는.

여기에, 낳다라는 야라드라는 동사가 나오는데요, 그게 동사로, 일반 동사로 그냥 쓰이면, 부정모혈로 낳는 거예요. 아비가 씨를 주고, 어미가 피를 내면서, 그냥 육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낳는 거. 그냥 야라드.’ 근데 이 동사가 히필동사로 쓰면요, ‘낳게 하다가 되어서, ‘말씀으로 그를 산 존재로 만들다라는 뜻이에요.

근데 여기에서 히필 동사가 쓰였어요. 그러니까 아담이 셋을 그냥 육적으로 낳았다라는 뜻이 아니라, 그 셋을 말씀으로, 진리로, 산 존재로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히필 동사가 쓰인 거예요. 그래서 루가복음에 보면 요 셋만 기록돼 있는 거예요. 고 족보의 라인에.

 

(창세기10:21-22) 21 셈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났다. 에벨의 모든 후손이 그에게서 나왔는데(에벨은 히브리, 넘어간 자들의 조상! 그게 셈이에요.), 그는 또한 야벳의 맏형이기도 하다. 22 셈에게서는 엘람과 아시리아, 아르박삿, , 아람이 났다.

(창세기11:10) 셈의 후손은 다음과 같다,. 셈은 홍수가 끝난 지 이 년 뒤 그의 나이 백 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다.

 

그러니까 셈의 후예 중에, 진리로 낳아진 자는, 아르박삿 하나더라. 그러니까 우리 자식 중에서도, 요렇게 진리로 낳아질 사람이 다 되면 좋겠지만, 다 아닐 수도 있어요. 무섭지 않아요? 그러니 그 하 아담, 하 벤, 인자의 족보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족보란 말이에요. 진리로 이어지는 족보란 말이에요. 부정모혈로 이어지는 족보가 아니라.

그래서 혈통으로나 육적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게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서~. 이 거대한 진리의 족보 속에서, 그 인자의 족보 속에서 점 있고 흠 있는 더러운 것 카탄,’ 넘겨지면 그 교제 속에서. 안 되죠? 그래서 그렇게 넘겨주는 놈이 있다면, 그렇게 만들어 줄게라고 하신 거예요.

진리의 말로 낳고 낳아져야 되는 게, 모든 성도의 교제의 실체(實體)란 말이에요. 그 자리에 더러운 거, 점과 흠! 인간의 생래적 율법주의, 이것이 개입되어 흠을 만들어 내면, 너희들 그렇게 해 줄게, 되게 해 줄게. 이 말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2419절이 행한 대로 갚아준다.’ 이게 원리라 말이에요. 그렇게 말씀 하신 거예요.

어떻게 하신다고 그래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할 거야. 그 눈이라는 단어가 아인이라는 단어인데요. 그 단어도 그냥 눈이라는 뜻도 있지만, 말씀이라는 뜻도 있어요. ‘, 우물이라는 뜻이에요. 그걸 눈이라고 그래요. . 신약에서의 눈도 역시 말씀이죠? 일곱 눈은 일곱 영이다. 영은 뭐? 말이요, 생명이다. 그랬잖아요?

 

(요한묵시록 5:6-7) 6 나는 또 그 옥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가운데 어린 양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 양은 이미 죽임을 당한 것 같았으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은 하느님께서 온 땅에 보내신 7 그 어린 양이 나와 옥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습니다.

 

일곱은 일곱 번 말하다.’ 언약(言約)! 언약의 말씀이더라는 거예요. 눈이. 그렇게 쓴단 말이에요 성경에서. 그래서 눈은 눈으로라는 말은 그가 가진 말대로 내가 그렇게 되게 해줄 거야.’ ‘네 믿음대로 되리라.’ 이 말이에요. 눈은 눈으로 그렇게 갚아 줄 거야! 그런데 좋은 눈, 깨끗한 눈을 갖고 있으면? 그 눈, 그 말씀으로 그렇게 되게 해 줄 거야. 이 말이에요 눈을 상하게 하면 눈깔 뽑을 거야!’ 이 말이 아니라. 하하하.

 

(레위기 22:21-22) 21 또 야훼께 서약한 것을 이행하기 위해서든지 또는 마음에 우러나서든지 소나 양을 친교제물로 드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흠이 없는 것으로 바쳐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의 마음에 들 것이다. 성하지 못한 것은 어떤 것도 안 된다. 22 눈먼 것이나 뼈가 부러진 것, 다리가 잘린 것이나 병들어 물이 나오는 것, 옴이나 종기가 많이 난 것을 야훼께 바치지 못한다. 그런 것을 제단에 드려 야훼께 살라 바치면 안 된다.

 

제일 먼저 흠 있는 것 중에. 눈먼 거예요. 눈 먼 거. 말이 잘못된 것을 가리키는 거지요. 하느님께서 동산 중앙에 세워 놓은 걸 선악과로 보게 되면 망하는 거예요. 인간의 눈으로 보암직도 한어떤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망하는 거예요. 그 눈은 눈으로 갚아준다 이 말이죠. 이도 마찬 가지예요. 역시 그가 가진 말에 관한 이야기예요.

 

(잠언25:18-19) 18 이웃에게 해가 될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사람 잡는 몽치요, 칼이요, 날카로운 화살촉이다. 19 어려울 때 신용없는 사람(진리가 아닌 자) 믿는 것은 썩은 이빨이나 절름거리는 다리를 믿는 격이다.

 

썩은 이다. 이가 썩은 자야. 그 자도 말이 진리가 아닌 걸로 갖고 있는 자야. 썩은 이.

 

(시편35:16) 내가 넘어지자 그들은 오히려 깔깔대며 모여 들고 모여서는 느닷없이 때리고 사정없이 찢사옵니다. 그들은 비웃고 조롱하고 나를 보고 이를 갈았습니다.

 

이걸 직역을 하면 이런 거예요. ‘더러운 말더듬이의 떡으로 이를 간다.’예요. 더러운 말더듬이가 뭐예요? 참된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한 거란 뜻이에요. 더러운 말더듬이는 그 가짜 떡으로, 헛것을 씹으니까, 이를 간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를 가는 건 양식이 없음을 가리키는 거라 했죠? 그러니까 헛것을 씹으니까, 이만 가는 거죠.

 

(시편 57:4) 나는 사자들 가운데에,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 가운데에 누워 있습니다. 그들의 이빨은 창끝같고 살촉 같으며 그들의 혀는 예리한 칼날입니다.

 

이와 혀는 말을 내는 거예요. 근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이와 혀가 다 칼과 창! 죽이는 거라는 뜻이에요. 죽이는 거. 거짓말, 가짜 말

 

(시편 124:6) 야훼를 찬미하여라. 우리를 원수들에게 먹히지 않게 하셨다.

(잠언 30:12-14) 12 밑도 안 씻고 깨끗한 체하는 세상,(율법주의자.) 13 눈이 높아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세상, 14 사람들의 이빨이 칼 같고 턱이 작두 같은 세상이구나. 불쌍한 사람을 지상에 하나 남기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세상에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운다.

 

그들을 먹여야 되는데, 먹일 것이 없으니까, 오히려 그들을 삼키는 거.

 

(아모스4:6) 그래서 나는 곳곳마다, 성읍마다 양식이 떨어져 너희를 굶주리게 하였다.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예레미야 31:29-30) 29 그 날이 오면, '아비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큼해진다' 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리라. 30 죽을 사람은 죄지은 그 사람이다. 이가 시큼해질 사람은 신 포도를 먹은 그 사람이다.

 

각자가 먹은 것에 의해서 이가 시리게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은 그가 가진 말대로 보응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엄포였어요. 그래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주님이 말씀 하셨던 고런 에피소드들은 전부 말씀 진리에 관한 전부다 에피소드들이에요.

 

(마태복음 8:5-12) 5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 들어 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예수께 와서 6 '주님, 제 하인(아들)이 중풍병(마비(痲痹)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고 있습니다.' 하고 사정하였다. 7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성전)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9 저도 남의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따라 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메가스 피스토스. 큰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잘 들어라.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 12 이 나라의 백성들은(율법주의의 이스라엘)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 나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백부장은 왜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쓰냐 하면요, 아들은 내가 낳아야 할 것이잖아요? 내가 낳은 것이죠? 그런데 그 내가 낳아야 할 것이 병들어 있다 죽었다는 건, 이게 죽어있으면, 나도 죽은 거예요. 근데 얘가 살아나려면, 내가 살아나려면 얘가 살아나야, 산 것이어야 돼요. 그런데 이 백부장이 뭐라고 그러냐면, ‘주님의 말씀으로, 내가 아들로 살겠습니다.’란 뜻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그래요. ‘그래, 네가 가진 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그의 아들이 나았다.’ 그러죠? 백부장과 아들을 동일시(同一視), 이방인을 동일시시키고, 율법주의 이스라엘! 요걸 죽은 자로 대조(對照)시키는 거예요.

그래놓고 뭐라고 그러냐면 이 백부장은 아들로, 율법이 뭔지도 모르고, 하여튼 그런 이방인은 이 아들의 말을 받아, 진리를 받아 아들로 살아나는데, 구원을 받는데, 율법주의자들, 그 말이, 그 진리의 중요성을 모르는 율법주의자, 나라의 본 자손들은, 나가서 이를 갈더라는 거예요. 양식이 없으니까요. 먹을 게 없으니까. 진리가 없으니까. 여기서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 백부장의 하인이, 아들이 중풍병(中風病)을 고쳤다.’에 핵심(核心)이 있잖아요? 그 하인은 나오지도 않아요. 여기서. 그냥 백부장과 예수의 이야기라니까요.

그 예복을 입지 않았던 그 사람을, 주님이 비유에서 그가 유구무언(有口無言)이거늘입이 있는데 말이 없다 그러는 거예요. 그 단어는 재갈을 물리다거든요 재갈을 물려놓으면 말을 못해요. 말이 없는 자란 뜻이에요. 예복이 없는 건 말이 없는 거야. ‘유구무언그래요. 말이 없거늘. 그래서 쫓아내서 이를 갈게 해요. 하늘의 빵, 말이 없으니까, 말씀이 없으니까, 밖으로 쫓겨나 이를 가는 거예요. 혼인잔치에서 쫓겨나는 거란 말입니다.

 

(마태복음 13:41-42) 41 그 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42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 할 것이다.(이를 간다.)

(마태복음 24:44-51) 44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45 '어떤 주인이 한 종에게 다른 종들을 다스리며 제때에 양식을 공급할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면 어떻게 하여야 그 종이 과연 충성스럽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46 주인이 돌아 올 때에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그런 종은 행복하다. 47 나는 분명히 말한다. 주인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8 그러나 그가 만일 악한 종이어서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49 다른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한다면 50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주인이 돌아 와서 그 꼴을 보게 될 것이다. 51 주인은 그 종을 자르고 위선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보낼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술은 항상 섞은 것, 혼합된 것. 그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바벨이에요. 그게. 그래서 술과 항상, 성령, 깨끗한 말이 같이 비교되어 나오는 거죠? 그런데 양식을 주는 게 아니라, 술을 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도 마시고, 친구에게 주면? 섞은 말, 그걸로 비진리 속에서 취해서 가는 거. ‘이게 옳은 것이거니.’ 이렇게. 그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이를 간다. 그러는 거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게 뭔지 아시겠죠?

, 그러면 그 진리의 말씀이 오셨어요. 그 씨가 오셨는데, 아무도 안 받아드렸어요. 그래서 진리의 말이 없어. 아무도 그 안에 가진 자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다 그 눈, 그 이에 의해 심판(審判)받아야 돼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39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거예요.

 

(마태5,39) 39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40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 주어라.

 

이 말은 때려도 참으라는 말이 아니라, ‘내 말 잘 들어! 나는 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율법처럼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아.’예요. 명령어가 아녜요. ‘내가 그렇게 할 거야.’란 뜻이에요. ‘너희는 이 율법대로 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너희들이 ,’ 그 점 있고 흠 있는 것을 넘겨주면 이는 이렇게 심판 받아야 되는데, 내가 너희를 전부 그렇게 대하면, 대적하면, 너희는 다 죽는 거야. 그러나 나는 그런 악한 자를 그렇게 율법으로 대적하지 않아.’예요 때려도 참아! 이게 아니라, 참지 말라는 게 아녜요. 또 잘 참다가 오늘 팍 터뜨리지 마시고.

여기서 악한 자라고 번역된 포네로스포노스예요. 율법적인 수고에서 오는 고통. 그리고 그것으로 괴로워하는 자, 수고 하는 자. 이걸 악한 자라고 번역돼 있어요. ‘나는 그들을 대적하지 않아!’ 하느님이 말씀 하신 건 이루어 져야지. 그래서 내가 오른편 뺨을 맞았잖아?’ 이거예요.

이 땅에 와서, 뺨을 맞은 분은 예수님이에요. 성경에서 오른편이라는 건, 원래, 문자에서 오른쪽은 옳은이에요. ‘Right, 바른.’ 그래서 바른손이라고도 하잖아요? ‘오른, , 바른.’ ‘내가 뺨을 맞아, 그 뺨을 맞아서 왼편 뺨을 돌려 댔다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왼쪽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예 없어요. 다른 것으로 너희에게 돌려 줬잖아?이런 뜻이에요. 그걸 그냥 다른 것. 그러니까 그럼 왼편 뺨인가? 그래서 이렇게 해놓은 건데. ‘내가, ‘옳은내가 뺨을 맞아, 다른 것으로 너희에게 줬다.’

그러니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건 하느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되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 뺨을, 하느님의 뺨을 옳은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맞아, 너희에게 다른 것으로 돌려 줬잖아? 이 말이에요. 십자가란 말이에요,

 

(이사야 50:4-8) 4 주 야훼께서 나에게 말솜씨를 익혀 주시며 고달픈 자를 격려할 줄 알게 다정한 말을 가르쳐 주신다. 아침마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배우는 마음으로 듣게 하신다. 5 주 야훼께서 나의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빼지도 아니한다. 6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우지도 않는다. 7 주 야훼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어 차돌처럼 내 얼굴빛 변치 않는다.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줄 알고 있다. 8 하느님께서 나의 죄없음을 알아주시고 옆에 계시는데, 누가 나를 걸어 송사하랴? 법정으로 가자. 누가 나와 시비를 가리려느냐? 겨루어 보자.

 

원래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그런데 가까이 나와.’ ? ‘내가 뺨 맞았잖아? 내가 침 뱉음 당했잖아?’ 이 말이에요. 그래서 너희에게 생명(生命)으로 돌려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뺨을 맞으신 거예요. 우리에게 그림으로 다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사야 53:4-8) 4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6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7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베드로전서 2:21-25) 21 여러분은 바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본보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22 그리스도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 말씀에도 아무런 거짓이 없었습니다. 23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셨으며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대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습니다. 24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25 여러분이 전에는 길 잃은 양처럼 헤매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에게로 돌아 왔습니다.

 

이게 에피 스트레포,’ ‘왼편 뺨을 돌려주었다라는 말하고 똑같은 말이라고요.

그가 그렇게 우리 대신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하느님에게 보응(報應)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속았던 우리가 그 목자(牧者)에게로 돌아왔다는 거예요. 그 목자를 우리에게 돌려주셨다는 거예요. 생명으로! 그리스도 예수로요! 성령으로! 말로! 영으로! 영생으로! 그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른편 뺨, 왼편 뺨의 이야기예요. 그냥 꾹 참고 속으로는 벼르더라도. 그러면 우울증이 생겨요. 다 폭발(爆發)시키는 게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참으라는 말이 아녜요.

예수가, 그 옳은 분이, 그 의인(義人), 유일한 의인이, 내 대신 그 뺨을 맞아, 다른 것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그 심판(審判)이 아닌, 다른 것으로, 생명(生命)으로 줬어!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는 이제, 그것을 사랑으로 흘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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