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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의 영광은 누가 누릴까?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3-29 조회수1,452 추천수0 반대(0) 신고

 

 

 

 

부활은 말 그대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써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걸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바로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부활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죽는 삶을 살아야만이 부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살기 위해서 몸부림쳐 부활하는 게 아니고 자신 속에 있는 거짓 자아를 죽일 때만이 그 거짓 자아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 우리 속에 있는 원래의 하느님의 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게 어쩌면 또 다른 부활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죽어서 다시 나중에 살아나는 부활 말입니다. 물론 그런 부활도 당연히 믿어야 됩니다. 저는 당연히 그런 부활도 믿어야 되지만 그런 부활보다도 더 중요한 부활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바로 현세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부활하기 위해서 죽어야 됩니다. 바로 죽는 건 우리의 죄성일 겁니다. 인간 속에 있는 온갖 탐욕과 거짓을 꾸미는 본성을 그냥 인간의 힘으로는 죽일 수가 없을 겁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고통의 십자가를 같이 흔쾌히 지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십자가가 우리의 죄성을 녹여주는 용광로가 될 것입니다.

 

그 용광로에서 자신의 죄성을 태우는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장차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마지막에는 인간의 몸이 아닌 천상의 몸으로 변화가 된 환희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용광로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은 십자가와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뜨거운 고통의 용광로가 아니라 이 세상에 피조물로서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높은 찬미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고통은 힘들지만 바로 그런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 같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자신에게 또다른 영광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정말 그 고통도 고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분명 하늘나라에서도 우리의 역사가 있을 겁니다. 현세에서의 짧은 찰라의 삶 속에서 당신과 함께 고통을 함께한 그런 역사는 인간의 삶에서는 유한한 역사로 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영광의 역사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현세의 고통도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걸 희망하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간다면 언젠가는 그 고난의 가시밭길이 천국문으로 가는 꽃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현세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자는 죽어서 부활하는 삶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왜냐하면 현세에서 부활의 삶을 살면 내세에서의 부활은 그냥 거저 덤으로 주어지는 삶이지 않을까요

 

죽어서 부활하겠다는 그런 생각도 좋지만 현세의 삶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게 어쩌면 더 확실한 부활을 예고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자아를 짓이기는 게 바로 부활이고 이런 부활이 끊임없이 일어날 때만이 온전히 마지막에 온전한 부활의 몸을 입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갈대 하면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변덕이고 또 흔히들 여자의 마음에 비유된다. 어디 여자만 갈대일까. 남자도 갈대랍니다. 지금의 저는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와 같지만 힘든 순간순간이 하느님께로 다가가는 성장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린다고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일면 맞는 말이지만 사실과 다릅니다. 사실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붙잡기 위해서 뿌리가 강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고서는 뿌리가 강해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바람도 하느님을 향한 저의 신앙의 돛대에 부는 바람이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약한 인간인지라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신다고 하셨을까. 이제는 부활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부활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탄생 이면에는 고통이 항상 뒤따릅니다.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가장 곁에서 지켜본 사람은 바로 이방인이며 빌라도의 사형 집행관이었던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지켜본 이방인의 눈에 얼마나 많은 감동이 전해졌으면 이방인으로 하여금 이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이끌어내셨을까요? 마치 뜨거운 전기가 흐르고 한편의 드라마틱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감동적인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모진 수난과 고통 너머에 찬란한 부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찬란한 영광 뒤에는 눈물 나는 고통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 눈물의 고통 없이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솔개는 원래 보통 40여 년을 사는 새지만 40년쯤 되면 자신의 노쇠한 몸을 이끌고 산 정상에 올라 둥지를 틀고 자신의 부리로 바위를 쪼아서 부리가 깨어지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부리를 만든다고 합니다.

 

솔개의 발톱과 깃털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갱생의 고통을 갖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힘차게 창공을 날아오른다고 합니다. 말 못하는 미물이지만 참으로 경이롭지 않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의 환희와 영광을 재현하는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 자신의 현재의 모습에서 새로운 몸으로 변화기 위해 자신의 신앙 여정에 솔개처럼 피나는 노력으로 지금의 영육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몸으로 바꾸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을 때만이 예수님의 수난에 조금이나마 자신의 삶을 봉헌하게 되며 이렇게 할 때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환희와 영광을 나누지 않을까 하고 한번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비록 갈대처럼 방황하는 철부지 어린아이 신앙이지만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변화가 되기를 바라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었듯이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예수님의 작은 어린양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을 향해 달려갔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은 골고타 언덕 너머에 있습니다. 골고타 언덕을 예수님처럼 올라가는 자만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영예가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 골고타를 함께 올라가보면 어떨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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