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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21년 1월?19일(화) 독서묵상글 영혼의 닻 (히브리 6,13-20)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20 조회수954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 1 19() 독서묵상글

(공동번역성서)

 영혼의 닻 

(히브리 6,13-20)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실 때에 당신보다 더 위대한 분이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며 14 '반드시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과연 아브라함은 끈기있게 기다려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이 맹세할 때에는 자기보다 더 위대한 분의 이름을 끌어 댑니다.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17 하느님께서도 약속하신 것을 이어받을 사람들에게 당신의 계획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써 보증하셨습니다. 18 하느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므로 그분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하느님을 피난처로 삼은 우리는 큰 용기를 얻어 우리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19 이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 주며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께서는 멜기세덱의 사제직분을 따라 영원한 대사제가 되셔서 우리보다 앞서 그 곳에 들어 가셨습니다. 아멘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의 맹세 때문 이라 그러죠? 맹세라는게 뭐예요?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게 맹세는 사람들이 나를 안 믿어 줄때 나보다 큰 자를 걸고 '내가 우리 아버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내가 못했을 때는 아버지라도 해줄거야.. 그러니까 우리아버지의 얼굴을 봐서라도 내 말을 믿어줘' 이게 맹세죠? 근데 하느님이 우리 구원을 하느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셨단 거예요.

왜냐면 하느님보다 더 큰 자가 없기 때문에, '이 희망은 닻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을 안전하고 든든하게 보호해 주며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 이 뭐예요 닻? 배가 어디에 정박을 할 때 어마어마한 큰 닻, 닻을 툭 내리면 그 닻에 의해서 배가 이 닻을 지지하고 있는 그 주위 반경 안에서만 살살 움직이게 되고 더이상 못나가요. 이게 뭐냐면 우리의 구원이 이 묵시의 마당에... 쇠말뚝에 확! 닻처럼 박혀있단 뜻이에요. 그래서 그게 하느님의 맹세예요. 하느님의 맹세라는 건.... 묵시에 의해... 완성되고 완료되고 묵시.

묵시의 세계는 시간이 없다 그러죠? 영원이에요 거기는. 순서도 없고 차례도 없다 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건 어떤 활동이 있는 곳에서 시간의 흐름이 없을 수는 없어요. 시간이 없다 그러면 아예 그냥 지금 우리의 이성에 맞는 수준으로 설명을 할 때 시간이 없다는 거지 거기에서 우리가 육신을 입고 활동을 하는데 어떻게 흐름이 있는데 왜 시간이 없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고 얘기를하냐면 ....묵시의 세계는 창조의 세계라 그래요.

점진적으로 성숙되어지고 발전되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하느님이 뭐를 말씀을 딱 하셨을 때 완료로 창조가 되는 곳이 묵시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거기에서는 인간들이 뭘 개발하고 발전시키고 성숙시켜서 이렇게 인간들의 힘을 보태서 사는 곳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시간이 없다라고 하는 거지..... 움직임이 있고 활동이 있고 흐름이 있단 말입니다.

 

창조의 세계는 하느님이 말씀하시고 맹세하시며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그 분은 실패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완료란 말이에요. 그런데 에페소서에 보면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보좌우편에 앉아 있다 그러죠. 그러고 로마서 830절에서는 우리는 이미 정하셨고 미리 정하신 자를 영광스럽게 했다 그러죠.

그러면 미리 정한 게 묵시 속에서 미리 정했다는 말이에요. 미리 정했으면 그래서 또 다른 곳에서 바오로가 그러죠. 야곱과 에사오는 이미 태어나기 전에 운명이 결정됐다 그러잖아요. 그들이 뭘 하기도 전에 하느님은 야곱을 천국보낼 사람으로 만들어서 보내고 에사오는 지옥보낼 자로 만들어서 보냈다는 거예요. 그게 묵시 속에 완료된 이게 영혼의 닻이에요. 묵시 세계 속에 변하지 않은 뭔가가 뻥 찍혀있는 거란 말입니다. 이 역사속에서 우리가 그걸 그 닻을 벗어나서 우리가 우발적으로 뭔가를 생산해내거나 아니면 이미 결론지어진 그 완료의 지점의 그 결과를 우리가 어떤 행위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건빵이 과자같은게 컨베이어벨트 위로 쭈옥 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옛날에 생활의 달인인가 그거 보니까 딱 한 군데서도 정확하게 딱 집게를 갖고 불량과자를 찝어내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걸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컨베이어벨트로 쭉 흐르죠. 이걸 시간이라 그래요. 역사인 거예요 컨베이어벨트가 흘러가는 걸 이렇게 볼 때에 시간 속에서 볼 때에 그거는 역사예요. 분명히 시간이 흐르는 거죠 그 정도에 서 있는 어떤 이가 그걸 한 눈에 보고 있단 말입니다.

 

얘는 BC500년에 살고 있는 과자 얘는 1000년에 살고 있는 과자 2000년에 살고 있는 과자인데 그 정도에 서 있는 이는 그걸 한 눈에 보면서 찝어 내고 있단 말입니다. 자 이걸 묵시라고 하고 결정되어있는 걸, 그 흘러가는 것을 시간이라 그래요. 역사라고 그런단 말이예요. 그래서 이 묵시에서 보면 얘들이 각 역사를 살면서 흘러가고 있지만 그냥 하나로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 꼭대기에서 이 땅을 평면으로 봤을 때 역사를 각기 이렇게 살고 있지만 그들은 역사라고 이 역사 속에 갇혀서 보고 있지만 하늘 꼭대기에서 보시는 분에게는 평면이란 말이에요. 그걸 하느님이 모든걸 예정하셨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결정되어있는 닻. 거기에서 그 밧줄 안에서 움직이는 걸 '자유의지' 라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역사에게는 사실 자유의지가 없는 거예요.

 

근데 인간들이 자유의지, 자유의지 하는건 인간의 자존심을 어떡해서든지 챙겨 보려고 조직신학이라는 걸 만들어서 자기들이 만들어낸 말이지 성경의 어디 자유의지라는 말이 있습니까?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이 얘기를 하고 싶으니까.. 묵시라는 닻은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구원을 받을까가 아니라 아니 왜 하느님이 아들까지 죽이면서... 우리를 창조해야 했을까' 를 알고 가는 거예요.

흙에 갇히는 게 지옥이라 그러잖아요? 흙으로 만들어진.... 내 안에 내가 갇힌다라는 건 인간이 자기 자존심 주체성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 자기의 그 어떤 주체성을 발휘하고 자기를 개발하여 어떤 존재됨을 챙기려고 하는 이 모든 게 다 지옥이에요 인간들이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이라니깐요 근데 사람들은 막 불타고 불이 소금처럼 뿌려지고 구더기가 있고 이런 지저분한 이런 걸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가기 싫어서 억지로 뭔가 착한 짓을 하려고 하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그리스도교라니까요.

성령이 와서 우리 안에 죄가 뭔지 심판이 뭔지 가르친다라는 건 이 세상에서 지옥을 경험한다는 뜻이에요. 인간들은 자기들이 자기의 자존심과 주체성을 챙겨서 그리고 역사에 자기들이 어떻게 기여가 되는 존재라는 걸 챙기면 굉장히 기분 좋아하고 행복해 해요.

 

인간이 제일 힘들어 하는게 '자기부정과 자기배제' 이거는 누구도 못견뎌요. 그냥 어떻게 해서든지 이 자기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하는 일들을 교회 안에서도 하게 되고 그걸 못 알아주면, 어떻게 해서든지 이 역사와 인생은 자기들의 존재성을 증명을 할려고 하는 거죠? 요게 지옥이에요 그게! 그런데 그걸 그렇게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예수믿는다고 하면서도. 이게 고통스럽고 아주 아프고 괴로와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지옥이 진짜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요. 지옥이라는데가 나중에 천국가서 보면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곳일 수 있어요. 귀있는 이들만 들으세요. ㅎㅎ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처럼ㅎㅎ 삼지창 든 괴물들이 야차들이 막 눈알을 뽑아가지고 그걸로 저글링하고 구슬치기하고 이런데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자기 안에 갇혀서 나를 증명하려고 하는 그 곳!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쟁이나 다툼이나 이런 것들이 도대체 왜 일어나요? 자연재해 같은 거 한번 보세요. 도대체 그런 것들이 왜 점점 이렇게 엄청난 것으로 변해가죠? 인간들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마구 어떤 일을 하면 할수록 자연이 스스로그럴그래야 그건 自然이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건데 우리가 그 자연을 나를 위해 끌어 당겨서 나를 위해 쓰면서 부터 쓰나미니 뭐 이런게 오는 거거든요? 그리고 지구 온난화 현상 이런 것들이 다 뭐 꿀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하는게, 지구에 있는 모든 꽃의 삼분의 일이 촉매화 거든요? 꿀벌들이 이렇게 죽어가면요 이제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 식량난 같은 거는 이제 곧 닥칠 문제예요.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대해서 전혀 위기감을 못갖는 거죠.

!는 영원할 것 같은 거예요. 역사는 영원할 거 같은 거죠.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종류의 투쟁이건 싸움이건... 다 그건 진짜 인간의 마귀적 본성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는 것들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공평하게 살자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 왜 우리는 이렇게 항상 빈익빈 부익부의 이런 악순환에 의해 왜 이렇게 늘 가난해야하는가? 뭐예요. 강자에 대한 질투예요. 아닙니까? 요즘은 발품만 조금 팔면 아침 점심 저녁 따뜻한 국과 밥을 무료급식소에서 먹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진짜 굶어 죽을까봐 투쟁하나요? '나두 너처럼 폼나게 살고 싶은데... 왜 나는 이렇게 폼이 안나는 삶을 살아야 돼?'이걸 깨기 위해 투쟁을 하는거란 말이에요.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이 그런 것들을 저에게 이제 경험하게 해 주신 걸 저는 아주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그것도 이제 건강하고! 건전한! 교회라는 곳이 일로 매진하는 게 바로 그런 거예요 '제주도 강정마을에 다 내려가서 해군기지 건설을 막자!' 근데 그걸 왜 막자는 거예요? 가만히 보세요. 우리는 교회가 진짜 싸워야 할 것들을 싸우지 않고 엉뚱한데 가 갖고 힘을 빼고 있는 거예요. 정치에 개입도 그래요.

보세요.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맹세로 구원을 받았어요. 그럼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반드시 알고 가야할 것은 '아 하느님이 아들의 심장에 칼을 꽂아 하느님의 맹세로 내가 구원받은 거구나' 를 알고 가면 되는 거예요. 그게 역사와 인생이 하고 가야 할 것이에요.

 

이 세상 속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나는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이며 내가 그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끝까지 내 안에 갇혀서 나만을 위해 사는 지옥! 땅들이 땅에 갇혀서 땅엣 것만 생각하며 사는 바로 그 지옥을 살고 있구나를 알고 가야 되는건데, 교회가 그러한 지옥 땅들이 흙들이 모여서 만드는 세계를 보다 살기좋고 평화롭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겠다는 거죠? 그런데 온통 다 그렇게 가고 있으니까 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무슨 개 풀뜯어 먹는 소리냐고' 왜냐면 인간이 중심이 되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성령을 받은 일도 없기 때문에 뭐가 그리스도교인지, 진짜 평등이라는 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알되 '아유 나는 이 정도도 감지덕지입니다. 그나마 이렇게 하느님께서 살려두시는 것 이것 자체가 복입니다' 로 내려가는 게 성도지, '이걸 어떻게 깨서 이 구조를 뒤집어엎어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사는 그런 곳으로 만들자' 가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란 말예요.

 

그 자리로 그렇게 내려갈 때 그들이 모여 사는 곳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아무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차등이 없게 되죠 그러면은. 그런 사람은 '내가 뭘 했어요' 를 이야기할 수 없자나요. 거기가 차등이 없는 진짜 평화 에이레네~의 세상인 거예요. 그걸 '천국' 이라고 하지

어떻게 해서든 여기에서 이걸 뒤집어엎어서 '우리 인간들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라는 것을 하느님한테 보여주자!' 이게 그리스도교가 아니란 말이에요 ? 그런데 건강한 교회라는 곳이 이렇게 투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니깐요? 나가자~~! 이거예요 다. 나가자! 아니오. 진짜 복음을 알면요 복음은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는 게 아니라....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살게 하는 그 삶을 살아요. 이건 똑같은 말인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말이에요.

말씀대로 살아서 바리새인들이 지옥갔잖아요. 그러면 말씀대로 살게 시킨 존재가 누구예요? 마귀란 말입니다. 성도는 말씀이 그려내는 그 삶대로.. 인간을 죄인으로 해석해내는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그려내는 그 삶을 사는 것.. 끌려가서 사는 것을 성도의 삶이라 그래요. 그게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십자가를 앞뒤로 하여 왜 하느님이 구약 옛 언약과 신약으로 갈랐냐면 그러니까 구약을 사는 사람은 다 지옥가고 신약때 구원받은 사람만 천국간다 이 말이 아니라, 하느님은 묵시 속에서 깨진 것만 골라내듯 자기백성 골라내신단 말입니다. 그건 다 하느님이 하실 일이고. 이 역사는 왜 하느님의 은혜로만 존재해야 되는가.. 모든 존재는 왜 하느님의 은혜로만 존재해야 되는가를 그려내는 도화지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구약 신약 하느님이 뭘 거꾸로 뒤집어 엎었어도 상관없어요~ 그리고 이스라엘을 택했다가 이스라엘을 버렸다가 이방인을 구하고 다시 이스라엘을 구하고 이게 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인생 속에서 벌어지는 일인데 그걸 전체 역사가 또 이렇게 한번 그려내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당연히 자기의 존재성을 챙기기 위해 율법주의자가 되요.

 

그럼 하느님이 이걸 버린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시고 그 다음에 진짜 은혜로 이 자격 없는 자가 구원받아야 한다말이야? 이방인이 구원받고 그러고는 율법이 완성되는 이 전체 이야기가 우리의 이 인생속에서 일어나고 역사가 그렇게 진행되어져 간다'라는 걸 성경전체가 그리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세대주의적 해석으로 해서 뭐 이스라엘이 이제 무화과 나무꽃이 피니 꽃이 어딜 펴요? 무화과나무는 꽃이 안으로 피는 꽃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무화과 잖아요. 그런데 무화과 나무에서 꽃이 펴가지고 지금 이스라엘이 그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냥 사람들이 표피적으로 성경을 보면서.

아니 명확하게 구원은 묵시 속의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맹세로 이루어진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의 맹세는 반드시 지켜진단 말예요. 그래서 영혼의 닻이라는 말이 나오고. 아니 더이상 무슨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하냐구요. 그러면 너희들의 안에 있는 시기 질투 뭐 이런 거 다 버려라 더 열심히 살아라 구원을 이뤄라 이런 말은 무슨 말인가. 이 말씀대로 지키라는 거 아닌가? 이거 불교에서도 가르치는 겁니다 네?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건 우리 인간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뭘 버려야 된다 이건 너희들 안에서 나오는 게 그거 밖에 없다 라는거 니들 그러면 진짜 알어? 이게 성령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는 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니까. 성도만 알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그 묵시 속에 완료된 나의 삶을 추구하게 되어있어요. 왜냐면 지옥을 살다보니깐 이거는 아니잖아를 알게 되기 때문에. 그런데 추구하면서 뭘 배우냐면 하느님이 거기에 하느님의 맹세로 완료시켜 놓으시지 않았으면 나 어떡할 뻔 했나 이걸 배워야되는 거지, 여기에서 그걸 버릴 려고 연습을 해서 야 난 이 만큼 했어요 라고 가져가면 거기에는 그걸 한 분량 만큼의 차등이 생기게 된단 말입니다. 거기를 지옥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내가 그런걸 추구를 하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예잖아요. 그렇게 착하게 살아놓고.... 반드시 저 세리보다는 내가 낫죠?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 삶을 추구하게 하시면서도 계속해서 나의 본래의 모습 본전의 모습을 드러내신단 말이에요. 인간들이 그걸 교묘히 감추고 있어서 그렇지 ...그걸 진짜 자유한 자들은 '그래요..내가 이래요..' 라고 내어 놓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냐면은 '고봐! 복음을 알면은 진짜 은혜를 안다는 놈들은 진짜 방종하게 산다니까?' 라고 이야기를 해요. 지들은 그거를 감추고 있는 거 뿐 이면서. 그러니 그걸 다 보고있는 저로서는 가증스러워서 못보겠는 거예요. 성경이 인간은 어떤 존재라는 거를 이렇게 명확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틀렸다고 자꾸 우기고 싶은 거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가 뭔지 그것만 그냥 알고 가면 되요. 그리고 하느님이 분명 그렇게 자식의 목숨까지 끊어 가면서 해결하려고 했던 그런 나 중심의 사고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삶이 얼마나 악한 삶인 것을 우리가 알고 거기에서 자꾸.. 그게... 내가 싫어지는 거예요. 싫어지는 걸 성숙이라 그래요.

근데 묵시 속에서 점점 말씀 속에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뭘 이 세상에서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기려고 하고자 하는 것들이 다 아무것도 아닌 거로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 하느님의 은혜로 맹세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어 컨베이어 벨트 역사라는 컨베이어 벨트위에 이렇게 던져졌다가 나중에 하느님이 뽑아낸 자들만 모여서 그 하느님 나라를 사는 거예요. 나머지는 다 엑스트라예요 그냥. 무대장치..

 

그래서 변화산에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같이 나타나는 거예요. 모세 BC1500년 사람. 엘리야 러프하게 BC900년 사람이라고 그래요. 그럼 나이가 육백살 차인데 엘리야가 아이고 형님 이러겠습니까? 모세한테?^^ 아이고 육백살이나 많은 형님이 오셨네? 묵시 속에서는 우리 완료라니까요? 그래서 같이 상의하는 거예요 ㅎㅎ 육백살 차이나는 사람. 기분나쁘세요? 천국가서 우리 친구라니까? ㅎㅎ 내가 한 살이나 더 먹었는데 저게 진짜.. 저러고 계신 거예요?

아니란 말이에요. 그걸 평등이라고 한다니까요? 이 심오한 말을 어떻게 알아ㅎㅎ 그러니까 성경을 우리가 그냥 도덕책처럼 이렇게 표피적으로 보면 안돼요.

구원은 하느님의 맹세로 완성되고 우리 신분은 영혼의 닻처럼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느님의 선택 속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일 수 있어요. 그래도 할 말이 없어야 되는 거예요. 요즘 저는 특히 더 그래요. 나같은 인간이 안 선택해야 맞지 뭐 아니야 나는 어떡해서든지 구원받아야 돼 이게 점점 없어져요.

 

시편 110편에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의심하고 하는데 그때마다 하느님이 말씀을 보내서 구원하신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게 이해가 안가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지 뭘하는 거예요. 그거 왜 그러고 앉아있냐고요

그 무슨 생태계가 파괴되고 뭐. 생태계 파괴되면 거기만 되나요? 지금 온 세상이 그렇게 파괴되어 가고 있구..그걸 어떻게 해서든지 막는게 아니라 그게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그래서 하느님나라는 와야 되는구나..' 라고 복음을 전해줘야죠. '세상은 이렇게 흘러갑니다. 우린 이렇게 집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미 이걸 말씀해 놓은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하느님 나라를 희망 합시다' 로 가야지

그리스도교는요 하느님을 알아가는 거예요. 하느님을 아세요 제발.. 그 은혜를 배우세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게 너무 감사해서 절절히 눈물이 나는 그런 눈물을 흘려야지 무슨 뭐 엉뚱한 그런... 그리스도교는 보다 웅숭깊고 보다 넓고 높은 진리란 말입니다. 하느님과 대면하세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교회의 틀에서 헤매지 마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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