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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마르2,1-1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01-15 조회수1,113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1년 1월 15일 금요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마르2,1-12)

연중 제1주간 금요일 / 2011-1-14

 

1독서<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히브4,1-5.11)

형제 여러분, 1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또 여기에서는,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11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화답송 시편 78(77),3과 4ㄱㄹ.6-7.8(◎ 7)

◎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 우리가 이미 들어 아는 것을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것을 전하리라주님의 영광스러운 행적과 권능을다가올 세대에게 들려주려 하노라

○ 그들이 일어나서제 자손들에게 들려주라 하심이네하느님께 희망을 두고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않으며당신 계명을 지키라 하심이네

○ 고집부리고 반항하던 세대그 조상들처럼 되지 말라 하심이네마음이 흔들렸던 그 세대그들의 정신은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네

 

복음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마르2,1-12)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하느님을 모독하는군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히브4,1~5.11)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리하여 나는 분노하며 맹세하였다. '그들은 내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3~4)

 

히브리서 4장 3~10절까지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의 약속에 대해 진술한다.

본문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얻을 수 있었던 안식을 놓치고 말았지만, 신약 시대의 믿음을 지닌 성도들은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본문에서 '들어갑니다'로 번역된 '에이세르코메타'(eiserchometha)는 직설법 현재시제로서 변할 수 없는 사실을 나타낸다.

즉 믿음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하느님의 '안식처로'에 해당하는 '에이스 텐 카타파우신'(eis ten katapausin; into the rest)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직설법 현재 시제가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어서 실패했지만,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이 약속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진 우리'를 본문은 '호이 피스튜산테스'(hoi pisteusantes)로 표현한다. 이것은 '믿다', '신뢰하다', '확신하다', '맡기다' 등을 뜻하는 '피스튜오'(pisteuo)에 관사를 가진 과거 분사이다.

이것은 이미 믿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그 믿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자들 가리킨다. 본서 저자는 그들이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간다고 단정짓고 있다.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영적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믿음은 인간이 하느님의 약속들에 참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이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은총의 수단이기도 하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라고 번역된 '카토스 에이레켄'(kathos eireken)은 직역하면 '그분이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이 된다.

'말씀하신'으로 번역된 '에이레켄'(eireken)은 '이야기하다','예고하다' 등을 뜻하는 '에이폰'(eipon)의 3인칭 단수 완료 시제로서, 하느님께서 이미 전에 말씀하신 사건을 가리킨다.

 

여기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사실에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기록될 말씀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므로, 우리는 그 말씀만으로도 현재 우리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편 95장 11절을 인용한 히브리서 3장 11절의 말씀을 본절에서 재인용한다.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이미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그 내용을 하나 하나에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귀하고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라고 번역된 '카이토이 톤 에르곤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게네텐톤'(kaitoi ton ergon apo kataboles kosmu genethenton)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들이 이루어졌다'가 된다.

 

새 성경은 번역하지 않았지만, 접속사 '카이토이'(kaitoi)는 '그럼에도 불구하고'(although)라는 의미이다.

이 양보의 접속사가 나타내는 것은 비록 과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진 자가 그 안식처에 들어간다는 그 약속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으로 번역된 '톤 에르곤'(ton ergon; the works; 그 일들)은 하느님의 안식의 원리 혹은 그 안식처에 들어갈 약속을 가리킨다.

 

저자는 '세상 창조 때부터' 즉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apo kataboles kosmu)라는 표현을 통해 오늘날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가 이미 창조 때부터 있었음을 밝힌다.

또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게네텐톤'(genethenton; were finished)는 '되다','만들어지다','이루어지다'등을 뜻하는 '기노마이'(ginomai)의 수동태 과거 분사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느님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는 6일동안 세상의 창조사업을 완성하신 후, 제 칠일째에 만족한 상태로 안식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 안식은 사람들이 믿음과 순종으로써 동참할 수 있도록 모든 세상에 열려 있는 안식이다.

 

이 영원한 안식은 이스라엘이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나,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못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이미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다 동참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실'로 번역된 '가르'(gar)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3절에서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본절에 나온다는 사실을 말한다.

 

정확히 번역하면, '왜냐하면 그분께서 어디에선가 이와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가 된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이레켄'(eireken)은 이미 3절에서 설명했다. 저자는 본절에서 창세기 2장 2절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마치 인용한 구절의 출처를 모르듯이 '어디에선가', '어느 곳엔가'(somewhere)를 뜻하는 '푸'(pu)라는 부사를 사용한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 4절이 '호 테오스 엔'(ho theos en)이 첨가된 것 외에는 70인역(LXX) 창세기 2장 2절과 똑같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코 성경 구절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A.D.1세기 당시에는 저자는 물론 독자까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굳이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하는 방법이 유행하였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쉬셨다'로 번역된 '카테파우센'(katepausen) '카타파우오'(katepauo)의 과거시제로 쓰여 '멈추셨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뒤에 이어지는 전치사 '아포'(apo)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하던 모든 일을 끝마치자 그 일들로부터 손을 떼고 편히 쉬셨다는 의미 전달해 준다.

그리고 안식일의 휴식, 즉 '카타파우오'(katapauo)는 그 의미가 굉장히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이 휴식의 특징은 그 대상이 종교적 예배 공동체와 특정 계급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남종이나 여종은 물론 이방인과 심지어는 가축까지도 편히 쉬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것이다(신명5,14).

히브리서에서는 신약에서의 안식에 관한 개념이 풍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느님의 백성을 그들의 안식처인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도록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임무가 단지 제한적으로 성취된 것으로만 보며(히브4,8), 그것을 창조의 일곱째 날인 하느님의 참 안식과 연결시킨다.

 

천지 창조라는 대역사를 이루신 하느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는데, 처음 엿새 동안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고 기록한 반면에, 그분이 안식하신 일곱째 날에는 저녁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 랍비들은 처음 엿새에는 종말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하느님의 안식에는 종말이 없으며, 그 안식만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날은 우리가 상식으로알고 있는 개념인  24시간의 하루와는 다르다. 하느님의 안식에는 저녁이나 종말이 없다.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에 비록 이스라엘 광야 세대가 이 안식처에 들어가는데  실패하기는 했어도,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안식의 효력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오늘날 믿음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복음묵상 (마르 2,1-5)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카파르나움은 나를 위한 고을(성전)이라고 공부했습니다예수님께서 그 집성전에 계십니다집 또한 성전을 의미 합니다.

요한20, 10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말씀은 들었지만 다시 자기 집(신앙)으로 돌아갔다는 뜻입니다인간의 본능그 자기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버리지 못하는 존재그래서 나를 위한 신앙의 집(카파르나움)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많은 일을 하신 것인데 사람들은 그 카파르나움을 고집합니다.

 

루가10,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뜻을 더 원하는 그 카파르나움성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1사무8, 7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러니까 카파르나움성 성전그 헛된 신앙으로 줄 수 밖에 없는 이들을 살리시기 위해 주시는 복음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사람이 -성전 지붕을 벗기는 그 믿음으로 용서 받았다 하심입니다숫자4는 땅의 구원그 완성의 숫자라 했습니다그 땅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네 사람입니다.

그것이 땅의 구원을 위해 에덴동산(하늘)에서 흘러나온 네 줄기의 물곧 생명수와 같은 말씀, 4복음의 믿음을 뜻합니다.

카파르나움에 있는 성전 곧 스스로 지은 그 성전의 헛됨을 깨닫는 것이 복음 안에 들어있습니다그래서 그 성전 곧 너를 벗는부수는 나의 버림이 되는 것입니다그 일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가 해야 할 참 신앙인의 길입니다.

 

마태8,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저는 주님을 제 지붕(카파르나움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카파르나움에 있는 성전 그 성전은 자격 없음을 알았던 네 사람의 믿음입니다그래서 치유 받았다가 아닌 용서 받았다.”입니다성경에서 병이 나았다라는 말씀은 다 치유가 아닌 요서(죄 사함)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그 치유 속에 하느님의 용서를 찾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성전을 벗기는부수는 믿음~~~

 

요한2,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 정성이만큼 드릴테니 내 뜻을 들어 주십시오 하는 그 거래의 신앙장사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솔로몬이 지은 옛 성전입니다.( 그 옛 성전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성전이신 당신을 허물어라 하십니다예수님은 허물어지시기 위해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인 것입니다.

 

마태20,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곧 끝나버릴 세상 것을 위해 하늘이신 예수님께서 죽으러 오셨다는 말이 아닙니다그 세상 것내 뜻을 위해 섬기는 그 예수님을 허물고 내 죗값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오신 그 구원의 그리스도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요한 2장19절에 이 성전(예수)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입니다.

*첫 번째 보이는 옛 성전 *두 번째 보이는 예수님 성전.

그 예수님이 허물어 지셔야~ 곧 십자가(대속)의 그리스도로 죽으셔야영으로 오시는 그 영을 받는 이들이 *세 번째 것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그 것이 본문의 네 사람의 믿음이며 그 믿음이 네 복음 안에 들어 있습니다.

 

1고린6,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성령께서 구원의 올바른 길로 이끄십니다.

 

에페2,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열성이 아닌 하느님의 일(계획)하심으로 완성 됩니다그러니 보이는 그 치유의 예수님만을 섬기기 위해 나의 열성그 거래 종교 행위에만 바쁘면 시간을 빼앗기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네 복음 그 안에 숨어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 분과 함께 한몸이 되어 들어가는 곳이 하느님 나라니다.(에페1,4-7참조)

 

루가10, 41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마르타야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42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바른 종교 행위 말씀을 빼앗기지 맙시다그 시간을 세상에게도 빼앗기지 맙시다.

♡ 아멘 -*^^*-

 

 

 

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복음(마르2,1~12)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5)

 

'중풍 병자'에 해당하는 '파랄뤼티코스'(paralytikos; the sick of the palsy)에서 영어 단어 'paralysis'가 나왔다. 이 병은 뇌출혈(cerebral hemorrhage)등으로 몸의 일부분이나  전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증상을 갖는다.

 

마르코 복음 2장 3절에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침상)에 실어서 예수님께로 옮겨졌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중풍 병자를 옮긴 사람들은 그의 종들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들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 2장 5절에서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구절을 볼 때, 주인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종들은 아니라고 본다.

 

한편 '지붕을 벗기고'에 해당하는 '아페스테가산'(apestegasan; they uncovered; they made an opening in the roof)의 원형 '아포스테가조'(apostegazo)는 '지붕의 덮개를 벗기다'(unroof)는 정도의 뜻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지붕이 평평하고 외부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계단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팔레스타인에 있던 서민들의 집의 지붕은 들보를 중심으로 나무들을 걸치고 짚으로 덮고 진흙을 발라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벗겨 낼 수가 있었다.

 

중풍 병자가 누운  들것을 멘 자들은 군중들이 너무 많아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 가기 힘들자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의 지붕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집의 지붕을 갑자기 벗겨 내고 구멍을 내어 들것을 내림으로써, 방 안에 모여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흙 먼지가 쏟아져 내리게 하고, 느닷없이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그 가운데로 달아내리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 치유 기사의 주인공이 된 사람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군중들'이라는 장벽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유에 대한 확신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갔고, 그 결과 중풍 병자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들의 믿음'에 해당하는 '텐 피스틴 아우톤'(ten pistin auton; their faith)에서 '아우톤'(auton; their)은 3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병을 가진 당사자만의 믿음이나 반대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나간 동료들의 믿음만이 아닌, 그들 모두의 믿음의 결과였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여기서 '보시고'에 해당하는 '이돈'(idon; saw)의 원형 '호라오'(horao)는 어떤 대상을 시각적으로 관찰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인지적으로 상대를 파악한다는 뜻도 갖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단순히 나타난 행동 뿐만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있는 믿음도 꿰뚫어 보셨다는 뜻이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얘야'에 해당하는 '테크논'(teknon; son)은 '자녀'(마태2,18)를 가리킨다. 히브리적으로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추종자(1베드1,14), 영적인 상하 복종 관계에서의 따르는 자(에페5,8)라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서 그렇게 부르시는 것은 예수님 당신의 치유 능력을 믿고서 자신의 몸을 맡기는 믿음을 보시고 당신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로 불렀다고 본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에 해당하는 '테크논, 아피엔타이 수 하이 하마르티아이'(Teknon, aphientai sou hamartiai; Son, your sins are forgiven)에서 드러난데로,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 행위는 중풍 병자의 죄를 먼저 제거함으로써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모든 병이 직접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의 중풍 병자는 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병에 걸렸으므로,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죄의 용서의 선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죄를 사하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마르2,10).

 

원래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 권한이기에(시편50,1.2; 130,4; 느헤9,17; 이사1,18), 예수님께서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성자 하느님이시며(로마9,5), 당신에게 죄사함의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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